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사랑과 행복의 제아 아너스빌. 찬돌이 사는 빌라의 벽면에 조각되어 있는 문구는 여전히 희망을 주장하고 있었다. 현관 위의 벽에 대리석을 대고 부조로 새긴 문구에 개별 조명까지 비추며 서민형 빌라의 입주자들을 축복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관 앞에는 전에 없던 스쿠터 한 대가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었다. 스쿠터는 배달원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현관 앞을 가로막다시피 하며 세워 놓은 스쿠터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그것은 오른 쪽 손잡이에 꽤 흥건했고 마지막 한 방울이 막 스쿠터 발판 위로 떨어지려는 중이었다.

 핏자국은 건물 안에도 간간이 떨어져 있었다. 계단 위에 떨어진 핏방울은 한 쪽으로 길게 번진 모습이었다. 그것은 피를 흘리는 사람이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음을 의미했다. 2층 계단과 3층 계단 사이에서는 벽에 손을 짚어서 생긴 핏자국도 보였다. 그리고 4층에 찬돌의 집 현관문 손잡이에도 피 흘리는 오른손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집안은 어두웠고 스위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벽을 더듬거리던 주리는 손 끝에 화장실 문설주가 닿자 그 주변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위치 하나를 찾아 낸 뒤 화장실 불을 켤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만으로도 집안의 구조를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 안방 문은 닫혀 있었다. 주리는 노크도 없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안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찬돌이 집에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예측이 맞았음을 알았다. 방안엔 술냄새가 가득했다. 주리는 테이블 위에 보이는 자명종 시계의 야광 불빛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시계는 8시 3분을 지나고 있었다.

 주리는 테이블로 다가가서 컴퓨터 전원 버튼부터 눌렀다. 침대에 누워 속 편안히 잠에 곯아 떨어져 있는 찬돌을 괴롭히는 일은 그 다음이었다. 컴퓨터가 부팅되기 시작하자 주리는 더 이상 손을 쓸 일이 없었다. 주리는 찬돌이 있을 침대 쪽을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찬돌은 팔다리를 벌린 채 편안한 자세로 잠이 들어 있었다. 주리는 어금니에 힘을 주며 최대한 노여움을 담아 소리쳤다.

“일어나.”

찬돌은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맡에는 소주병 하나가 보였다. 소주병은 침대 밑에도 두 병이 더 있었다. 주리는 찬돌에 대해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지만 화를 억누르고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것은 대국을 앞둔 상황에서 필요한 태도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임전 자세는 지난 일 년 동안 찬돌의 가르침에 의해 터득한 결과였다. 순간 주리는 현재 지호의 심리적인 상태가 걱정이 되었다. 그녀가 늦으면 지호가 알아서 주리의 아이디로 접속을 해 놓기로 약속되어 있었지만 서버에 함께 접속을 하고 대국에 참여한다고 해서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지호의 컨디션도 좋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주리는 휴대전화를 꺼내 지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쪽 컴퓨터가 부팅을 마치고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열릴 즈음 지호가 전화를 받았다.

“이모. 어디예요?”

다행히 지호의 목소리는 불안정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주리는 익스플로러의 주소 창에서 위고로 닷컴을 찾아 클릭하면서 지호와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선생님 댁이야. 이모 컴퓨터하고 네 컴퓨터하고 다 접속해 놨니?”

“예. 지금 우리가 둘 차례예요.”

“그래. 그럼 지호가 이모 자리에 앉아서 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오늘은 지호한테 팀장을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그러시네. 오늘 상대 팀은 지호 나이 또래의 선수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니까 한 번 멋지게 싸워봐. 선생님 아이디는 조금 있다가 접속할 거야. 잘 할 수 있지?”

“예. 알았어요.”

“그래. 파이팅.”

주리는 전화를 끊자마자 얼굴색을 바꾼 뒤 찬돌을 향해 소리쳤다.

“아이디하고 비밀번호 뭐야?”

찬돌은 숨을 쌕쌕거리며 잠이 들어 있었다. 주리는 잠시 말없이 찬돌을 노려보았다. 생각 같아서는 찬물을 한 바가지 퍼와서 찬돌의 얼굴에 끼얹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연인에 대한 예의를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주리는 손에 든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지호에게 다시 전화를 해서 아이디 하나를 로그아웃 하게끔 하고 이쪽에서 다시 접속을 하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것은 지호를 불안하게 만들 우려가 있었다. 주리는 결국 잠과 술에 취한 찬돌과 승부를 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잡아먹기라도 할 듯한 눈빛으로 찬돌을 한동안 노려본 뒤에 말없이 다가갔다. 

