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

동암역에서 전철을 기다렸다. 11시 38분쯤 안내판이 전철의 진입을 알린다. 갑자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자전거가 나갑니다. 따르르릉...” 음악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웃음이 나온다. 아이디어가 참신하구만.

전철 안은 거의가 20대 초반 아니면 60대 이상의 노인들로 양분되어 있었다. 하긴 지금 시간에 30~40대가 전철 탈 일이 없겠지. 눈을 감으니 지난 일이 생각난다. 처음 경인선 전철이 생긴 것이 1974년도 광복절이었고 그날은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쓰러진 날이었다.

1983년도 4월 직장을 잡으면서 그때부터 전철 인생이 되었다. 93년도에 자동차를 구입하면서 전철은 졸업했지만 무려 십년을 전철에서 보낸 것이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여유가 있었는데 갈수록 인구유입이 많아지면서 경인선도 사람들로 메워터지게 되었다. 부평, 부천을 지나 개봉에 도착하면 말 그대로 숨쉬기조차 힘이 들었다. 나는 앉아가는 조(組)였는데 위로 사람들이 덮쳐올 때면 아무리 예쁜 아가씨가 눌러대도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부터 밀폐공간 공포증이 생긴 것이다. 죽음의 공포까지 느꼈으니.

청량리역

이러저러 생각에 어느덧 청량리에 도착했다. 광장 쪽으로 가기 위해 4번 출구를 찾아가는데 어디선가 옅은 커피향이 퍼진다. 그 내음 쪽으로 발길을 잡으니 그게 L백화점 연결 통로였다. 청량리 전철역은 너무 오래되어 낡았는데 그 백화점은 바닥부터 대리석으로 빛이 휘황찬란한 것이다. 너무 대비가 되었다.

백화점을 벗어나니 예전 청량리 광장은 민자역사를 신축한다고 공사장이 되어 있었다. 1974년도 고1때 청평을 간다고 청량리역을 찾은 것이 처음이었다. 70년대 말 80년대 초 대학시절 청량리역 광장은 젊은이들로 가득 찼었다. 거의가 청바지에 군복 물들인 윗도리 하나 걸치고 배낭을 둘러메고 경춘선을 타고 놀러 다녔다. 기차 안에서는 소주를 들이켜며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러대곤 하였는데...

아침은 늦게 챙겨 먹었지만 갈 길을 생각해서 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백화점 뒤쪽으로 가보니 저쪽 후미진 응달 구석에 예닐곱 명이 모여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노숙자인 모양이다. 슬쩍 쳐다보고는 식당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일어서서 비틀비틀 걸어오며 내게 아는 척을 하는 것이다. 아마도 머리는 덥수룩하게 길지 수염도 길렀으니 그 몰골이 노숙자 같이 보였던 모양이다. 와서 막걸리나 한잔 하라는 것이다. 되었다고 사양은 했지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긴 인생이 별 것이더냐. 어차피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태어나서 이 세상에 잠시 빌붙어 살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가멸음(富)이라는 것도 이 지구의 자원을 누가 더 많이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일 뿐 내 것 네 것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크게 보면 삶이 다 노숙자와 같은 그것이 아니겠는가.

오후 2시 중앙선에 몸을 맡겼다. 1990년과 1996년 두 번에 걸쳐 일본에 출장을 간 적이 있었다. 거기서 지하철과 신간센을 보면서 많이 부러워했었다. 그런데 우리 Korail도 이젠 일본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30년 전과 비교해보면 정말 많이 발전한 것이다. 일없는 한사(寒士)가 이에 어찌 소회가 없을소냐!

십년성상상전해 (十年星霜桑轉海) 십년 세월에 뽕밭이 바다 된다던가

해변상전역삼번 (海變桑田亦三番) 바다가 뽕밭 되기를 세 번이었네

인몽영장망류수 (人夢永長忘流水) 사람은 영원을 꿈꾸어 물 흐름을 잊는데

지천상공지불변 (知天常空地不變) 하늘과 땅은 언제나 불변으로 아누나

열차 안에서

차표를 보니 5번열차 41번 좌석이었다. 541? 145짓고...짓기는 지었는데 장땡인지 망통인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 무심코 밖을 내다본다. 날씨는 청명하고 들판은 이미 누렇게 익은 벼들이 바람에 한들거려 마치 장마철 황해바다를 보는 느낌이다.

