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바둑 路程記(1)-입문기(入門期)

아무래도 바둑사이트이니 자신의 바둑에 대한 과거를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약 3편 정도 계획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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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면 고교시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중학교를 졸업한 것이 74년도다. 당시 박통의 아들 박지만이 나와 같은 58년 무술생 개띠다. 중학교 평준화와 고교 평준화가 정책적으로 진행되던 시대였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모르는데 일설에는 지만이가 꼴통이라 거기에 맞추느라고 교육정책이 바뀌어 가는 것이라는 풍문이 돌았고 우리 또한 그렇게 믿었다. 중학교는 2년 전부터 평준화가 시행되었고, 고등학교는 1년 전에 서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인천을 비롯해서 주요 도시에서 고교진학은 우리가 마지막 입시 세대였다. 인천의 J고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입학 후에 안 일이지만 입학성적이 상위 10% 이내였다. 용케 시험을 잘 치룬 모양이었다. 서울이 무시험 전형이었으므로, 수도권에서는 유일하게 입시를 통해 진학하게 되는 학교라 서울을 비롯해서 경기도뿐만 아니고 전국적으로 꽤나 우수하다는 학생들은 죄다 모여들었다(그래서 특이하게도 우리 동기는 팔도출신이 다 있다). 재수생 삼수생까지 포함해서 엄청난 경쟁률이었고 그만큼 동기들은 실력도 있었다. 우리 동기가 졸업하는 당해에만 S대를 130여명 넘게 들어갔고, 재수 삼수한 녀석들까지 포함하면 얼추 150명은 족히 넘게 입학한 것이다. 입학성적만 제대로 유지했더라도 S대 정도는 무난히 들어갔을 터인데 졸업할 때는 거의 바닥권 성적이었으니 그놈의 바둑이 문제였던 것이었다.

고교입시 시험을 치고 나서 대략 두어 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던 것 같다. 집안은 가난했지만 부모님한테 졸라서 영어「삼위일체」과목을 학원에다 신청하고, 오전에는 영어공부, 오후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친구 녀석 집에 갔더니 바둑판을 놓고서는 바둑 둘 줄 아느냐고 묻는다. 모른다고 했더니 단수부터 가르쳐주었다. 그러고 9점을 깔고 두라는데 흑 돌들이 죄 죽어나가는 것이 환장할 지경이었다. 당시는 남한테 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던, 아니 인정할 수 없었던 팔팔한 나이였으니....!

열이 후끈 받아서 매일 덤벼들었고 3일 만에 호선이 되었다. 17급이나 될 실력이었을까? 그게 바둑 입문이었다. 그냥 저냥 어쩌다 가뭄에 콩 나듯이 바둑 한판 두는 정도로 그렇게 평탄하게 시간이 흘러갔다. 대체적으로는 학교 분위기는 모범생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면학을 장려하는 터라 나 역시 학교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 가고, 친구들끼리 모이면 실존철학이니 염세주의니 헤르만 헤세가 어쩌니 개똥철학에 문학에 되도 안 되는 소리로 서로 떠들어 댔다. 여학생에게 대한 관심과 이야기도 요새 말로 쪽(?)팔리게 여기는 게 대세였다. 기껏 일탈이라고 해야 교회에 가서 탁구 치면서 여학생 얼굴을 흘낏 거린다거나 선배 때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웃 여고 학생들과 서클(요새 말로 동아리)에 참가하는 정도라고나 할까. 단체관람을 빼고는 그 흔한 극장 한번 단독적으로 가본 적이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니 바둑 같은 것은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고1 9월 달에 한 여학생(지금의 집사람)을 알게 되어 사랑의 열병에 빠졌었고, 고2때는 담임과 뜻이 맞지 않아 반항하는 의미로 학업을 게을리 했었다.

