“오늘 정말 최고였어요. 제가 오늘 밤 최고로 모실게요.”
“당신은 언제나 최고였어. 거기에 더해서 최고로 모시면 나 자기에게 복상사 당할지도 몰라.”
“그럼 쓰나요. 이렇게 멋진 낭군님을 제가 죽게 만들 수는 없죠. 그래도 기대하세요!”
라운딩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정애는 세상을 다 얻은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면서 느꼈던 설움과 불만들이 한 번에 가셔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오늘의 이 기분을 누리려고 지금까지 산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기분, 특히 자신이 상사로 모시던 이들까지 머리를 숙이고 복종하며 서비스를 하고 자신의 몸짓 하나에 기분을 맞추려 뒤를 따르던 순간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새삼 세상사는 맛이 생겨요.”
“오늘 무척 좋았나봐. 그렇지만 조심해. 그럴 때 적들이 생기는 법이야.”
“생겨보라지요. 당신이 모두 처리해 줄 테니 저는 걱정 하나도 없어요.”
그녀는 김차관이 가진 권력이면 세상에 못할 것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이 남자만 내 편이라면 나는 세상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
이 순간은 그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고 무엇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골프장 인근의 식당은 오늘 저녁 특히 더 왁자지껄했다. 소문을 들은 캐디들이 오늘 벌어졌다는 일에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모여들었고, 골프장 직원들도 여기 저기 눈에 띄었다. 어떤 자리는 잔뜩 취해있었고, 어떤 자리에서는 고성이 오고 갔다. 같은 점이 있다면 모두 평소와 달리 과격했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점이다.
“나는 내 몸뚱아리가 저주스럽다. 이 몸이 그린을 말끔하게 제설해줘서 귀하신 사모님이 홀컵에 볼을 떨구고 환호하시게 만들었거든. 그걸 생각하면 열불이 터져서 숨을 못 쉬겠다.”
“그게 왜 우리 잘못이냐. 창피함도 모르고 여기에 와서 골프를 치겠다고 얼굴을 내민 그 여자가 미친 거지. 다른 게 화냥년이냐, 바로 정애 그년이 화냥년이다.”
“우리나라에서 차관이면 조선시대로 보면 당하관 정도 되나? 내가 보기에 그년이 정실은 못되고 첩실로 들어간 모양인데, 그것도 자랑인줄 알고 얼굴 쳐들고 다니며 위세를 부리려 드네. 참 불쌍하고 가엾다.”
어느 좌석에서나 대화는 공통적이었다.
구석진 자리에서 연지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현균은 들려오는 여러 말들에도 묵묵하게 잔만 비우고 있었다.
“천천히 마셔라. 안주도 좀 먹고. 그래봐야 네 몸만 망가지거든.”
그녀는 자신도 폭음을 하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제 그에게 했던 말들이 후회스러웠다. 그의 마음속이 어떨지 넉넉하게 짐작되어서다. 골프장에서 몸담고 있는 유일한 이유가 공평함과 상식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늘 말하던 그가, 점점 더 현실이 판이하게 다름을 느끼며 갈등과 회의에 빠져 있는 시기였다. 그의 힘겨운 마음에 오늘 일은 불을 붙인 격임을 잘 알기에 그의 폭음이 불안한 것이다.
“클럽하우스에 불이라도 확 질러버리고 싶어.”
문득 그녀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은 후 처음으로 그가 말을 뱉어냈다.
“미쳤다. 그렇게 하면 네 속이 편안해 진다든? 쓸데없는 생각이다.”
“클럽하우스가 없어지면 그 누나가 다시는 여기 안 오고, 나나 여기 있는 모두가 이렇게 열 받아서 술을 들이킬 이유도 없을 거잖아.”
“그런 사람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힘들어 하는 것은 너무 가치 없는 짓이야.”
“그 가치 없는 짓에 너도 지금 힘들어 하고 있잖아.”
“이만큼만 하자. 그런 사람의 일로 힘들어 하는 우리가 아깝다.”
그러자 그가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보았다. 연지는 그의 눈을 보다가 흠칫 놀랐다. 그의 눈이 무척 맑고 투명했기 때문이다. 온갖 번민에 쌓여 있어야 할 그의 마음이 지금 오히려 고요한 것이다. 차라리 화풀이를 하고 분통을 터트리는 것이 덜 불안했을 것이다.
“마음을 비워라.”
그녀는 그의 머리를 가슴에 안고 등을 다독이며 머리를 흔들었다. 불길한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털어내 버리고 싶었다.
겨울이 끝자락에 이르고 있었다. 성급한 나무와 풀들은 제 나름으로 분주하게 뿌리를 다듬어 꽃눈과 잎눈을 키워낼 준비를 시작했다.
마성은 요즈음 들어 눈에 띄게 달라진 정애를 느끼고 있었다. 몇 달 전부터 그녀의 일상이 미묘하게 바뀌고 있음을 느꼈지만, 그녀에게 얼마간의 사생활은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해 애써 모른 척 지내 왔었다. 이제 자신에게는 친 딸로 여겨지고, 작은 아이도 자신을 친아빠로 여기는 것이 분명한 민지와 일상을 함께하는 재미로, 그녀와의 소원해짐을 이겨내는 중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애의 행동은 분명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졌다. 여전히 집에서의 일상은 아무 문제가 없고 잠자리도 예전과 다름없이 훌륭했지만, 그녀의 행동에서 느껴지는 것들은 사뭇 달랐다. 아파트의 경비원들을 대하는 태도나 같이 마트에 나가서 쇼핑을 할 때 그곳의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는 아랫사람을 부리는 주인의 자세가 불쑥불쑥 드러나고는 했다. 어느 때는 자상한 윗사람처럼 수고한다며 다독이는가 하면 자신에게 터럭만큼이라도 거슬리면 가차 없이 질책하며 꾸짖었다.