멍하니 바라보다 눈이 확 트여진다. 팔당호의 푸른 물결이 푸른 하늘과 어울려 한적하기 그지없다. 마음까지 절로 상쾌해진다. 양평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이 근처에 여유당 정약용의 생가가 있던가. 고인은 박람강기로 수많은 저서를 남겼건만 어리석은 후학은 이룬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이 없다는 자책감이 밀려온다. 하기야 인생이 자기 뜻대로만 된다면야.

가다보니 작은 절벽 밑으로 강이라고 하기에는 작고, 시내라고 하기에는 제법 큰 물길이 옥색 빛을 뿜어내며 비경을 자랑한다. 오리인지 뭔지 모를 새들이 한가히 물위에 떠 노닌다.

기암단현소청송 (奇巖端懸小靑松) 기암 끝에는 작고 푸른 소나무 걸렸고

옥류변영다백압 (玉流邊泳多白鴨) 맑은 물가에는 흰 오리 떼 떠 노닌다.

여객고소여충제 (旅客孤嘯與蟲啼) 벌레 울어댈 제 나그네의 외로운 휘파람

운영추풍삼어납 (雲影秋風滲於衲) 구름 그림자 가을바람은 옷소매에 스민다.

어느 새 원주에 도착했다. 치악산이 그리웠다. 구룡사도 다시 가보고 싶어진다. 젊은 시절 집사람과 연애할 때 캠핑 갔던 곳이 아니던가. 홍안의 그 모습은 이제 간 곳이 없고 어느덧 둘 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를 넘기고 보니 흰머리에 흰 수염도 언뜻언뜻 비치게 되었다.

신라 말 왕권의 쇠퇴와 부패로 곳곳에 민란이 일어나고 도적 떼가 발호하였다 하는데, 양길이란 괴수가 북원(北原)에서 터를 잡고 있었다 하니 그 북원이 원주였던가. 궁예가 그 밑에 있다가 배반을 하고 왕건 또한 궁예 밑에서 배반을 하여 고려를 세웠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던가. 만일 양길이 성공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면 궁예나 왕건이 만고의 역적이 되었을 것이다.

이성계 또한 황위를 찬탈하고자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여 최영을 척살하고 정권을 잡더니 기어이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라고 모함을 하여 폐위시켰다. 우왕이 죽기 전에 자신의 겨드랑이에 비늘이 있음을 보이며 용의 후손이라고 강변을 하였다는데  아마도 왕(王)씨의 핏줄이 아니라는 것이 더 억울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사가 다 부질없는 일인 것 같다. 그러니 그저 제 분수에 맞게 자기의 세상을 살 일이다. 각자의 보는 눈이 다르고 각자의 꿈이 다르니 지구는 하나이되 세상은 인구수만큼이나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양길소차장도세 (良吉巢此將盜世) 양길은 여기에 둥지 틀고 세상을 훔치려 하였고

작타동종욕구사 (鵲打銅鐘欲救士) 까치는 동종을 쳐 선비를 구하려고 하였다.

수지왕업어송악 (誰知王業於松嶽) 왕업이 송악에 있을 줄 누가 알았으랴

이개백리성계수 (李開百里成桂隨) 도리 꽃이 백리에 만발하니 조선이 서다.

노승사퇴참원적 (老僧寺退參圓寂) 늙은 중은 절 툇마루에서 원적을 참구하고

걸객풍진몽호식 (乞客風塵夢好食) 풍진의 거지는 잘 먹는 꿈을 꾼다.