그러다 1년 선배의 대학입시가 끝났다. 정신이 번쩍 났다. 2년 대충 놀고 지냈는데 일년만 죽은 듯이 공부하자. 그러면 어느 대학인들 못가겠는가. 굳게 결심하고 학교도서관을 나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도서관에는 고3만 사용할 수 있는 열람실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고3만의 특권이라는 학교 전통이었는데, 선배들 입시가 끝나는 날부터는 2학년 차지가 되는 것이다. 그 열람실의 어느 자리에서 공부한 선배는 서울대를 갔다고 하더라, 누구는 어느 대 수석 합격했다더라 뭐 이런 신화적인 이야기가 전해져 오니 선호하는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일찍 나오는 사람에게 당연히 우선권이 주어지므로 새벽 3시 반에 도시락 3개를 싸서 가방에 뭉개어 집을 나서고 밤 11시 정도에 도서관에서 나왔다. 당시는 통금이 있던 시절이었으니 4시가 되어야 통금 해제인데, 인천에서는 J고 학생들이 새벽에 학교 가다가 순경을 만나면 단속받는 게 아니라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를 받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렇게 76년 1월말부터 4월 달까지 거의 3개월 넘어 100일 가까이를 미친 듯이 공부했다. 단짝 3명(이중에 한명은 바둑을 처음 가르쳐준 사부)이 새벽같이 나와서 서로 자리 잡아주며 열심히 공부하던 5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야! 그동안 우리 너무 열심히 공부 한 거 아니냐? ”  “오늘은 좀 놀자.” 이렇게 셋이서 의기투합하여 학교 근처의 자유공원을 좀 배회하다가 오랜만에 바둑이나 한판 두자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렇게 해서 번화가인 동인천 쪽에 가보니「인천기원」이라고 있었다. 난생 처음 기원이라는 데를 갔다. 셋이서 번갈아 가며 실컷 바둑을 두고 나가려는데 원장님(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인천 아마 바둑계의 대부였음)이 기료를 안 받는 것이었다. 당신 말씀이 고교 10년 선배라는 것이다. 후배들한테는 기료를 받을 수 없으니 공부하다 지치면 언제든지 바둑 두러 오라는 것이었다.

다음날 방과 후 도서관에 집결한 우리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눈이 마주쳤다. “가자!” 가방은 도서관에 둔 채 기원으로 달려갔다. 서로에게 질 수 없다는 호승심과 무엇보다도 바둑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공부에 지치니까 다른 열중거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대략 밤 10시 반 정도에 기원에서 나와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가방을 가지러 가는 것이다. 공부에 대한 미련이랄까 최소한의 양심이랄까 그런 것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새벽같이 집을 나서는 것은 여일했다. 그러나 저녁시간에는 기원으로 직행하면서 그렇게 바둑에 빠져 들었다.

그럭저럭 삼사일 기원을 다니면서 보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셋이서만 두다가 다른 사람하고도 두어보고 싶어진 것이다. 원장님한테 우리가 몇 급이나 되냐고 물었더니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하는 말이 “야 임마. 니들이 급이 어딨어? 10급도 안 되는 놈들이. 하하하” 우리 셋은 순간 얼굴이 발개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는 한 머리씩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정도 밖에 안 되다니....! 다들 열이 후끈 받은 상태로 어떻게 하면 바둑이 늘 수 있냐고 선배 원장님에게 물었다. 책을 봐야한다며 옆의 책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비로소 바둑책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둑 잡지도 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둑 책을 하나씩 집어 들었다. 교과서나 참고서와는 또 다른 새로운 별천지가 펼쳐지는 것이었다.

