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바둑 路程記(3)-현학기(玄學期)
찬찬(燦燦) 고운(孤雲)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 유서수풍(柳絮隨風) 행운유수(行雲流水)
치지(致知) 인풍(仁風) 화광(和光)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 현묘(玄妙) 구현(鉤玄)
조화(調和) 유현(幽玄) 청일(淸逸) 무심(無心)
----------------------------------------------------------------------------------
사실 이 3편의 제목을 어떻게 정할까 많이 망설였다. 고민 끝에 감히 현학(玄學)으로 하였다. 민중국어사전에는 현학을 이론이 깊고 어려워 깨닫기 어려운 학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우연치 않은 기회에서 자기도피의 도구로 이용되었거나 또 어쩌면 젊은 날의 치기(稚氣)어린 유흥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바둑에 대한 나의 반성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내가 바둑을 통해서 무슨 대단한 도(道라)도 깨우쳤다던가 하는 것은 아니다.
지난 편에 놀이로서의 바둑과 그것을 즐기는 과정에서 유발된 승부에 대한 집념 따위 등을 말했다. 나중에 친구들의 의견이나 나의 놀이상대가 되어준 직장 동료와 부하직원들의 말을 종합하자면 멀쩡하던 애가 내기가 걸린 승부에 임하면 눈빛이 살고 몸에서 묘하게 어떤 투지랄까 자신감 따위 등이 배어나오는 것 같다고들 했다. 바둑이 아닌 당구 따위의 잡기에서도 그랬던 모양이다. 좋게 말해 기세가 좀 있었던 것 같다. 아예 기가 질려 버려서 승부도 하기 전에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 사람도 있었다는 것이다.
좋게 말하자. 근성과 집착과 집중력이 있었던 모양이다. 회사 일도 마찬가지였다. 일에 대한 욕심도 많은 데다가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체질이었다. 점차 일은 많아지고 책임은 막중해져 가고 통솔해야할 직원들도 늘어만 가다보니 회사 일에 치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바쁘다 보니 차츰 바둑을 멀리하게 되었다. 바둑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할 시간과 여유가 없었다. 거기다 93년도에 승응차를 구비하면서 주말에는 애들과 부인을 데리고 자주 여행을 갔었다. 스스로 여행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애들의 정서적인 면을 고려하여 새로운 환경을 많이 접하게 해주려고 노력했다. 처음 일 년은 매주 마다 여행을 다닌 듯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국수주의자다. 철저한 민족주의이기도 하다. 85년도로 기억을 하는데 김정빈씨가 쓴 단(丹)이라는 소설책을 읽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었다. 그 책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얼마나 자랑스러운 조상의 후예인가. 거기에 제시되는 참고서적을 거의 다 구입해서 독파했다. 학교과정을 통해서 배웠던 식민주의적 사관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우리 고대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발전되어 선가(仙家)내지 도가(道家) 및 불교(佛敎) 등에 대해서도 교양차원에서 이것저것 섭렵을 하게 되었다.
한자(漢字)는 중고등학교 때 대충 배웠고 글을 읽다보니 한문을 접할 기회가 많아져서 나름대로 읽어보고 뜻도 새겨 보려고 노력했다. 모르면 당연히 옥편을 찾아가면서 그랬고 특히, 고승들의 선시(禪詩)나 게송은 그 뜻이 은근한 게 음미하기 그만이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를 때가 훨씬 더 많았지만 여하튼 한시가 좋았다. 내친 김에 정비석의 김삿갓 소설을 사서 거기 나오는 한시를 써보면서 음미하려고 노력했다. 두어 번 독파하니까 대충 뜻을 새기게 되었다. 절에 가서도 대웅전 등의 건물에 걸려 있는 주련도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업무에 치이고 시간에 쫒기고 정신적인 여유가 없는 생활이어서 아마도 또 다른 정신세계에 대한 추구라고 할까 현실도피적인 문장과 내용을 통해서 위로받고자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직장과 가정과 독서에 파묻힐 즈음에 고등학교 동창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35세 전후였던 것 같은데 동창들 바둑모임을 하나 결성하자는 것이었다. 바쁜 중에 뭔 모임을 결성하자고 하니까 귀찮은 생각이 든 게 사실이었다. 대체적인 생활이 형식과 격식에 얽매이게 마련인 사람한테는 간혹 풀어진 그것이 활력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모임이라면 정례적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건 저러건 십수년 만에 동창들 얼굴을 본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라 일단 나가기로 했다.