수부지서산락일 (誰抔持西山落日) 누가 서산에 지는 해를 움켜쥐려 하는가

풍래적단효명익 (風來樀端曉明益) 처마 끝에 바람 부니 새벽은 이미 밝아

어느덧 제천을 지났고 영월을 스쳐간다. 삿갓 김병연의 고향이라던가. 자신의 불우한 삶을 한바탕 해학으로 그렇게 살다간 인물이고 보니 아마도 전해지는 이야기도 많았을 것이고 그것이 부풀려져 꽤나 덧칠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열차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달리고 있다. 옛사람들은 이 길을 다 걸어서 다녔다는 것 아닌가. 산은 깊은데도 여러 길이 꾸불꾸불 나 있어 오고가는 사람들이며 사연도 많았을 터. 거기에 비해 기찻길은 외길로 그저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다. 가기야 편하겠지만 풍취라는 것으로 보면 걷는 것에 비해서는 어림도 없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가을색이 완연하다.

회회산록우재로 (回回山麓又在路) 산기슭 돌고 도니 다시 길 있어

거거로우역립산 (去去路隅亦立山) 가고 가는 길모퉁이 돌아서니 또 다시 산

막문산중유다경 (莫問山中有多徑) 산속에 지름길이 왜 많은가 묻지 마소

추촉홍풍상실산 (秋促紅楓橡實散) 가을이 단풍을 재촉하니 상수리 열매 흩어져

그러건 저러건 전화가 왔다. 이미 다른 분들은 다 도착했다는데 어디쯤이냐는 빈삼각묘님의 물음이다. 시간을 보니 5시를 넘어선다. 대강 정선을 지나고 있었다. 산촌이라 그런가? 도시보다는 해가 일찍 지는 모양이다. 벌써 사위가 컴컴해져간다.

모임 공지에는 저녁 6시~8시 사이에 모이는 것으로 되어 있어, 너무 일찍 도착해봐야 할 일도 없을 듯해 7시 도착 예정으로 스케쥴링을 하였건만 벌써들 모였다는 말인가? 마음은 조급해지는데 열차에 몸을 맡겼으니 별 뾰족한 방법도 없다. 들떠 오르는 마음을 누르고 공연히 차창 밖만 본다.

운전하며 갔다면 엑세레이터나 더 밟아 보겠지만, 심드렁해진다. 인생을 살다보니 어쩔 수 없는 일도 생기는 모양이다. 젊은 시절에는 그런 것이 싫어서 세차게 부딪쳐 저항도 했고 좌절감도 맛보았건만 어느덧 그런 것에 느긋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좋게 말해서 오래 참는 성품이 길러진 것이라고 하겠으나 생리학적으로는 남성호르몬(테스토스테론)의 분비 저하로 봐야할 듯하다. 나이 들어 이순(耳順)이니 뭐니 고상하게 말을 갖다 붙이지만 생리현상에 의한 공격적 성향의 완화를 뜻함이 아니겠는가.

일락산촌조래혼 (日落山村早來昏) 산마을에 저녁은 일찍 오고

역진노객탐막거 (力盡路客探幕居) 힘이 다한 나그네는 쉴 곳 찾는다.

심곡치구월출동 (深谷雉雊月出東) 깊은 골 꿩은 울고 동녘에 달뜨니

우여한광지지거 (友與寒光遲遲去) 달빛을 벗 삼아 쉬엄쉬엄 가세

도착

그럭저럭 태백에 도착했다. 청량리에서 네 시간 반이 걸린 것이다. 역을 빠져나가니 빈삼각묘님의 세심한 배려로 태백시청의 권상억 팀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그 분의 차에 몸을 실으니 곧 태백산 당골의 장수촌 식당 앞에 다다른다. 문을 열고 들어서서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일행을 찾는다. 감이 온다. 저 분들이겠구나.

빈삼각묘님이 넘겨주신 이름표를 목에 걸고 비척비척 자리로 갔다. 선비만석님, 팔공선달님, 황소걸음마님. 후례 삼배로 일단 소주 석 잔을 들이켜고 있는데 당근돼지님이 들어오신다. 구면이니 아니 반가울 수가 없다.

일배(一杯), 일담(一 談), 일소(一笑)... 이렇게 태백의 밤은 깊어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