그럭저럭 8월 달 여름 방학이 끝나가는 무렵이었다. 바둑 실력은 5~6급 정도쯤이나 될까 할 때였다. 어머니하고 대학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머니 말씀이 “네가 대학을 가도 걱정이구나. 지금 집안 형편에.....!” 순간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갔다. “엄마. 걱정하지 말아요. 나 대학 안 갈 테니깐.” 바둑에 미쳐있을 때이니 어머니의 그 말씀은 공부를 안 해도 괜찮다는 면죄부처럼 반갑게 들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애들한테 선언했다. “야. 나 대학 안 간다. 바둑에 미쳤으니 그냥 바둑이나 두련다.” 친구 녀석들은 다들 걱정이었다. 그렇다고 대학을 포기하나, 그러지 말고 같이 공부하자, 대학 들어간 후에 바둑 두어도 되지 않느냐 등등. 그렇게 이야기 하던 중 그럼 뭐냐 되려고 그러느냐 바둑 두면 밥은 먹고 사느냐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어깃장 투로 “프로기사가 되면 되지.” 그랬더니 입단하기가 사법고시보다 어렵다는데 더군다나 이제 바둑공부해서 어느 천년에 입단을 한다는 말인가 니 지금 바둑실력에 니 머리로 가능하냐 하며 극구 만류한다. 그런 말을 들으니 공연히 오기가 더 치솟았다. “야! 더 이상 아무 말 마. 나 결정했어.”

여름방학이 끝나고 9월에 개학하면서 친구들은 기원에 나오지 않았다. 11월 초면 예비고사가 시행되니 준비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걔네들도 정신 차릴 때가 된 것이다. 나는 선언한 바가 있으니 도서관도 가지 않고 학교 끝나기 무섭게 기원으로 달려갔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기보를 놔보고 어른들하고 대국을 했다. 바둑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물론 대학을 안 간다고 선언했지만 아버님은 예비고사라도 꼭 보라고 성화를 하셔서 시험을 쳤다. 대략 서울에 있는 중위권 정도는 무난하게 갈 정도로 성적은 나왔다. 그러건 저러건 나한테는 다 관심 밖의 일이었다. 예비고사가 끝난 후에는 담임한테 말하고 정규수업만 듣고 자율학습시간에는 하교해서 곧바로 기원으로 갔다.

예비고사가 끝난 후 셋이 모여서 모처럼 바둑을 두었다.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다. 한 친구는 3점에 또 한 친구(최초 바둑 사부)는 5점에도 바둑이 안 되는 것이 아닌가!  8월 말까지 맞두던 친구들이었는데... 나 자신도 믿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마의 3급 벽을 넘은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보통 바둑을 배워가는 과정을 보면 아마 정상급까지 가는데 2번 정도의 고비가 있다고 한다. 그저 평범하게 두어서는 최대한 올라갈 수 있는 급수가 5급 정도란다. 여기서 한번 단단히 미쳐야 3급에 도달할 수 있고, 1급까지 갈려면 아주 철저하게 완전히 미쳐야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급수는 기원 급수로써 보통 「프로 급수」라고 칭하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3급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당시 아마5단이 1급이었으니 3급은 아마3단 격에 해당하는 것이다(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아마3단은 약한 1급이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아마5단 정도다.

인천은 당구뿐만이 아니라 바둑도 엄청나게 짜다고 한다. 기원에 있다 보면 간혹 타지방 분들이 일보러 왔다가 남는 시간에 기원을 들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쪽 전문용어로 「뜨내기」라고 한다. 두어본 결과 서울이 제일 물이다. 서울에서 3급 둔다는 사람이 치수고치기해서 3점까지 내려간 적이 있다. 혀를 내두르며 하는 말이 자기가 서울에서 못 두는 3급이 아닌데 인천은 너무 짜다는 것이다. 인천뿐만 아니라 대체적으로 기원에서는 짝수 급수가 없다. 짝수 급수는 호구이거나 아니면 홀수 급수로는 너무 짜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놓는 그런 치수다. 그렇기에 인천의 기원에서는 2급이 없다. 지금은 많이 싱거워 졌지만 그 때 인천의 1급은 프로1급을 말한다. 요새같이 아마 몇 단이다 하고 말하면 그 즉시 호구 취급받던 시절이었다. 여하튼 3급은 되었는데 요지경 같은 급수가 3급이다. 같은 급수에서 3점까지도 치수 차이가 날 정도다. 1급의 경우도 천차만별이다. 심한 경우 같은 1급이 4점을 접는 경우도 목격했다.

