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바둑 路程記(2)-여흥기(餘興期)

바둑이 별 것이더냐! 즐기고 놀면 그걸로 족하지. 바둑도 재미있지만, 영주집에서 참치구이 시켜놓고 막걸리에 풀어지는 인생이야기가 더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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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편에서는 처음 입문할 때부터 바둑이 진일보한 시기까지 대강 정리했다. 바둑돌을 10여 년간 잡지 않은 것도 말했다. 첫 직장이 경제기획원 이었다. 그 직장 바둑대회에서 3위 입상한 것까지 말했다. 그 이후 이야기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중간에 약 6개월간의 백수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공직을 그만두고 여차저차하다가 1987년 12월부터 1988년 6월 15일까지 약 6개월을 쉰 적이 있었다. 할 일도 없고 새파란 청춘이 집에 있는 것도 남들 보기 우스워서 아침 먹자마자 집을 나왔다. 당시 하인천이라는 곳에서 기거했는데 자유공원을 넘어서 가면 동인천이었다. 공원 산책을 하면서 운동도 하고 대강 시간 때우다 10시 반 정도면 기원에 도착했다.

기원이름은 「청마기원」이었다. 원장 얼굴을 보니 어랍쇼! 고등학교 4년 선배였다. 고3때 같은 반했던 친구의 형이기도 했다. 기원 이름이야 유치환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지만 기원 분위기는 그 이름과는 거리가 먼 한마디로 치졸하고 음습한 것이었다.

어릴 적 기원에 발을 끊은 것이 1977년 4월이었는데 1987년 12월이니 거의 10여년 만에 기원에 다시 간 것이었다. 어릴 때라 잘 몰랐던 탓도 있지만 그 당시 기원에 나오는 사람들은 다 신선 같이 고매한 사람들인 줄 알고 있었다. 그 기억은 다시 기원을 나가게 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기원에서 죽돌이 생활을 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른 바 양아치 같은 사람에 인간 말종까지 별별 사람이 다 꼬이는 곳이 기원이었던 것이었다.

근 십여 년 넘게 있다가 다시 바둑을 두려니 모든 게 낯설고 서툴렀다. 바둑 급수야 이미 선배가 원장으로 있으니 속일 수도 없고 속일 생각도 없었으니 3급 그대로였다. 문제는 부분적인 수읽기가 옛날만큼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건 저러건 바둑도 내기가 아니면 성사가 안 되었다. 내기 바둑이라고는 두어본 적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꼬리를 내릴 수도 없는 노릇아닌가! 담배내기부터 시작해서 커피내기, 기료내기까지 가면 그 다음은 당연히 돈내기로 들어간다. 방내기를 비롯해 판내기 또 걸이내기라는 것도 있다. 정하기 나름이나 보통 1집~30집까지 한 걸이, 31집~60집까지 두 걸이, 61집이상이면 세 걸이 이렇게 나누어 오천 원, 만원, 만 오천 원 이런 식으로 돈을 걸고 둔다. 때에 따라서는 20집, 40집으로 구분해서 하는 경우도 있다. 둘이 일대일 지속적으로 두는 것을 「맞대미」라고 하고, 여러 명이 리그전을 벌리는 경우도 있지만 현금회전율이 낮기 때문에 토너먼트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명이서 하는 토너먼트를 그쪽 용어로 「삐뚤이」라고 한다. 한명이 부전승을 뽑으면 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면서 개인전을 겸하는 경우도 있다. 판내기든 방내기든 걸이내기든 겸하면서 하면 더욱 박진감 넘치는 게임이 되는 것이다.

또 한편 구석에서는 포카 판 아니면 마작 판 등 도박이 진행된다. 1편에서 말했지만 나는 도박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었다. 아니 흥미가 없다 라기 보다는 의식적으로 멀리했다. 한번 빠지면 끝장을 볼 때까지는 손에서 놓지 않는 습성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흥미를 갖지 않을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사실은 지금도 고스톱을 잘 못친다. 훌라도 명절 때 조카아이들과 어울리면서 배웠다. 포카도 약을 제대로 몰라 족보를 종이에다 써놓고 옆에다 두고 보면서 한다. 어릴 때도 기원에서 이런 류의 도박은 진행이 되었지만 별반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서른 살 무렵이었으니 대강은 그 돌아가는 분위기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기원에 있다 보면 커피내기를 자주 하는 까닭에 기원 손님은 일단 우대를 받는다. 주변 술집도 마찬가지다. 기원 손님이라면 일단 허리부터 굽히고 본다. 꾀죄죄하게 다녀도 늘 담배와 커피와 술은 풍성했으니 말이다. 어느 날인가 커피를 시키고 바둑을 두다 보니 배달 나온 아가씨가 안 보이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은 생각에 도박을 위해 만들어놓은 밀실 문을 열어보니 기원 죽돌이하고 한참 육체의 향연을 벌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아사리(?)판인가 싶어서 문을 닫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측면도 있었다. 가정도 내팽개치고 기원에서 죽을 치니 여체가 그립지 않다면 비정상이었으리라.

