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고로 닷컴의 대회 운영 방식은 지극히 편의주의적이었다. 먼저 대국실에선 대국자 외에는 관전자들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창이 없었으며 심지어 대기실에서도 대화창이 없었다. 그리고 자유 게시판 같은 것도 없었다. 따라서 대회 참가자들은 그야말로 조용히 바둑만 두다가 성적표를 들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Q/A 게시판에 들어가 정보를 공유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고, 돌아오는 건 겁나는 위협뿐이었다.

‘본 게시판은 대회 운영과 관련한 판정문제, 서버문제, 아이템 관련 문의, 일정 문의, 환불 문의 등을 위해 마련된 공간입니다. 목적과 관련 없는 글은 임의로 삭제될 수 있으며 2회 이상 혼선을 야기하는 게시자의 경우엔 -아이디 삭제- 조치를 당할 수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 밖에 대회 일정에 있어서도 편의주의는 여전했다. 우선 대회 참가자들은 따로 급수를 정할 수 없었고 오직 승률만을 안고 대회에 나서야 했다. 9월 30일까지 이어지는 예선전의 컷트라인 조건은 50전 이상의 대국수를 채운 가운데 승률이 80%를 넘어야 했다. 그리고 10월 31일까지 진행되는 2차 예선에선 정확히 20전의 대국을 치루는 가운데 승률이 85%를 넘어야 했다. 11월 20일까지 예정된 3차 예선은 10전의 대국을 더 치룬 가운데 2차와 3차를 합친 상위 승률 기록자 300 명만이 남을 수 있었으며, 11월 25일까지 예정된 4차 예선은 토너먼트 과정을 거쳐 단 여덟 명만이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 11월 30일까지는 프로 예선 통과자 여덟 명과 일반 예선 통과자 여덟 명이 뒤섞여서 3판 2선승제로 겨루어 결국 네 명의 본선 진출자를 가리도록 되어 있었다.

 위고로 닷컴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수효의 대회 참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편의주의적인 대회 운영방침을 취하고 있긴 했지만 기회 균등을 위한 장치는 마련해 두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티켓’ 아이템이었다. 즉 모든 대회 참가자들은 2차 예선까지는 두 장의 티켓을 사용하여 2회에 걸쳐서 전적을 초기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티켓 값으로 책정된 7달러라는 액수는 NS 사에서 대회를 이용해 돈벌이를 하려 한다는 소문이 나돌게 하였다. 그렇지만 위고로 닷컴에서 단 한 차례 공지로 밝힌 내용에 대해 모든 사람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티켓 액수가 너무 비싸다는 의견이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티켓의 액수는 여러분께서 대회 일정을 신중하게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높게 책정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티켓 구입을 위해 지불하신 돈은 NGO와 GEO에 전액 기부하기로 약속되어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더 알고 싶은 분들께서는 NS사의 홈페이지에 접속하셔서 회계 담당 법인 C.P Harvest 사의 홈페이지로 찾아가시면 됩니다. -한국 서버 담당자 최창수-’

 위고로 닷컴의 대회 운영 방식에 대해서 논란은 끊이지 않았으나 일반 참가자들에게 기회를 균등하게 주기 위해 배려하고 있는 점은 또 있었다. 그것은 바로 팀 경기의 선택과 개인 경기의 선택에 있어서 제한을 두지 않는 점이었다. 즉 대회에 참가 신청을 내고 아이디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아이디로 개인 경기도 치르면서 동료의 대국실에 참여해서 팀원으로도 활동할 수 있었다. 결국 두 장의 티켓과 두 개의 대진 라인은 프로기사를 제외한 모든 참가자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고, 실력은 있으나 운이 없었다는 변명은 누구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다만 4차 예선부터는 동료들끼리 대결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그 때는 자연히 팀장 결정전으로 받아들이면 될 일이었다.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의 팀원이 되어 다시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4차 예선까지 두 개 이상의 아이디를 진출시킨 팀은 단 한 팀밖에 없었다. 바로 찬돌과 주리와 지호의 팀이었다. 그리고 11월 22일에 치러진 경기에서 주리와 지호와 알파의 협공에 인공지능의 도움 대신 덤 2집을 택한 찬돌은 요석 두 점이 잡히는 맥점을 보지 못해 결국 불계패 하고 말았다.