선배원장님 말씀이 그대로 3급 조금 더 두다가 1급 놓으면 되겠다고 할 정도가 될 무렵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시험은 당연히 안 봤다. 집에서는 난리가 났고 어쩔 수 없이 9급 공무원 시험을 쳤는데 합격되어서 면접을 보러 오란다. 수원으로 갔다. 면접관이 「유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원래 유신은 시경인지 예경인지 어디에 나온다는 말로 장황하게 시작해서 일본 명치유신까지 들먹이는데 면접관 얼굴이 이상하게 변해가는 것이었다. 아차! 하는 생각이 순식간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래서 10월 유신에 대해 말을 하려고 몇 마디 꺼내는데 그만 나가 보란다. 최종면접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집에서는 걱정이 태산 같은 데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아침 일찍 기원에 나가 청소 다 끝내고 조용히 앉아서 바둑 책과 기보를 놔본다. 그러다 손님 오면 같이 한판 두어주는 「죽돌이」가 된 것이었다. 종종 벌어지는 1급들 리그전 관전하는 재미는 왜 그리 쏠쏠한지. 입단대회 응원도 가봤다. 허장회 사범이 입단하는 것도 지켜봤다. 강훈 사범도 바둑 두러 인천기원에 가끔 오기도 했다. 지금 SBS의 신병식 아마7단도 종종 나타나 기원1급 형들과 방내기 두다 가곤 했다. 신병식씨는 신봉호(지금 시립대 교수던가?)라고 서울대 다니는 후배를 가끔 데리고 나타났는데 얼굴이 곱상한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나보다 2살 위의 형님이 입단하는 것도 지켜봤다. 그 양반은 결국 한국기원에서 제명당했지만. 실력은 기원에서 가장 센데 입단대회에 나가면 꼭 3차 예선에서 떨어지는 형님과 고뇌도 같이 했었다.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아마강자도 있었다. 나와 동갑인 서능욱 사범은 당시 방위복무를 하고 있던 터라 가끔 기원에 나타나서 장기, 마작, 포카 등 잡기에 빠졌다. 같은 나이라고는 하나 하늘같은 프로여서 서사범에게 쉽게 접근하기 힘들었고, 서사범은 주로 1급들하고 어울리면서 게임에 몰두하였는데, 게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나를 바둑실력도 시원치 않은 기원 달건이 정도로 생각했는지 둘은 그다지 친하지 못했다. 안면만 익힌 정도였으니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어쩌다 만나면 악수나 하고 형식적으로 인사치레나 하는 그런 사이로 지금까지 지내온다.(후일 기회가 닿는다면 실명 비공개로 이 분들의 이야기도 엮어볼 생각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 친구들은 다 대학진학하거나 재수한다고 서울로 나다니고, 나는 혼자 기원 구석에 쳐 박혀 있었다. 기원에 있는 책은 대략 한 번씩 훑어보았다. 사카다의 「묘(妙)」시리즈 책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임해봉의 「행마수순비결」이나 조남철 국수의 「행마의 기초」는 바둑의 명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당시는 지금처럼 바둑출간물이 많지 않았다. 바둑잡지도 보았다. 선배원장님이 이제는 기보를 놓아볼 때가 되었다며 바둑지의 맨 마지막에 실리는 기보를 집중적으로 보라고 훈수하신다. 당시 바둑지는 일본의 주요 프로기사 대국보를 마지막에 싣고 있었다. 한국기사의 기보가 주류였지만 무언가 정돈되지 않는 느낌의 싸움바둑이라는 인상이었는데 일본바둑은 정형화된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모르게 우리나라 기사의 그것보다 한 수 위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인가부터 갑자기 바둑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뭐가 뭔지 도통 모른다는 느낌이 왔다. 부분적인 전투는 대강 알 것도 같은데 바둑 전체를 생각하면 뿌연 안개 같은 것이 머리를 감싸는 그런 느낌이었다.