 비. 어둠. 피비린내. 정적. 은하마을 537동 1708호. 어질러진 거실. 천둥. 번개. 바닥에 쓰러진 아버지. 가슴에 꽂힌 칼. 흥건한 피. 아버지의 피를 깔고 앉아 있는 사내. 말없이 돌아보던 사내의 눈빛. 무기. 무기를 잡아야 한다. 골프채. 고개를 숙이는 사내. 왜. 왜. 왜. 왜 죽이지 못했을까.

찬돌을 괴롭히고 있는 단편적인 기억들은 6초 간격으로 끊어지면서 연결되고 있었다. 만일 꿈이 끊김 현상 없이 이어진다면 악몽을 견딜 수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찬돌은 기분 좋게 잠에서 깬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현실이 더 편했다. 비록 넥타이에 묶여서 의자에 강제로 앉혀져 있고, 필요 이상으로 크게 들리는 스피커의 바둑돌 착점 소리와 계집애의 쨍쨍거리는 잔소리가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아까의 꿈보다는 현실이 더 나았다.

“제발 좀 일어나. 얘네들 잔수에 너무 밝아. 벌써 잽을 두 방이나 먹었단 말야.”

주리는 찬돌이 쓰곤 하던 말투와 표현법을 따르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 일 년 동안 놀라울 만큼 빠른 성장을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가 바둑 수업을 거부하는 걸 포기하고 마음을 연 이후 보여준 이해력과 흡수력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그녀는 사랑스런 여자였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돌아서는 순간 주리는 지호 못지않은 어린아이의 순박함으로 반상 위에서 요구되는 기본기와 자세를 완벽하게 갖출 수 있었다.

 아마 강자와 프로의 차이는 쉽게 메워지는 것이 아니다. 프로의 세계에서도 강자와 약자의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는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바둑의 도를 깨우치기 위한 방법을 말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설명은 바로 ‘거듭남’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주리는 거듭나는 일에 성공했고 찬돌은 주리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지호와 같은 어린아이들은 거듭날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바둑이 수담이라는 이름의 어학이며 수학이라는 사실을 이해시키고, 시종일관 상대를 인정해야 하며 무시하는 태도를 경계하도록 가르치고 좋은 자세를 지니도록 이끌면 충분했다. 결국에 가서는 뇌의 가용능력이나 창의력과 같은 개인적인 특성에 의해 성취의 결과가 달라질지라도 일단 프로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프로로서 키워지거나 거듭날 필요가 있었다.

 찬돌은 자신의 뜻을 따라와 준 주리가 고마웠고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끝까지 책임을 지지 못하고 회피하려고만 하는 자신이 저주스러웠고 그녀에게 미안했다. 그나저나 집에까지 찾아온 주리는 너무 극성스럽게 굴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침대에서 자고 있던 찬돌을 끌어내어 의자에 묶은 뒤 컴퓨터 앞으로 데려다 놓았던 것이다. 계속 잠을 청하기에는 의자에 묶여 있는 자세가 너무 불편했다. 찬돌은 어지럽고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을 바둑 내용이 궁금해져서 눈을 뜨기로 했다. 그런데 그의 시야에는 다시 피의 이미지가 가득했다. 찬돌은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잠은 이미 달아나버렸고 다만 눈꺼풀이 뻑뻑해서 눈을 여러 차례 감았다 떴다 하기를 반복했다. 그렇지만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피에 젖은 팔이 눈앞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뭐라고 좀 해봐. 지호도 별로 감이 안 좋은 거 같아. 계속 잘 거야? 정말 얼음물이라도 부어야 정신 차릴래?”

찬돌은 피에 젖은 팔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옆에는 주리가 식탁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팔꿈치는 아스팔트에 갈린 듯 옷이 찢겨 있었고 피가 배어나오다 못해 마우스를 쥐고 있는 손 쪽으로 타고 흐르고 있었다.

“컴퓨터는 어떻게 켰어?”

주리는 찬돌이 깬 것을 알고는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지만 곧 시선을 화면으로 향하고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어떻게 접속했냐고 묻는 거야? 아까 억지로 깨우니까 비밀 번호 가르쳐 줬잖아. 기억 안 나?”

“팔은 왜 그래?”

“스쿠터 타고 오다가 넘어졌어. 퇴근 시간이라 길이 많이 막히더라고. 영등포 역 지나서 문래 고가도로 근처에 오토바이 가게 하나 있잖아. 거기다 신분증 맡기고 삼만 원 주니까 허접한 스쿠터 하나 빌려주더라고.”

