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있어서 오로를 이용하는 주목적은 프로기사의 바둑 감상이었습니다. 원래의 대명은 여다운(如茶雲)이었습니다만 자꾸 어느 여인(?)의 얼굴이 겹쳐져, 2002년 즈음인가 여현(黎玄)으로 바꾸었습니다. 자호(自號)를 대명(對名)으로 써버린 거죠.

대충 활동을 안 하다가 작년에 다시 들어와 보니 유료여야만 프로바둑을 감상할 수 있더군요. 그런데 사이버에서 만난 어느 분이 자신의 유료대명을 빌려주셔서 일편부운기(一片浮雲起), 옹녀오점발(甕女誤點發), 흐르는강 등등 적당히 바꿔가며 접속하다가 최근에는 <기차길옆집>으로 놀고 있었습니다. 대국 감상하며, 참고도 보고 올리고, 대창에서 농담 따먹기를 열심히 하던 인사였죠.

우연치 않은 기회에 오로광장에 있는 글들을 보고 댓글토론 등의 과정을 보면서 이게 아니다 싶어 지난 6월 18일 <최근 사태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라는 제하의 글을 올리게 된 것이 나작방까지 진출하게 되었네요. 사실은 오로광장에 대해 별반 관심도 없었고, 나작방에 대해서는 더더욱 몰랐던 인사입니다. 그러다 이세돌 사태와 관련되어 몇 편의 글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서 <월간 매니아>로 까지 선정되는 바람에, 그렇다면 내 본 대명으로 활동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였고 어찌 하다보니 나작방까지 진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우선은 두통이 사라지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건망증 증세도 많이 완화되는 듯도 하구요. 특히 식(識)이 맑아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문학에 대해서는 담을 쌓은 사람이니, 시(詩)에 대해서는 더더욱 젬병이었습니다. 주변에 시인이 두어 명 있기는 하나 술친구일 뿐입니다. 그런데 종종 감흥이 일어나는 겁니다. 뭐라고 할까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해야 하나, 무언가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구체화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뭐 하여튼 그런 느낌이 간간히 오더라구요. 전에는 그냥 감정만 고조되었지 구체적인 것이 없이 뿌옇기만 했거든요.

한때 큰스님의 법문집을 읽으면서 또 선사들의 일화를 실은 책을 보면서 거기에 나오는 게송 내지는 선시에 감흥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내친 김에 김삿갓 소설을 구입해서 거기 나오는 시를 가급적이면 써보면서 음미하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시에 조금 친해진 듯합니다.

감흥이 일어날 때 겁 없이 한시로 표현해 봤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문재도 없는 제가 언감생심 시작(詩作)이 웬 말입니까? 그런데 욕설 같은 글도 올리는데 까짓 거 뭐는 못 올리랴 하는 마음으로 올려보았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하잖습니까?

이제 그 동안 올렸던 것(시라고 표현하기가 겁이 나서요)들을 모아봅니다. 쓰게 된 계기도 주석 겸 붙입니다. 감상해주십사는 사치스러운 말이고 강호제현의 따끔한 질정(叱正)을 바랍니다.

진방거사(眞房居士)를 보내며(09.02.11)

작야초춘세우성 (昨夜初春細雨聲) 지난 밤 이른 봄 재촉하는 가랑비 소리

금일거년홍엽강 (今日去年紅葉降) 오늘 보니 지난 해 낙엽 떨어지누나

불언인생오십단 (不言人生五十短) 인생 오십을 짧다 말하지 마소

하지야인영진방 (何知野人寧眞放) 오히려 들사람이 참 자유 얻었음을 어찌 알리오

올해 2월 10일 중고등학교 동창 녀석이 자살을 했습니다. 그 소식을 접하고 술을 퍼붓고는 새벽에 일어났는데 봄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녀석 얼굴이 넙죽하고 퉁퉁하여 어릴 때 별명이 <찐빵>이었습니다만 커서는 진방거사(眞房居士)라 애칭했죠. 공연히 진방이라는 말에 필이 꽂히더군요. 이제 의역으로 풀어봅니다.

젊은 시절에는 그렇게 꿈도 야무지더만

모두가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어찌하랴! 삶은 스러진 것을...

부디 좋은 곳에서 그 뜻 이루소서.