3급이 되고 나서 처음에는 프로3급 소위 「방내기 꾼 3급」한테는 애를 좀 먹었다. 그 분들은 내 바둑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책 바둑 소위 「화초바둑」이라고 약을 올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두다보면 희한하게 대마가 엮여서 만방 직전까지 가는 것이다. 분명히 책에서는 그렇게 두면 무리한 것이라 안 되는 수라고 써져 있는데 묘하게 걸려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런 소리가 쑥 들어갔다. 그런 바둑을 다루는 요령을 깨우친 것이다. 일단 알고 나니까 오히려 그런 바둑이 다루기가 더 쉽다고 해야 하나. 그 이후 방내기 꾼들은 꼬리를 내렸다. 그들을 평정하고 나니까 같은 급수에서는 더 이상 적수가 없어졌다. 자연 접바둑을 둘 기회가 많아졌다. 책 바둑이니 처음에는 접바둑을 잘 접지 못했다. 그런데 그것도 두다보니 요령이 체득되는 듯했다. 하수들은 어린 학생이었지만 나하고 두기를 즐겨했다. 첫째는 내기를 안 걸어도 되고 둘째는 다른 상수들처럼 무지막지하게 잡으러 안 오니 져도 좋아했고 이기면 더 좋아했다.

그런데 유독 1급들한테는 안되었다. 3급이면 보통 1급이 4점을 접는다. 그게 정칫수라는 것이다. 하긴 같은 1급끼리 2점 3점에 방내기 승부가 종종 이루어졌으니 강1급이 3급을 4점 접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 기원에는 1급들이 숱하게 많았다. 보통 다른 기원은 하수들이 주종을 이루고 1급은 어쩌다 한두 명 있을까 하는 정도지만 인천기원은 발뿌리에 채이는 것이 1급이었다. 선배원장님이 1급들의 대부였기 때문이다. 그 선배의 부친은 교육자였는데 지나치게 공부를 강요하는 바람에 거기에 대한 반발 심리로 바둑으로 빠진 경우였다. 그 기원에 나오는 1급들은 다 선배원장님의 지도를 통해서 바둑을 익혔다고 한다. 1급한테 3점을 놓고 두라고 정해주었는데 도통 판 맛을 못 보는 것이었다. 기원의 막내이니 온갖 귀여움은 다 받았다. 잔심부름도 역시 내차지였다. 담배사와 술사와 청소해 여하튼 궂은일은 다 도 맡아서 했다. 그러니 1급 형들은 귀여워하면서도 장난기가 발동하면 제대로 가르칠 생각은 안하고 슬슬 데리고 노는 것이었다. 되지도 않는 수를 슬쩍 던져놓고는 눈치를 쓱 본다. 제대로 응징하지 못해 판이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하면 옆에 있는 형들이 한마디씩 던진다. 그것도 응징 못하느냐 책은 폼으로 보느냐 그래가지고 언제 바둑이 느느냐 그걸 머리통이라고 달고 다니느냐 차라리 수박 통을 이고 다녀라 등등. 열 받은 기미를 보이면 3점에는 안되니 4점 놔라 이러면서 1급들끼리 얘를 몇 점에 접을 수 있나 내기를 할 정도로 짓궂게 장난을 쳤다. 그 중에 접바둑을 귀신같이 잘 접는 1급 형이 있었다. 같은 1급에서는 약한 편인데 접바둑은 2점을 더 접어준다. 무슨 안개 낀 호수에서 마술쇼를 하듯 하수들은 엮여 들어간다. 옆에서 보기에도 입이 쩍쩍 벌어질 정도다. 어느 날은 내가 걸려들어 6점에도 진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그 형이 1급 형들을 다 불러서 이 바둑 좀 보라고 광고를 하는 것이었다. 옆에서 형들이 낄낄거리고 웃으며 약을 올린다. 어느 형은 꿀밤을 한 대 쥐어박으며 에라이! 따슥아. 어디 나서 내 후배라고 말도 하지 말아라 한다. 얼마나 분하던지 눈물까지 흘렸었다.