그나저나 바둑은 말이 아니었다. 원래는 공격적 기풍이었는데 부분전 수읽기가 맘대로 되지 않으니 자연히 실리바둑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면 상대방이 세력을 쌓게 되고 거기 들어가서 허우적거리며 살게 되는 게 일반적 패턴이었다. 이기면 몇 집 지면 왕창. 이러니 수지타산이 맞겠는가. 더구나 백수니 주머니가 얇았다. 필사적으로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는 별반 대책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 정도 지나다 보니 서서히 예전에 두던 감각이 돌아오기 시작하는 듯했다. 그럭저럭 담배 값이며 점심 값이며 저녁 때 소주 값 등 대충 하루를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기본적인 경비는 기원에서 조달되기 시작했다. 접바둑도 예전의 순진한 바둑에서 음험한 바둑으로 서서히 바뀌어 가고 있었다. 꼼수는 절대 쓰지 않지만 곳곳에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바둑을 두게 된 것이었다.

꼼수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마디 안할 수 없다. 나는 바둑을 두면서 최대한 꼼수는 두지 않으려고 한다. 어릴 때 어느 어른을 9점 접고 둘 때였다. 이겨야겠다는 생각에 되도 않는 수를 몽땅 동원해서 여기 저기 응수를 던지며 질퍽거렸다. 옆에서 관전하던 1년 선배 형이 바둑이 끝난 후 나를 조용한 곳에서 보자고 한다. 갔더니 너 접바둑을 두면 바둑이 늘겠냐 줄겠냐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당연히 줄죠 라고 대답했더니 그게 아니라면서 바둑 두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단단히 꾸중을 들었다. 최선을 다해 정수로 두어서도 졌다면 그것을 인정해야지 별다른 방법이 있겠냐는 것이 요체였다. 요행을 바라고 둔다면 차라리 야바위를 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말도 곁들였다. 그 형은 후일 「주간361」인가 하는 신문을 사업으로 하다 쫄딱 망해서 호주로 피신을 했고 지금은 캐나다에 정착하고 있다. 거기서 깊이 깨달은 바가 있었다. 접바둑을 두어도 바둑이 늘 수 있다는 말을 인정하게 된 계기였다.

그나저나 자꾸 접바둑 이야기가 나오게 되어서 좀 그렇지만 기원에서는 맞상대가 그리 흔하지 않았다. 제일 만만한 급수가 5~6급이다. 물론 그 이하도 많다. 기원에서 잔뼈 꽤나 굵은 하수들은 여간해서 걸려들지 않는다. 치수도 짜게 놓는다. 소위 눈치가 「빠꼼이」인 것이다. 이런 하수들을 엮을려니 자연히 판을 넓게 짜지 않으면 안 되게 되는 것이다. 기왕 한 수를 던지더라도 변화수가 많은 착수를 선택한다. 가급적이면 까칠한 수를 찾아내어 응수를 묻는다. 적절한 타이밍도 중요하다. 어설프게 응수를 물었다가는 판이 그대로 굳어버릴 염려도 있다. 될 수 있으면 모양을 결정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모양을 결정해 버리면 나중에 아무런 수를 낼 수 없다.

일화 한 토막. 기원 단골 중에 아주 잘 생긴 청년이 있었다. 나이는 나보다 두어 살 적은 듯했다. 바둑 실력이 5급은 짱짱하고 3급은 좀 그런 친구였다. 판내기를 주로 두었는데 한판에 만 원짜리를 했다. 그 당시 만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바둑이 짱짱하니 그 친구도 기원 죽돌이들의 기피상대 일호 중 하나였다. 자연히 내가 나설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는데 선을 접고 승률은 70%를 웃돌았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나의 도시락이자 은행창고였던 셈이었다. 그 친구 주특기는 외목의 대사정석이었다. 어느 날이던가 깜빡하는 바람에 판을 아주 못쓰게 만든 일이 있었다. 외목 대사는 잘못되면 안에서 죽고 바깥이 철벽이 되는 특성이 있다. 대개는 초장에 정석이 진행된다. 이거 참 난감한 노릇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저냥 두는데 눈치를 보니 이 친구가 유리하다고 슬슬 물러나는 게 아닌가! 콧노래를 불러가면서. 웬만하면 빨리 던지라는 투였다. 악착같이 달겨들었다. 대충대충 두어준다. 속으로 열심히 계가를 하고 응수를 던지고 이런 일이 몇 차례 진행되어 계가에 들어갔다. 나는 내가 이긴 것을 알고 있었다. 종국이 되어 계가를 마쳤더니 백이 한집 이겨있는 게 아닌가? 이 친구의 콧노래가 뚝 그쳤다. 바둑통을 들고 주변에 떨어진 사석이 있나 이리저리 살펴보는 것이었다. 선작 오십가자 필패라는 격언이 있지 않는가! 경적필패.