7월 초 어느 무더운 날 기원에서 바둑 한수하고 뒷풀이로 선배 형님과 술한잔을 하는데, 그 형님이 야은 길재의 시라면서 한수 적어주었습니다. 운동권 출신의 아리따운 주모가 경영하는 술집이었는데, 김민기의 노래를 들으며 거나한 김에 읊조리니 제법 아취가 넘쳐났습니다. 그런데 이삼일 정도 지났나? 대충 이세돌 사태에 대한 마무리로 <글의 독기, 글의 향기>을 쓰고 보니 그 내용이 적절하여 첨부하였습니다.

임계모옥독한거 (臨溪茅屋獨閑居) 시냇가 옆 초가집에 홀로 한가히 거하니

월백풍청흥유여 (月白風淸興有餘) 달은 희고 바람 시원한데 흥이 절로 나누나

외객불래산조어 (外客不來山鳥語) 오는 이야 없으련만 산새들은 지저귀니

이상죽오와간서 (移床竹塢臥看書) 대숲으로 상 옮기고 누어 책을 읽노라.

바로 화답시를 올려야 하나 문재가 없으니 후일로 미루었는데, 그 다음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부침개에 막걸리 한잔을 마시고 있자니 필이 꽂히더군요.

화답시 (09.07.09)

고산심곡백운다(高山深谷白雲多) 높은 산 깊은 골 흰 구름도 많은데

원야청학무란여(遠野靑鶴舞亂餘) 먼 들판에 푸른 학 어지러이 춤춘다

다우풍래고송연(多雨風來孤松然) 비바람 몰아쳐도 외솔은 의연히...

여효대반독천서(黎曉對盤讀泉書) 이른 새벽 바둑판에 천(泉)의 기보 놔본다

                               ※ 오청원 본명이 吳泉

오동장음천년향(梧桐藏音千年響) 오동의 숨겨진 소리 천년을 울리고

대붕비상만리여(大鵬飛翔萬里旅) 대붕 날아오르매 만리를 간다

약관출세하구지(弱冠出世何求志) 약관에 세상 나온 뜻은 무엇인가?

약화백호물변서(若畵白虎勿變鼠) 흰범 그린다고 쥐로 만들진 마세

이 시를 올렸더니 고맙게도 <영바모>님이 이것을 영시로 번역해서 올려주시더군요. 영시는 잘 모르나 읽어보니 제 졸시보다 천배는 나은 듯하여 소개합니다.

White clouds flow away in groups above the high mountain and the deep valley.

In a distant field a blue crane is dancing brilliantly.

Under the rainstorm a lonely pine stands strong.

At dawn I am placing stones looking at Baduk God's record.

Hidden sounds of the paulownia have been ringing for a thousand years.

A sacred bird in the legend darts a long distance at a time.

What's the reason I set an aim in life as a child ?

It's a foolish thing to draw a mouse instead of drawing a white tiger.

이세돌 사태가 진정되었음에도 여전히 일부 인사들의 악플과 독기어린 글들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 속이 몹시 상했었습니다. 화가 좀 난 김에  감히 김삿갓의 흉내를 내어 희롱시를 지어봤습니다.

오로광장 烏鷺廣場 (09.07.13) ※오로광장 4행시 겸....

오비창천감취충  烏飛蒼天瞰取蟲  까마귀 푸른 하늘 날며 벌레 있나보고

로항황류탐득와  鷺降黃流探得蛙  백로는 누런 여울에 내려 개구리 찾는다

광개심사난어언  廣開心思亂語言  마음을 활짝 열고 마음껏 떠들고는

장중기객표전와  場中棋客漂轉渦  장중에 바둑 손은 소용돌이 따라 돈다

난가지몽난우등  欄柯之夢難羽登  난가의 꿈으로는 신선되기 틀렸고

상산사호개실과  常山四皓皆失過  상산사호도 허물이 있구나

피단차결대향지  彼短此缺對向指  네 잘못 내 잘못 서로 손가락질

적여책함회두와  摘汝責陷回頭臥  너냐고 따져들면 고개 돌려 눕는다

塞外營(변방의 군영)

馬圪下眠皆刺識  말은 구덩이 아래 재워 식별표 찍고

契兀守都十塞旗  오랑캐는 도성을 지킴이 온 요새에 깃발만

場中拾捌改轉物  광장에서는 줍고 부수고 고치고 옮기는데

造刀秀拔未盡改  좋은 칼을 만들고 추려도 손볼 게 끝이 없네.