찬돌은 다음부터는 용산역으로 차를 몰고 가서 인천 방향 급행 지하철을 타면 빨리 올 수 있다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참기 힘든 슬픔이 몰려오는 것이 느껴지자 다시 눈을 감았다.

“뭐야? 설마 또 자는 거야? 정말 죽을래?”

남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여자 앞에서 울지 않는다. 남자의 사랑은 주는 사랑이다. 기본적으로 모든 남자의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과 닿아 있어야 한다. 어리석은 놈들이나 소년의 사랑에 머물며 응석과 투정을 버리지 못하고 자기 여자를 힘들게 하는 법이다. 찬돌은 가슴에서 밀고 올라오는 무언가를 삼킨 뒤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바둑은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호는 나름대로 선전하고 있었으나 흑을 쥔 상대가 흑 선의 유리함을 초반부터 계속 이어오는 데에 성공하고 있었다. 확실히 연구생 1조들로 이루어진 상대는 지호보다는 경험에서 앞서고 있었다. 귀의 두 군데 정석이 마무리 되고 변을 다투는 모양에서 흑은 불청을 여러 차례 감행하여 백의 선수 잡는 일을 방해하고 난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절묘하게도 찬돌이 막 바둑판을 들여다보고 있는 지금의 백의 한 수가 중요한 시점이었다.

 지호는 이전에 흑이 불청을 하였던 좌변에서 백이 들여다본 곳을 가일수하여 집을 확정지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리도 찬성을 하려는 듯 마우스를 움직여 지호가 착점한 흐릿한 돌 위에 커서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찬돌의 눈에는 방금 전에 흑이 놓았던 하변의 돌이 신경 쓰였다. 하변은 백이 포석단계에서 갈라치기를 한 뒤에 두 칸 벌린 뒤 중앙으로 한 칸 더 뛰어 놓았기 때문에 안정된 모습이었다. 그리고 방금 흑은 백돌 근처에 비어 있는 공간을 마지막으로 차지하는 평범한 수를 놓은 듯이 보였다. 그런데 바둑판 전체에서 느껴지는 상대의 기풍으로 보아 흑은 이후에 하변의 백 진영을 파고들어 올 것 같았다. 예상되는 위치는 바로 중앙 쪽으로 한 칸 뛴 백의 안 쪽에서 들여다보는 응수타진의 지점이었다.

“잠깐 기다려봐.”

찬돌은 주리의 착점 완료를 지연시킨 뒤 다시 바둑판을 주시하였다. 하변은 백 돌 세 개만으로 이루어진 진영이었다. 3선에서 두 칸 벌림을 하고 중앙으로 한 칸 뛴 자세는 매우 단단한 모양이 분명했지만 주변엔 온통 흑의 세력이었다. 만일 흑이 곧바로 공격을 해온다면 어느 정도 시달리다가 정리가 되기는 하겠지만 문제는 중앙 쪽에 흑돌이 여러 개 놓이는 모양이 예상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중앙의 흑돌들과 우하귀에서 흘러나온 흑의 세력이 합쳐진다면 삭감이나 침투가 쉽지 않은 거대한 흑의 진영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하변에 백 석 점이 좀 약한 것 같다. 그래서 우하귀에서 중앙으로 나오는 흑 진영 쪽에 백돌 하나 정도 미리 가져다 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주리는 찬돌이 말한 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서는 우하귀에서 중앙으로 나오는 흑 진영을 삭감하기보다는 좌변을 차지하는 게 당연해 보였다. 이전 수순에서 흑이 불청을 하고 다른 곳을 연거푸 차지한 마당에 손이 돌아온 현 시점에서 상대가 불청한 자리를 응징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우하귀 쪽 안 받아주고 좌변을 흑을 차지하면... 집 차이가 벌써 스물다섯 집이 넘게 나는데...”

찬돌은 대꾸가 없었다. 이론상으로는 주리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 찬돌은 상대 팀의 시선이 어디로 가 있을 것인가 하는 데에 있어서 직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만약 상대 팀이 하변의 백돌 석 점을 공격하기 위해 잔뜩 노려보고 있다면 백의 삭감에 대해 한 수 정도는 받아줄 게 틀림없었다. 물론 상대는 이 쪽의 손길을 한 번 받아둔 뒤에는, 하변 백돌들을 공격하고 중앙에서 흑진영을 키울 때 문제의 백 돌 한 점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었고, 찬돌은 문제의 백돌 한 점이 있기 때문에 제압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게 다를 뿐이었다.