법조계 종사자와 약사, 증권회사 중견간부, 한의사, 바둑교실 원장 등 나를 포함해서 여섯 명이 모였다. 다 호선치수이고 한의사 친구만 2점 아래였다. 만원씩 걷었고 리그전을 벌렸다. 처음에는 리그전을 원칙으로 했는데 시간이 너무 걸려 토너먼트로 바꿨다. 가끔은 서능욱 사범도 초청해 지도대국도 받았다(지도료는 돈 많은 친구가 주로 댔다). 아마고수도 초청했다.
법조계 종사하는 친구와 바둑교실 원장 친구는 중고교 동창이었으므로 대강 학창시절에 어느 정도 바둑실력이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친구들은 고등학교 다닐 때도 바둑을 둘 줄 알았지만(물론 나는 그 친구들이 바둑을 두는지 어떤지 전혀 몰랐고), 대학 때 주로 많이 단련한 모양이었다. 그 모임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제법 실력을 갖춘 친구들이 여러 명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보통 장고바둑들이 아니었다. 한판에 1시간 반에서 두 시간은 보통이었다. 심한 경우는 세 시간 정도까지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아니 젠장 우리가 프로도 아닌데 너무 심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자주 들었지만, 그렇다고 상대가 생각한다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종국이 가까워 오면 이미 몇 집의 차이가 난다는 것을 수없이 반복되는 형세판단과 계가를 통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황당한 일이었다. 아마추어는 부분전에서 전투가 발발되어 거기서부터 전판이 싸움바둑으로 가는 경우가 보통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친구들과 두다 보면 한참 장고를 한 후 아주 쉽게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 그렇다고 부분전 수읽기가 약한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국후 복기를 하면서 의견을 나누다 보면 버리는 것이 더 좋았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소위 전략적 판단에 대해서는 나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것이었다.
전략적이라는 것에 대해 앞선다 운운한 것은 잘못된 말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나는 그런 생각을 거의 안했기 때문이었다. 한바탕 붙어서 대마하나 잡으면 그걸로 바둑은 끝이 아닌가. 지금까지 가졌던 바둑에 대한 생각이었다. 상대하고 일단 붙어서 싸우다 여의치 않아지면 그때 가서 효과적으로 버릴 방법은 없는지 다른 대가를 구할 길은 없는지 바꿔치기할 방법은 없는지 고민하는 이른 바 사후 약방문식으로 대처해왔다는 것이 솔직한 답변이다. 따라서 그 친구들과 바둑을 두게 되면서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된 것이다. 공격하기 전에 이게 진짜 이득이 되는 작전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느닷없이 손 빼고 다른 자리를 가버리면 닭 쫒던 개꼴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점점 타이밍을 찾는 것과 응수타진에 대한 효용이랄까 이런 것들에 대해 느껴지기 시작했다. 형세판단과 계가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공격을 당할 때가 되어도 거의 같은 사고방식이 필요하다는 것도 인식하기 시작했다.
토너먼트 성적은 늘 혼란스러웠다. 누가 딱히 독식하는 것 없이 돌아가면서 우승하는 혼전의 양상이었다. 그런데 나는 은근히 부아가 났다. 고3때 잠시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에서 2년을 까먹는 결과를 초래했건만 이 친구들보다 바둑조차도 월등하게 낫지 못하단 말인가? 꽤나 자존심이 상했다. 다시 바둑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오청원 전집을 샀다. 바둑지도 매달 한권씩 구입하기 시작했다. 정기구독하면 편할 일이었으나 스스로에게 정성을 다하자는 의미로 매달 사기로 결정했다. 보통 총보를 중심으로 기보를 공부했다. 바둑지에서는 해설을 보지 않았다. 한 장짜리 총보를 공부하면서 처음에는 미칠 지경이었다. 초반 이삼십 수야 금방금방 찾겠는데 중반을 넘어가면 한 수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여길까 저길까 바둑판과 기보 사이를 뻔질나게 보아도 못 찾는 경우가 허다했다.