사실 욕설인데... 뜻이야 오로광장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묘사한 것입니다만 발음에 문제가 좀 있죠. 있는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새외영(싸워요)

마을 하면 개자식  (말을 하면 개자식)

글올 수도 십색기  (글을 써도 씹새끼)

장중 십팔 개전물  (장중 씹할 개존물)

조도 수발 미진개  (좃또 씨발 미친개)

그랬더니 <마포원조>님께서 아래와 같은 댓글을 남기시길래 답글을 올렸습죠.

日新日新又日新하니                日驚日驚又日驚하오이다

날로 새롭고 또 새로워지니               매일 놀라고 또 놀라오이다

日就月將年自成이요                歲歲年年得好事라 여쭙니다.^^(09.07.13 답글)

날로 발전하니 해가되면 이룰 것이요   맞는 해마다 좋은 일만 있으소서!

남방장성배와 관련하여 중국 사이트에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면서 zpzg69님이 올렸습니다.

인위기자지위반 (人爲棋子地爲盤) 사람이 바둑돌이 되고 땅이 바둑판이 된다.

천년봉황쌍웅전 (千年鳳凰雙雄戰) 천년 봉황 두영웅의 시합,

시문수수기파란 (試問誰手起波瀾) 누구의 착점이 파란을 일으킬지 물어본다.

일자낙정천하담 (一子落定天下談) 한수 착점에 세상이 이야기한다.

(2009.07.17. 남방장성배 한시)

흥이 안날 수 없죠. 사실 저 시는 장사 속으로 쓴 것이라 그 품격이 낮다는 것이 불초 소생의 생각입니다. 운도 제대로 안맞고... 여하튼 다음과 같은 답시를 하나 적어 올렸습니다.

자위건상반위곤(子爲乾相盤爲坤) 돌이 둥근 것은 하늘의 모양 판이 평평함은 땅의 모습

선정차수강상전(先定次隨綱常典) 정해진 것을 따르는 것이 삼강오륜의 전범이리.

용봉풍운혼천하(龍鳳風雲混天下) 용봉의 다툼에 온천하가 혼란스러워도

산고수장의구연(山高水長依舊然) 산 높고 물 깊은 것은 옛 모습 그대로.

(2009.07.17 답시)

나작방에 개업신고차 나의 바둑노정기를 싣고 보니 감흥이 일어 어느 고인의 시에 댓구를 달아봤습니다.(09.07.23)

산중수부의무로(山重水復疑無路) 겹겹이 산에(산은 많고) 물 다시 흐르니 길이 끊겼나(없나)?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 버드나무 그늘지고 꽃 피어있는 곳에 마을이 또 있구나

강심산고하세도(江深山高何歲到) 강은 깊고 산은 높으니 어느 세월에 가려나?

거거중성원일촌(去去中省遠一寸) 가고 가는 중에 뒤돌아보니 겨우 한 치 멀어졌네.(답시)

어제 오로광장에 갔더니 <여름뜰>님이 얼굴이란 노래를 올려놓고 심각한 글을 올리셨습니다. 노래를 듣다보니 공연히 옛 생각과 함께 감흥이 일더군요.

얼굴(顔) (09.07.30)

욕화원혜무심안 (欲畵圓兮無心顔) 동그라미 그림이여 무심코 그린 얼굴

현안광야사초로 (玄眼光也似草露) 빛나는 검은 눈동자 풀잎의 이슬이여

운중접비거유몽 (雲中蝶飛去幼夢) 구름 속 나비 날 듯 가버린 어린 꿈

백홍수멸영연노 (白虹隨滅迎然老) 흰 무지개 스러지듯 늙음을 맞누나

격했던 감정도 이렇게 대충 긁적여 놓다 보면 어느 새 가라앉기도 하고, 감정의 순화라고 할까 의식의 명료화라고 할까 여하튼 그런 기분이 듭니다. 제대로 시작을 배워본 바가 없으니 아마도 꽤 엉터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까짓 거 어떻습니까? 이제 어디 가서 따로 배운다는 것도 그렇고...기회가 되면 당시선도 보고, 한국의 시인들이 쓴 것도 슬슬 시간 날 때마다 읽어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