 주리는 망설이고 있었다. 찬돌은 지금 취한 상태였고 방금 전까지는 팀을 이탈한 채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 찬돌의 의견을 무시하게 되면 찬돌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는 빌미가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리는 평소 우유부단한 타입이 아니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도저히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편 찬돌은 주리를 적극적으로 설득한다거나 주리가 자신의 말을 따라주었으면 하는 생각은 없었다. 만일 주리가 스스로의 신념을 밀고 나간 뒤에 바둑을 지게 된다면 그녀와 다투고 헤어지게 되는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찬돌은 주리 앞에서 못된 짓을 일삼거나 하여 그녀에게 아픔을 안겨준 뒤 쫓아 보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운명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기를 원한다면 운명이 알아서 결론을 내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주리는 커서를 움직여 우하 흑의 세력을 삭감할 수 있을 만한 적당한 위치에서 클릭하였다. 그러자 아까 지호가 놓았던 흐릿한 백돌이 사라지고 우하 쪽에서 새로 나타났다. 지호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더니 미확정 백돌을 다시 좌 변 쪽 같은 위치에 옮겨 놓는 것이었다. 이제 현실적으로 2대 1이었다. 주리와 지호의 생각이 같았고 찬돌 혼자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다.

 동부 이촌동 팀은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당연히 팀장이어야 할 찬돌은 아이디를 상실하였고, 어처구니없게 남게 된 주리의 아이디 K-cop을 현재 사용하는 있는 사람은 지호였다. 또한 찬돌의 아이디를 가지고 알파 자리에 들어가 있는 것은 주리였고 찬돌은 무슨 인질처럼 의자에 묶여 있지 않은가. 주리는 골치가 지끈거렸다. 그렇게 생각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두통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뼈가 드러나도록 다친 팔꿈치 쪽은 화끈거리고 저려서 손이 다 떨릴 지경이었다.

 주리는 찬돌을 돌아보았다. 찬돌은 피곤한 얼굴로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었으나 눈의 초점은 풀린 모습이었다. 주리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런데 원래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지금쯤 찬돌이 하변과 우하 쪽에서 놓아보기를 여러 차례 해 보이면서 주리와 지호를 납득시켰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주리는 찬돌의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따르기로 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이곳까지 찾아온 의미가 없었다. 주리는 지호가 옮겨 놓은 돌을 다시 돌려놓았다. 그러자 지호는 우하 쪽의 삭감의 자리에서 확정을 시켰고 ‘딱’ 하는 착점 소리가 스피커에서 오랜만에 울렸다.

 바둑은 중반전이 지나자 승부가 싱겁게 흘러가고 있었다. 찬돌은 거의 졸다시피 하며 별 말도 없이 의자에 묶인 채로 앉아 있었지만 3Kings라는 대표 아이디를 쓰는 상대 팀은 우하 쪽의 백돌을 잡기 위해 무리를 하다가 우하귀의 집까지 다 무너져 버렸고, 쫓기던 백돌들은 적진에서 열다섯 집이나 만들고 살아버렸기 때문에 흑백 간의 집 차이는 역전되어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비록 초읽기에는 몰려 있었지만 주리와 지호는 찬돌에게 배운 대로 바둑이 유리할 때 두텁게 두어야 하는 모양과 적극적으로 두어야 하는 모양을 비교해 가며 집중력을 더욱 끌어올리고 있었다. 주리는 대화창에다가 지호를 독려하는 글을 올렸다.

‘지호야.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후반은 산수 시간이라는 말 기억하지? 난 돌이 한 번 놓일 때마다 백의 집을 셀 테니까 넌 흑의 집을 계속 세도록 해.’

‘알았어요. 그런데 선생님이 두는 게 아니라 이모가 두는 거였어요?’

‘선생님이 두신 건 아까 딱 한 점뿐이야. 지금은 자고 있네. ^^’

찬돌은 정말로 고개를 떨군 채 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바둑이 끝난 뒤에 주리가 함성을 지르자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들었다. 찬돌은 목이 말랐다. ‘백 9.5 집 승’이라는 안내문이 떠 있는 모니터 쪽은 쳐다도 안 본 채 물부터 찾았다.

“물 좀 마셔야겠어. 이 것 좀 풀어줘.”

주리는 찬돌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찬돌은 주리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주리는 느린 동작으로 일어나서 거실로 나가 물을 한 잔 따라서 들어왔다. 그리고 찬돌의 입에다 컵을 대어주었다. 의자에다 찬돌의 허리를 묶어 놓은 것을 풀어주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찬돌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주리가 먹여주는 물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그 때까지도 주리의 얼굴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왜 날 안 봐?”