‘사설 경비원을 고용해봐야 해’
그는 그녀의 낮 시간에 대해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이 많이 있을 수도 있음을 인지했다. 민지를 제대로 보호하려면 아이의 엄마인 그녀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했다.
나날이 파리해지고 수척해지는 현균에게 연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주려 애썼다. 가뜩이나 힘을 쓰지 못하는 그의 남성은 요즘 들어 한 번도 기운을 차린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의 집에서 동거하다시피 그를 돌보며 서리 맞은 고구마 순처럼 시들고 있는 그를 지켜내려 안타까운 정성을 쏟고 있었다.
“우리 가까운 곳에 여행을 다녀올까? 아니면 조금 무리해서 따뜻한 나라에 잠시 다녀올까?”
“응! 그러자.”
초점마저 잃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무엇을 하자고 권해도 그는 모든 것에 순응했다. 그렇지만 그의 몸은 무엇에도 움직이지 않았고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의지를 잃었고 희망도 포기한 그가 가끔씩 초점이 잡히는 눈망울을 보여줄 때의 눈빛은 날선 사금파리 조각처럼 매우 추운 날의 파아란 하늘 모습을 띄었다.
“우리 오늘 강화도에 다녀올까?”
아침 일찍 눈을 뜨자 현균이 뜬금없이 말했다.
‘이렇게 추운 날 강화도에 가서 뭘 해!’
먼저 떠오른 말을 삼킨 채, 무엇인가를 하자는 그의 말이 반가워서 연지는 눈이 크게 떠졌다. 찬찬히 살펴보니 그의 눈빛은 초롱 해졌고 얼굴에 옅은 미소도 감돌기까지 했다. 푸석했던 낯빛도 제법 안정되어 보였다.
“고마워!”
와락 껴안는 연지를 현균은 부드럽게 안았다.
“나 때문에 무척 고생했지? 내가 더 고마워!”
“너 이제 괜찮아 진거야?”
“내가 뭐 언제는 이상했나? 나 멀쩡해!”
짐짓 너스레를 떠는 그의 모습이 반갑고 귀여워서 연지는 마냥 행복해졌다.
“그러자. 우리 아침 일찍 챙겨먹고 겨울 바다 보러 가자!”
박진수의 고민이 나날이 커져갔다. 지금까지 김차관의 여자들을 여럿 관리해왔다. 그렇지만 지금의 여자만큼 급격하게 바뀐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갑작스런 신분의 변화로 갈등과 부적응에 시달리며 한동안의 시행착오와 시간을 필요로 했고, 일부는 아예 적응을 하지 못하고 스스로 떠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이 여자는 별다른 적응의 과정도 필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오히려 바뀐 환경과 신분을 즐기고 어느덧 위험수위마저 넘나들어 관리하기 어려운 순간까지 만들고는 했다.
“자네의 임무는 내 주변의 여자들을 철저히 숨기는 일이다.”
김차관이 비서로 고용하며 요구한 단 하나의 조건이었다.
“사모님! 오늘처럼 주변의 이목을 끄는 행동은 삼가 주시기를 당부 드립니다.”
“내가 우리 민지한테 잘 어울려 보이는 옷을 모처럼 발견했다고! 그래서 길가에 차를 잠시 세워 옷을 구경하는데 옆 가게 지들이 뭔데 행패를 부려. 도로가 자기 꺼야? 옷가게 주인도 장사를 해야 하잖아. 지들 물건을 왜 꼭 그 시간에 차에 실어야 하는데. 내가 30분을 주차 했어 아님 한 시간을 세워뒀어. 그리고 박비서 말을 이상하게 한다. 내가 일부러 다른 사람의 이목을 끌려고 한다는 거야? 나도 조용히 살고 싶은 사람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아버지뻘의 남자에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제 말은 사모님께서 조금 불이익을 당하시는 일이 생겨도 되도록 참으셔서 사람들과 마찰을 피하셔야 한다는 의미로 드린 말씀입니다. 눈에 띄시는 행동을 피하셔야 하십니다.”
“내가 이러고 사는 게 무슨 큰 잘못인 것처럼 말하고 있네. 나도 그럴 만 하니까 그러는 거야. 나 지금 박비서에게 무시당하는 기분이 드네. 그런 거야?”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만 조금만 조심을 하면 차관님께 누를 끼치는 일이 없다는 생각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 존재가 그이에게 누가 된다는 말이네! 그럼 이 생활을 집어치우면 되겠네.”
“아닙니다, 사모님! 제가 너무 예민하게 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됐어요.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말을 마친 그녀가 휑하니 방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박진수는 긴 한숨을 내쉬며 밖으로 나왔다. 조심성이 몸에 밴 그는 늘 하던 대로 집에 돌아가기 전에 자신의 근무지인 아파트 주변과 주차장을 훓어 보았다. 그의 시야에 이상한 차 한 대가 들어왔다. 특별히 무어라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불편한 느낌을 지우기 힘들었다. 오랜 기간을 이 일에 몸담은 그의 육감이었다. 그는 자동차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