그런데 그 친구는 바둑 두다 돈이 떨어지면 은행에 돈을 찾으러 간다면서 나가서 두어 시간 후에 들어온다. 지갑을 보면 지폐가 수북하다. 그의 직업이나 이름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부터 소식이 뚝 끊겼다. 궁금하지만 알 도리가 없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갔다. 며칠 지난 후에 원장님으로부터 그가 감금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죄명은 노상강도였다. 그러니까 그의 은행은 지나가던 순진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화 두 번째 토막. 어느 날인가 50이 넘어 뵈는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 3급 둔다는데 바둑 둘 사람 없냐는 것이다. 선수로 뛰게 되었는데 한방에 담배 한 값 정도의 금액을 걸고 두었다. 그런데 바둑이 희한한 것이다. 분명히 유리했는데 종반전에 다다르면 어느새 져 있는 것이다. 시간이 대충 지나서 주머니를 보니 다 털렸다. 할 수없이 원장님과 교대했다. 서너 판인가 두더니 그만 두고 간단다. 나중에 원장님이 하는 이야기. 야! 우리가 두 점 놓을 바둑인데 그 바둑을 호선으로 두었으니 승부가 되냐? 이 바보 같은 놈아. 여태 바둑 볼 줄도 모르는 놈 같으니라구.

그렇게 저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나에게도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눈빛은 예리하게 빛이 나고 심성은 거칠어져 가기 시작했다. 바둑도 승부이기 때문에 승부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체취가 내게도 이식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구를 쳐도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공을 주지 않는다. 기필코 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뭉쳐지는 것이었다. 또 바둑도 그냥 두는 법이 없다. 돈이 걸리지 않으면 둘 생각을 안 한다. 어느 날인가 집사람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이 좀 이상해졌다고. 어떻게 이상하냐고 했더니 무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불쾌한 냄새가 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반발심 같은 것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 같은 인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그쪽 용어로 「마귀」가 되어가는 것이었다. 집사람은 사람 버리겠다고 기원 그만 나가고 어디 직장이라도 좀 잡아보라고 한다.

충격적인 말이었지만 별 방법이 없었다. 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느 날 집사람이 신문 스크랩한 것을 코앞에 내민다. ○○그룹 경력사원 모집광고였다. 그러나 소마귀 짓의 잔재미에 빠져 있던 터라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날인가 집사람이 난리가 났다. 원서마감시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무것도 준비 안 해놨다고 펄펄 뛴다. 이력서 한 장 써놓았더니 졸업증명서에 성적증명서와 경력증명서까지 죄다 집사람이 준비해서 서울로 당장 올라가자고 성화였다. 고삐 꿴 송아지마냥 집사람 손에 이끌리어 마감 날 서울 본사로 올라가 직접 제출했다. 그럭저럭 시일이 지나니 합격통보가 왔고 그렇게 해서 88년 6월 16일자로 나의 새로운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직장에 적응하느라 처음 두어 달은 거의 정신없이 갔다. 웬만큼 적응이 되었다 싶자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은 다시 기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청마기원은 문을 닫아서 다른 기원을 나갔다. 대체적으로 기원 죽돌이들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러니까 호구만 보면 벌떼같이 덤벼든다. 나도 한 때 그랬었으니까 그 심정이 이해갔다. 토요일은 바둑 두고 저녁이면 삼치골목에 가서 막걸리와 소주로 하루의 승부를 달랬다. 대체적으로는 기원에서 딴 돈으로 일차를 먹고 이차도 내가 내는 것이다. 그 친구들이 불쌍하게 여겨졌고, 그나마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좀 있게 되었고 또 돈을 쓰기 좋아하는 성향인 탓도 있었다. 자연히 주변에는 사람들이 꼬였다. 꼬이는 사람이 많을수록 호구의 주머니 털이도 성업해야했다. 자주 가던 집이 삼치구이가 유명한 영주집이었다. 그 집 뿐만 아니라 동인천이고 신포동이고 술집을 헤집고 다니며 그렇게 휴일을 보내는 것이 주말의 재충전(?)이었다.