처음에는 기보 한 장 공부하는데 거의 한 시간에서 한 시간 반은 걸린 것 같았다. 다음 한 수 착점을 찾기 위해 부분적인 전투를 나름대로 예상도 해보고 나라면 여기 둘 텐데 도대체 어디 두었을까 기보의 좌측상단 1,1에서 1,19까지 그 다음 2,1에서 2,19까지 이런 식으로 샅샅이 뒤진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미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어느 날인가 대충 한번 집이나 세어보자 하고 목산을 해봤다. 음... 여기 쯤 놓지 않으면 승부가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그 자리를 보니까 여태까지 찾던 착점이 거기 있었다. 잠시 기분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불현듯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아! 이것이었구나. 무언지 모르지만 머리에서 안개처럼 휘감고 있었던 막연함이 확 벗겨지는 것 같았다. 얼치기 3급 시절에 장벽에 가로 막혔던 것이 비로소 열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갑자기 기보공부가 재미있기 시작해진 것이다. 진도가 척척 나갔다. 한 장 놓아보는 시간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바둑의 흐름이라는 것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기사의 숨결이랄까 승부에 임하는 고뇌 같은 것도 느껴졌다(이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얼치기의 착각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은 내가 더욱 모르고 있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아무튼 오청원 기보집 전3권을 다 놓아보았다. 그러면서 맥이나 사활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필요한 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현현기경, 발양론, 관자보, 절묘한 사활, 절묘한 맥, 형세판단 등등을 비롯해 사카다, 후지사와, 다케미야, 섭위평,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 등의 유명 프로기사 선국집도 사들여서 차례차례 놓아보았다. 물론 바둑지에 나오는 총보도 계속 놓아보았다.
그러건 저러건 바둑모임은 다들 바쁘다 보니 한 일 년 조금 넘게까지 지속하다 자연 소멸되었다. 다행이 남은 것은 한의사 친구하고 교분이 더욱 돈독해진 것이다. 불교와 참선에 상당한 조예를 가지고 있는 친구인데 당시 나는 최인호의 「길 없는 길」을 다 읽고 난 후였다. 어느 날 바둑이 끝나고 보니 새벽4시 정도가 되었다. 해장국집에서 해장술과 함께 나누던 담소가 불교 쪽으로 진행되었다. 전공은 이공계였지만 형이상학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던 나로서는 고수를 만난 기분이었고, 바둑에 대해서도 그런 맥락에서 조감하려 했던 계기가 되었다.
모임 멤버 중에서도 바둑 실력은 가장 떨어진 친구였지만, 그의 바둑관과 승부관 그리고 기사들에 대한 기풍관에 이르면 거의 좌중을 압도했다(시쳇말로 구라빨이 좀 센 것인 듯). 한의사라 수입은 그럭저럭했고 어느 때인가 이창호와 서능욱이 천원전(?)인지(기억이 가물가물) 하는 도전기를 인천에서 개최한 적이 있었다. 서능욱 사범과 친분이 있었던 터라 그 후원자로 자청하고 나서서 대국에 사용할 바둑판과 알을 마련했고, 대국이 끝난 후 식사자리에서 이창호한테 깊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좋은 내용의 바둑을 남길 수 있다고 훈수를 한 모양이다. 물론 그 사건 이후 집에서 그 친구 마누라한테 혼쭐이 빠진 것은 불문가지이나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고 쏟아진 물인 것을 어찌하리요. 상처뿐인 영광의 바둑판과 알만 거실에 뎅그러니 놓여있던 그 광경이란. 그 친구와 간간히 소주잔을 기울이며 인생과 종교와 바둑에 관해 참으로 많은 담소를 나누었다. 지금도 그 친구는 창호가 성적을 낸 것이 자기가 훈수해준 덕이라고 늘 자랑이다. 물론 우스갯소리지만.
그러건 저러건 직장 일은 갈수록 많아지고 야간에는 대학원에 다니며 공부도 해야 했고, 급기야 지방에 약 8개월간 장기출장을 다녀오기도 하는 등 개인적인 시간을 내기는 더 더욱 힘이 들었다. 틈틈이 바둑책을 보는 것 외에는 따로 대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시간이 너무 없었다. 그러다 IMF 사태가 밀려왔다. 보증 건으로 엮기면서 나에게도 타격이 왔다. 이렇게 저렇게 해결책을 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하면서 내린 결론은 사업을 해야만 타개해 나갈 것이라고 믿었다(지난 일이지만 수읽기가 영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러니 바둑에 신경 쓸 여가가 전혀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2002년도에 사업체를 설립하고 정상적인 운영 상태까지 만들어 놓으니까 비로소 시간도 정신적인 여유도 생기기 시작했다. 동네 기원에 다시 나갈 틈이 생긴 것이다.
