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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만이 심인성 병증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동물들도 마음에 어둠이 깃들어 있거나 심각한 강박증세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이 지니는 마음의 병은 자신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서로를 상처 입히고 고통을 전염시킨다.

 고통은 자연이 모든 생명에게 준 선물지만 동물들의 입장에서 고통이라는 선물은 달갑지가 않다. 식물들의 고통은 단지 위험의 신호이지만 동물들의 고통은 신호 이상으로 작용한다. 식물들은 상한 곳을 치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낄 때 수분을 조절한다거나 치유 물질을 분비한다거나 하여 대처하지만 죽음 앞에서만큼은 의연하다. 그들은 현재의 위치에서 얼마든지 환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동물들은 고통을 느낄 때 지나치게 죽음을 의식한다. 동물들의 고통은 두려움과 절망을 야기한다. 상한 곳을 회복할 수 없게 되면 죽음에 이르고 죽음은 곧 자유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고통으로부터 깨닫는다. 식물들은 죽음을 다음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동물들은 죽음을 세상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 진화한 탓에 육체적인 고통보다는 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한 상처에 대해 더 민감하고 오래 아파한다. 죽는다는 것. 홀로된다는 것. 다시는 자유로워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현실 앞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겁쟁이가 된다. 그리고 겁에 사로잡히다 못해 인색해지고 교활해지며 잔인함을 습득한다.

 때때로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들은 고통을 너무나 두려워하다 못해 마음에 병을 얻는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과 유사한 종류의 고통을 곁에 두려 한다. 어떤 이들은 모든 종류의 고통을 회피하며 방안에 숨어 버린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자존심에 상처받는 일을 견디지 못하기도 한다.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위대하다. 사람들은 상상을 할 수 있기에 행복감을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인생에게 허락된 고귀함은 쇠와 같이 흔하지 않다. 고귀한 정신과 삶은 금과 같이 드물다.

 4차 예선의 마지막 경기는 주리의 팀과 한국기원 1조 연구생들이 결성한 것으로 알려진 팀의 대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번 경기만 이기면 다른 세 팀과 함께 5차 예선에 진출함과 동시에 천만 원의 상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프로 예선전을 치루고 올라온 4강의 프로들 중 한명과 경기를 해서 두 판만 이기면 대망의 본선이었다. 경기 시각은 저녁 여덟 시였고 예정된 시간 안에 위고로 닷컴에 접속하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대국실로 입실하여 대국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일 오후가 다 가도록 찬돌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휴대전화도 꺼 놓은 채였다.

 동부 이촌동의 아파트에서 주리와 지호는 오늘 경기를 하게 될 상대 팀의 기보를 분석하고 있었다. 시각이 일곱 시에 가까이 이르자 찬돌을 기다리던 주리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점심 식사를 함께 한 후 오늘 경기에 대한 작전을 지휘하였을 찬돌이 전화도 않은 채 모습을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주리는 이틀 전에 찬돌이 잠깐 비쳤던 불안정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때 주리가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찬돌은 잠깐 복기를 해 보았을 뿐이라며 오히려 왜 그런 식으로 묻는지 반문하였다. 그리고 주리와 지호의 경기력을 칭찬하고는 피곤하다면서 자신의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주리는 그 때 찬돌에게 적극적으로 이상한 기색에 대해 묻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리고 그 후 이틀 동안 느꼈던 불안감이 현실로 다가오자 당황스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주리가 찬돌에 대해 느끼는 실망감에 이어 화가 나는 이유는 지호에 대한 약속 때문이었다. 지호의 아버지는 지난여름에 음주 운전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퇴근길에 난 사고였는데 상대 운전자는 종합보험을 들지 않고 책임보험만 든 상태였다. 결국 열흘 동안 중환자실 신세를 진 뒤 한 달 만에 퇴원한 지호 아버지는 이렇다 할 보상도 받지 못한 채 2급 장애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집에서 쉬고 있었다. 주리와 찬돌은 지호 아버지가 산재보험과 연금 혜택은 받을 수는 있을 테지만 앞으로 생활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지호를 잘 거두는 게 지호네 집을 돕는 일이라는 생각을 함께 나누었다. 그런데 상금을 타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 것이라는 지호의 기대를 지금 찬돌이 저버리려 하고 있었다.

 주리는 집안에 앉아 화만 억누르고 있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찬돌이 없는 상태에서 대국을 진행하든가 아니면 찬돌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찬돌이 없는 대회 참가는 무의미했다. 그녀를 여기까지 이끈 것은 찬돌이었다. 이제와서 혼자서만 빠지려 한다면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주리는 찬돌을 찾아 나서기로 결정 했다. 그리고 그녀는 찬돌의 행방을 찾을 수 있기 위한 생각들을 거미줄처럼 뽑아내기 시작했다.

 누군가 갑자기 연락을 끊는 행동은 책무를 회피하고 싶어 하는 심리였다. 그렇다면 그러한 마음을 행동에 옮기기 위해서는 명분이 필요할 것이었다. 주리는 이틀 전 대국의 결과로 이제 찬돌의 아이디가 탈락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찬돌은 실전대국에서 패했다는 의미보다는 주리와 지호에게 졌다는 사실에 의미를 싣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제자들이 청출어람 하였으니 자신은 이제 필요 없게 되었다고 가당치도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주리는 찬돌이 죄책감을 크게 느끼지 않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이끌어 내었다. 그리고 근래 찬돌이 지녔던 어두운 표정과 침묵들이 떠올랐다. 만일 찬돌이 다른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상태라면 자신이 대회 참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찬돌은 먼 곳으로 달아나 숨거나 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주리는 마침내 찬돌이 집에 들어 앉아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호야. 이모 나가서 선생님 좀 찾아볼게. 이따가 전화할 테지만 대국 시간 되면 먼저 접속해. 오늘 꼭 이겨야 되는 거 알지?”

지호는 대답이 없었다. 아이는 벌써부터 마음의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주리는 지호를 안심시키고 용기를 북돋아 줄 시간조차 없는 게 안타까웠다. 주리는 지호의 어깨에 손을 잠깐 댄 뒤에 안방으로 가서 노크를 했다.

“들어와라.”

“아빠. 저 좀 나갔다 올게요. 지호는 여기 있을 거예요.”

“이따 대회 있는 거 아니었냐?”

“밖에 나가서 접속하면 돼요. 다녀올게요.”

주리는 집을 나서면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일곱 시 십 분 전이었다. 여덟 시 전에 부천까지 도착할 수 있으려면 서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