주리가 묻는 말에 찬돌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찬돌은 변명 대신에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쪽을 택했다. 일주일 전에 3차 예선전을 통과한 뒤에, 주리의 집에서 지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서로 눈길을 교환하며 오래 바라보았던 이후 처음이었다.

“우리 사이에 무슨 문제 있어?”

찬돌은 주리의 질문에 대답할 말을 준비해 두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다고 하자니 억지로 말을 만들어가며 길게 설명을 해야 할 것 같고 그렇지 않다고 하자니 주리가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어 댈 게 뻔했다. 그런데 마침 주리는 받아치기에 좋을 말을 꺼내고 있었다.

“전에는 틈만 나면 키스하자고 조르기도 하고...... 손은 자꾸만 더듬으려 했잖아. 이젠 왜 안 그래?”

“이거 풀기만 해봐. 얼마든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줄 테니까.”

찬돌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고 정말로 주리를 덮치기라도 할 듯이 강렬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주리는 그러한 찬돌을 마주 보다가 두려운 듯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몇 초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 주리는 찬돌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찬돌의 허리를 의자에 당차게 묶어 놓은 넥타이를 풀기 시작했다. 하지만 넥타이는 너무 꽉 묶여 있어서 잘 풀어지지가 않았다. 더구나 주리의 오른 손은 피가 멎기는 했지만 통증으로 인해 힘을 제대로 줄 수가 없었기에 더욱 힘들었다. 결국 주리는 이를 이용해서 넥타이가 매듭지어진 곳을 풀어야 했다. 그리고 찬돌의 속박을 해제한 그녀는 이제 찬돌이 하려고 했던 일을 하라는 듯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찬돌은 주리에게 손을 뻗었다. 찬돌의 무릎 앞에 주리의 무릎이 거의 닿아 있었고, 찬돌의 손끝은 주리의 무릎 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찬돌의 손끝이 주리의 무릎보다 조금 윗부분의 부드러운 곳에 가서 닿았다. 주리는 바지를 입고 있기는 했지만 찬돌의 손이 닿는 순간 몸을 움찔하며 반응했다.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고 방안은 적당히 어두웠다. 찬돌은 손끝에 느껴지는 주리의 존재감이 부드러우며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아가면 바라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서로의 비밀을 서로의 상처와 함께 덮어둔 채 한 몸이 되고 마음을 확인하기에 좋은 날이었다. 그렇게 마음을 먹기만 하면 모든 게 다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그럼 오늘은 뜻 깊은 날이 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앞으로 어떠한 고난과 시련이 닥쳐와도 함께 이겨나가자는 언약을, 몸짓과 마음으로 나누고 서로를 어루만져준다면, 모든 게 잘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찬돌의 손끝은 주리의 무릎 위에서 떼어지고 있었다. 찬돌은 주리를 너무나 안고 싶었다. 최소한 포옹만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참을 수 없게 될 것을 알았기에 애써 견디고 있었다. 찬돌이 주리의 오른 손이 있는 쪽으로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을 때, 주리는 찬돌의 고통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찬돌은 마른 피와 젖은 피가 뒤섞여 있는 주리의 손을 잡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하려 하였다. 하지만 주리의 어깨는 이미 조금씩 들썩이고 있었다.

“우리 대회 끝나거든 다시 만나자. 그 때 혹시라도 분위기가 아주 좋으면...... 혹시라도 우리가 천만 달러를 벌게 되면 말야...... 그 땐 누구도 모르잖아. 돈이란 게 사람도 바꾸고 운명도 바꾸고 고통도 치유해주고 또...... 영혼도...... 아무튼 그 때 가서 다시 만나자. 응? 지호도 저버리려 하고 너도 저버리려 한 거 미안해. 그리고 날 끝까지 믿어줘서 고마워.”

주리는 찬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찬돌이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으려 하는 것 같아서 안심이 되기도 했다.

“알았지? 일단 대회에 한 번 집중해 보자. 함께 말야.”

주리는 찬돌의 말이 끝나자 숨을 고르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자 찬돌은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겨 일으켜 세웠다.

“자. 병원에 가야지. 피가 그렇게까지 흐를 정도면 최소한 꿰매야 할 것 같아.”

찬돌은 주리를 이끌고 집 밖으로 향했다. 주리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다친 곳을 의식하기 시작해서인지는 모르나 상처 부위의 통증을 심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찬돌은 아파하는 주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거리로 나가 택시를 잡고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품안에 들인 주리의 어깨를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