조훈현 국수가 응씨배 우승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창호가 새롭게 등장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바둑 자체에 대한 생각이 바뀐 것이다. 하나의 오락거리 내지는 시간 때우는 소일거리로 전락된 것이다. 또 술 마시는 핑계를 잡는 훌륭한 도구였다. 기원을 나가는 것 자체가 술친구를 찾으러 가는 것이었다.

직장에서도 나보다 바둑 잘 두는 사람이 없었다. 말 그대로 직장의 국수였다. 중견간부로 입사했기 때문에 사원들이 주로 농락거리의 대상이었다. 처음 두니 맞두자고 하고, 지면 9점을 깔아야 한다고 전제를 붙인다. 첫판 두고 나면 9점을 깔라고 주문한다. 그러면 사람들 반응이 세상에 9점을 까는 바둑이 있나 9점이면 집을 팔아서라도 내기를 하겠다고 큰소리를 뻥뻥 친다. 앞판 내기에서 약속하지 않았느냐 지는 놈이 깔기로, 이거 술내기다. 그렇게 해서 바둑이 진행되면 바둑판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어 흑의 시체가 판에 즐비해진다. 그냥은 안 두었다. 술내기를 안 하면 물먹기 내기를 한다. 주로 점심시간에 하는 물먹기란 지는 사람이 한방에 한 컵씩 물을 마셔야 되는 것이다. 만방이면 열 잔인데 앉은 자리에서 물 열 잔을 어떻게 마시나? 보통은 3잔에서 나가 떨어진다. 소문이 나기 시작하니까 떼로 덤벼든다. 여러 사람을 상대하려니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그 실력에 프로 흉내 낸다고 다면기로 해치웠다. 2명 3명 앉혀놓고 바둑을 두니 그들 눈에는 바둑귀신 같이 보였으리라. 나는 다만 재미있게 놀기 위한 것이었는데...!  단 직장에서 돈내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음을 고백한다.

장기는 잘 못 두는데, 기원에서 어깨 넘어 봐둔 게 있었다. 오졸을 접어준다, 양사를 떼어준다, 상대가 장군을 한번이라도 부르면 지는 것으로 하자, 장군에 궁이 움직이면 지는 것으로 하자 등등 별별 희한한 룰을 만들어서 놀았다. 당구장에서도 120점 이하는 가급적 한손으로 상대했다(당구는 오른손이 300점, 왼손이 150점, 한손으로 120점 놓는다). 서울은 당구도 약하니까 충분히 통했다. 한손으로 당구를 친다고 하면 대부분 농담으로 받아드린다. 술내기를 걸고 치자고 하면 반신반의 하면서 덤빈다. 도대체가 한손으로 당구가 되냐 말도 안 된다고 투덜대면서 두고 보라는 식이다. 웬 걸. 한 손으로 가이시(모아치기)는 기본이고 가락(요새 말로 빈쿠션)이 돌지를 않나 큐를 어깨에 걸치고 맛세이를 찍질 않나 옆에서 구경꾼들이 난리가 난다. 지는 사람은 황당한 얼굴이 된다. 고백하건대 한손 당구로 술을 산 기억이 거의 없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6개월간의 기원생활이 승부에 대한 집중력을 높인 것 같았다.

그러면서 과거 고3때 같이 바둑에 빠졌던 악몽 같은 친구들도 한 달에 두어 번씩 만났다. 다들 직장을 다니니 서로 간에 어울릴 시간이 많지 않았다. 회현동 근처에서 뭉쳐 바둑 한 판씩 두고 술 한 잔하러 회현동 일대를 이 잡듯 뒤지거나 서울역 앞 양동으로 빠지거나 영등포로 진출하기도 했고 마포 일대에 아지트를 만들기도 했다(그 친구들 중 하나는 지금 어느 기업의 임원으로 서예가 일품이고, 또 한 친구는 모 국립대학 전산실장으로 재직 중이며 당구가 500점이다). 당시는 다 정염의 불꽃이 마치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과 같았던 그런 연배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술과 계집과 바둑을 비롯한 온갖 잡기로 30대 초반을 보냈다. 바둑책도 일체 보지 않았다. 바둑 따위로 고민하지도 않았다. 그저 바둑은 나에게 있어 잘 놀 수 있는 하나의 잡기밖에 안되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