나한테 자주 지는 동급수도 1급한테 3점 또는 4점에 방내기까지 하는데 나는 유독 1급한테는 잘 안 되는 것이었다. 어쩌다 1급 형들의 술자리에 따라가면 선배원장님이 가끔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너 처럼 빨리 바둑 느는 놈은 처음이다. 조금만 더 어린 나이에 일찍 배웠더라면...” 그랬다. 그 때는 스펀지가 머리 속에 있지 않나 할 정도로 흡수력이 빨랐다. 한번 보면 잊지를 않았다. 그렇게 일취월장으로 늘어만 가던 바둑이 갑자기 정체가 되니까 의기소침해졌다. 프로 기보를 놔 봐도 도통 이해가 안 되었다. 포석이 끝나고 중반 전투에 들어갈 때쯤이면 바둑판이 왜 그렇게 넓게만 느껴지는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난감해지는 것이다. 책에는 승착이라는데 왜 승착인지 패착이라고 하는데 왜 패착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사활은 그럭저럭 풀겠는데 반면 운영은 오리무중이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가 마의 1급 벽에 부딪친 게 아닌가 싶다. 그 고비만 넘기면 바둑이 확 늘었을 터인데 한 1~2개월 더 매진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던 4월의 어느 날이었다. 친구들이 기원에 놀러왔다. 대충 바둑 한판 두고 술이나 한잔 하자고 나갔다. 친구 녀석들은 학교 다니는 이야기며 미팅한 이야기며 이런저런 소리를 지껄여 대는데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무언지 모를 조급증이 났다. 아니 그 조급증의 정체는 바둑이었다. 학업을 포기할 때 오기로 선언했던 입단의 길이 그렇게 만만한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 것이었다. 이렇게 가다가는 아무 것도 안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는 것이었다.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한잔 두잔 먹다보니 꽤 많이 마시게 되었고 그 날 만취가 되었다. 집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기원에서 잤다. 눈을 깨니 11시 정도쯤 되었다. 세수하고 머리를 감았는데도 두통과 속 쓰린 것이 가실 기미가 없었다. 시원한 바람이나 쐴까하고 기원건물 입구 계단에 쭈그리고 앉았다. 멍하니 바닥을 보고 있는데, 4월의 그 화사한 햇볕이 하나 가득 나의 몸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푸근한 봄 내음이 나는 것 같았다(나는 지금도 그 햇살과 그 냄새를 잊지 못하고 있다). 아! 얼마 만에 쬐어보는 햇볕이던가! 그 볕의 따스함이 좋아 맥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때 불현듯 드는 생각이 있었다. 새파란 청춘에 이게 뭐하고 있는 짓인가!

그리고는 자리를 털고 벌떡 일어나 집으로 갔다. 한 삼일은 내쳐 잔 것 같다. 그 이후로 10년 동안 바둑알을 손에 쥐어보지 않았다. 집에 있던 바둑책도 다 내다 버렸다. 당연히 기원 간판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때가 77년 4월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2년 늦게 인천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다닐 때는 쳐다보지도 않았던 학교였고, 갈 데 없으면 거기나 가라고 우스개 소리하던 그런 대학교였다(사실은 우리 동기들이 제일 많이 간 곳이었고 지금도 그럭저럭 괜찮은 데로 쳐주는 모양임). 대학에 들어가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가정형편상 국비장학생이 되었다(그 덕에 공직과 인연을 갖게 되었지만). 클래스메이트들은 내가 바둑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으로 알았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85년인지 86년이지 경제기획원 바둑대회가 열렸었다. 부서 대표로 나가보겠다고 했더니 바둑 둘 줄 아냐고 웃던 동료들이 3등 트로피를 타가지고 오니까 거 참 희한한 친구네 하고 의아해 하는 것이었다. 1편 끝.(2편 많이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