나가다 보니 지역내 기우회를 하나 결성한다고 입회하란다. 그래서 ○○기우회에 가입했는데 1군, 2군, 3군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1군은 1급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2군으로 간다고 했더니 그냥 1군으로 하라고들 한다. 약간 떨어지지만 그런대로 버틸 만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인천을 대표하는 ○○○기우회와 정기적인 교류전도 가졌었다(이것도 대충 가다가 흐지부지해졌다. 바둑 두는 사람들이 하는 사회적 모임치고 제대로 끝을 보는 경우는 거의 못봤다.). 거기에 가보니 어릴 때 우러러 보던 1급들의 일부 면면이 포진해 있었다. 전승은 꿈에도 못 꾸어볼 일이고 전패나 면하면 다행이려니 생각했는데 그럭저럭 반타작 정도는 올렸다. 비록 동네 내지는 지역의 1급들이었지만 그들과의 대국을 통해 그 동안 책으로만 봐왔던 것들을 실전에 적용해보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나에게는 늘 판수가 부족한 것이 결정적인 흠인 것이다. 따라서 바둑을 두면 자연 시간이 많이 걸린다. 판수 많은 사람들이야 척척이지만 나는 이것저것 생각을 해야 비로소 찾아내고 착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기건 지건 바둑이 끝나면 복기를 하고 의견을 교환한다. 의심나는 부분은 집에서 책을 찾아보았다. 그런 과정을 통해가면서 과거에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면서 넘어갔던 것들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욕심은 나는데 해야 할 과제는 산더미처럼 느껴졌다. 그때 바둑지에 육형제바둑에서 비자바둑판을 보급형으로 제작해서 판매한다는 광고가 실렸다. 본인의 마음을 다잡자 라는 의미로 바둑판과 알을 한 조 구비했다. 그게 비자인지 뭔지는 잘 모른다. 색상은 좋은데 돌 놓는 소리가 균일하지는 않았다(당시 거의 백오십만 원 정도로 나로서는 큰 결심이었다). 그러나 보기에는 폼이 났다. 거실 중앙 옆쪽에 떡하니 비치해놓고 바로 옆 책장에는 애독서와 함께 바둑책이 빼곡하게 꽂혀있다. 그 분위기만으로도 흐뭇해지는 것은 바둑에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헤아리리요. 이른 새벽에 오청원 기보 한 장 놓아보는 그 그윽함은 밝아오는 새벽의 여명처럼 그렇게 가슴을 서서히 물들여오는 것이다. 아침 밥 준비하러 눈비비고 나오는 마나님 왈 「인물 하나 나겠소! 그 정성으로 돈이나 더 벌 생각을 해보시지」. 바가지 소리는 차향(茶香)으로 날려 보낸다.
그렇게 하다 2006년도 사업을 접었다. 구구한 사연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만은 한 동안의 혼란과 술로 보낸 시간을 털고 작년부터 다시 오로에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머리는 물 빠진 스펀치 같이 멍하다. 프로기사 대국을 주로 보지만 내용보다는 대창 농담에 눈이 더 간다. 옆에 있는 기력사활도 하루 몇 문제씩 풀어보겠다고 하지만 어떤 때는 단 한수도 생각이 안 난다. 그러면서 이렇게 오로광장에서 나작방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다.
나는 3급인가? 아니다. 3급을 놓기에는 너무 짜단다. 그렇다면 1급인가? 아니다. 아직 그 정도는 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품었던 1급에 대한 경외감과 트라우마(외상장애후 스트레스)로 인하여 언감생심 1급이라고 감히 말하지 못한다. 어쩌다 처음 보는 기원에 들어가면 얼마나 두냐고 묻는다. “그냥 뭐....대강 둡니다.” 말꼬리를 흐린다. 지금도 바둑이 늘고 싶다. 그런데 노안이 와서 바둑 책도 읽기가 귀찮아진다. 아직은 바둑판을 돋보기 끼고 내려다보고 싶지는 않다. 돋보기를 끼고 책과 바둑판을 번갈아가며 본다는 것이 여간 고역이 아니다. 기원을 나가도 바둑 두기가 귀찮다. 내기 바둑은 더 더욱 싫다. 남의 주머니에 있는 돈 만원이 탐이나 덤비는 모습으로 비추어질까 싫다. 여름철 쇠똥 주변을 맴도는 똥파리와 같이 여겨지지는 않을까 저어되는 것도 있다. 그러니 자연 관전이 주종을 이룬다. 구경 판 승부가 끝나면 관전평과 함께 어우러지는 뒷풀이 재미가 쏠쏠하다. 현현기경 서문이라든가 오청원 회고록이라든가 이런 글에 자꾸 눈이 간다. 실력이 약하니 그러는 것일 게다. 그러다 보니 노장이나 선가의 글과 바둑을 연관시켜 생각하는 쓸데없는 습관도 생기는 것 같다. 더 많은 회원으로 다시 결성된 고교동창 바둑모임의 친구들 연락이 오면 기꺼운 마음으로 달려 나가 바둑 한수 술 한 잔이다. 이러니 바둑을 스포츠로 보는 것에는 체질적으로 알레르기 반응이 나온다. 아마도 나는 이래서 바둑을 자꾸 예도(藝道)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모양이다.
이로써 나의 바둑에 대한 노정기를 맺으려 한다. 지나간 세월을 거친 필치로나마 흔적을 남기게 되었으니 감흥이 없을 수 없다. 이에 옛사람의 시 한수를 읊는다.
산중수부의무로(山重水復疑無路) 산은 많고 물 다시 흐르니 길이 없나?
유암화명우일촌(柳暗花明又一村) 버드나무 그늘지고 꽃 피어 있는 곳에 마을이 또 있구나.
비록 글은 얕으나 감히 댓구(對句) 하나 올린다.
강심산고하세도(江深山高何歲到) 강은 깊고 산은 높으니 어느 세월에 가려나?
거거중성원일촌(去去中省遠一寸) 가고 가는 중에 뒤돌아보니 겨우 한 치 멀어졌네.
나의 바둑 노정기 끝.
※ 참고 : 앞의 서두에 실린 문장들은 유명 프로기사가 즐겨 쓰는 휘호문구라고 한다. 부연인줄 아나 감히 뜻을 푼다. (중복되는 기사도 많다. 나름대로 배열의 순서에 의미를 두었다. 어떻게 무엇을 느끼는가는 읽는 자의 몫으로 넘긴다)
찬찬(燦燦) : 빛나고 빛난다 - 사카다
고운(孤雲) : 홀로 떠 있는 외로운 구름 - 조치훈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 :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 - 다까가와
유서수풍(柳絮隨風) :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따라 흔들린다 - 조치훈
행운유수(行雲流水) : 떠도는 구름과 흐르는 물 - 후지사와 슈코
치지(致知) : 앎에 이르다(격물치지에서 따온 말) - 임해봉
인풍(仁風) : 부드러운 바람 - 오오다께
화광(和光) : 부드러운 빛 - 가또오 마사오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 : 어두운데서 날로 밝아진다(출처 예기) - 오청원
현묘(玄妙) : 그윽하고 묘하다 - 고바야시
구현(鉤玄) : 그윽함을 낚다 - 김인
조화(調和) : 잘 어울림 - 오청원
유현(幽玄) : 깊고 그윽함 (기도유현) - 조치훈
청일(淸逸) : 맑고 한가하게 - 이시다
무심(無心) : 텅 빈 마음 - 임해봉
※ 이로써 나의 바둑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나작방 개점 기념으로 신고식 삼아 올렸다. 대강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들로만 구성해서 썼다. 34년 세월에 하고픈 이야기가 이것뿐이겠는가?
아직 나작방에서 어떻게 글을 써야 되겠다하는 것이 확실하게 잡히지 않다. 나름대로 대강 계획은 잡혀있지만 생각을 정리하려면 관련된 서적도 좀 뒤적이고 이것저것 정리할 게 많을 듯하다. 그래서 그 시간을 벌고자 틈틈이 본 노정기에 대한 에필로그적인 성격의 글을 써 볼 계획이다. 또 하나의 계획은 성격상 나작방이어야 할지 혹은 나도 명강사 코너여야 할지 애매하지만, 이광구씨가 쓴 「조훈현과의 대화」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소재로 쓰인 바둑을 다 놓아보지 못했다. 나 스스로 공부도 할 겸 조국수가 보는 포인트를 여러 기우분들과 나누고 싶다. 걱정은 그게 저작권에 걸리느냐 여부인데 세상 일이라는게 생각대로만 되던가. 가다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 무작정 그리 해볼 생각이다.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성원을 부탁한다.
.gif){kind=logo}
작가의 말
약속다방
팔공선달
이끼그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