 이제 팀장은 주리였다. 정확하게는 찬돌이 팀의 리더였으나 끝까지 남은 아이디는 주리의 것이었기 때문에 주리가 팀장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경기 당일 세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었다. 흑을 쥔 찬돌이 경기 내내 고전을 면치 못하였으나 마침내 백대마를 끊고 수상전으로 이끄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러자 주리는 나머지 시간을 모두 사용하면서 변의 백 진영에서 두 집을 내고 살 것인지 수상전을 할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지호는 계속해서 놓아보기를 해서 수상전의 불리한 결과를 내어 놓고 있었다. 알파는 흑이 대마를 끊은 결과로 중앙에서 큰 집모양을 차지한 뒤의 계가 내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흑이 여덟 집을 앞서게 되는 그림이었고 끝내기가 강한 찬돌의 실력을 감안하면 집 차이는 더 벌어질 게 분명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지호는 수상전이 되지 않는 걸 확인한 뒤에 다른 곳에서 묘수가 나올 만한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초읽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이르러 주리는 결국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 한 곳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은 흑으로부터 끊긴 중앙 쪽의 백의 요석이 수상전을 위해 수순이 진행된 뒤에 중앙의 흑돌 요석을 잡아버릴 수 있는 장문의 자리였다.

 지호는 주리에게 ‘장문 봤어요?’ 하는 글을 보내왔다. 그리고 주리가 반응이 없자 지호는 모니터 너머로 주리를 쳐다보았다. 주리는 지호의 시선을 느끼고 쳐다보았다. 지호는 이번엔 눈으로 묻고 있었다. 지호의 표정은 맥점을 보았느냐고 묻고 있는 얼굴이었고 주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주리는 찬돌이 있는 작은 방을 바라보았다. 책상 앞에 앉은 찬돌의 뒷모습이 보였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주리가 수상전을 감행하는 결정을 한 뒤에도 찬돌의 뒷모습은 아무 미동이 없어 보였다.

 지호와 주리는 지난 일 년 내내 그리고 지난 대회 내내 그러했던 것처럼 찬돌과 지도대국을 한다는 생각으로 4차 예선 대국에 집중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수상전으로 전개되자 자신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곳을 찬돌이 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리와 지호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계산해 본 뒤에 확신이 섰다면 그대로 실행하라.’ 는 찬돌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찬돌이 보고 있는 수를 그들이 보지 못하고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호와 주리는 바둑이 유리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싹트는 순간 패망의 씨앗도 함께 싹을 틔우는 일이 많다는 사실 정도는 이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현재 맞선 상대가 적이 아닌 우리 편이라는 사실에 안도하게 되고, 승패를 떠나 그들이 발견하지 못한 묘수를 곧 배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움트는 것은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변 쪽의 수상전이 흑이 한 수 빠르게 되는 결과로 굳어지고 문제의 중앙만 남았을 때 찬돌의 기색이 이상했다. 흑에게 묘수가 감춰져 있었던 게 아닌 백이 앞으로 구사하게 될 맥점을 찬돌이 오히려 못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진행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찬돌은 확신에 찬 빠른 타이밍으로 돌을 놓다가 갑자기 아무런 반응을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찬돌의 흑 쪽에서 불계패를 선언하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찬돌은 정말로 흑의 요석이 잡히게 되는 수를 못 보고 있었던 것이다.

 찬돌은 모니터 상에서 인공지능 레프리가 들어와 대국 종료 선언을 하고 관전자들이 대부분 퇴실한 후에도 작은 방 책상 앞에 앉은 채로 움직임이 없었다. 주리와 지호는 찬돌의 기색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자리에 앉은 채로 기다렸다. 평소의 찬돌은 팀 경기에 기대를 걸고 있는 이상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드는 행위를 경계하고 늘 밝으면서도 진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그리고 언젠가 찬돌이 지도 대국 중에 속수를 놓았을 때도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는 법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데 벌써 5분 가까이 찬돌은 패배를 자책하는 듯 자리에서 미동도 않고 있었다. 주리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들 세 사람 사이의 믿음이 견고하다는 확신을 흔들만한 기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주리는 생각을 더 넓게 펼쳐야 할 필요를 느꼈다. 바둑이란 어두운 공간에서 거미줄 같이 가는 선을 하나 뽑아내어 누가 더 길게 늘여 나갈 수 있는가를 겨루는 게임과도 같다고 하였다. 생각의 힘이 길러지고 다른 사람들보다 길게 생각의 선을 뽑아낼 수 있게 된다면 풀지 못할 숙제가 없다고 찬돌이 말한 적이 있었다. 주리는 우선 찬돌이 대회와 상금에 너무 집착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억측부터 제거하고 싶었다.

 만일 찬돌이 상금을 혼자 차지할 욕심에 휩싸여 계좌번호가 등록된 자신의 아이디를 상실했다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지금 찬돌의 반응은 너무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어차피 세속적인 마음이라는 것은 기회주의적일 수밖에 없으며 다른 기회의 여지가 있다면 그곳으로 즉각 향하기 마련이다. 만일 찬돌의 침묵이 세속적인 이유 때문이었다면 지금쯤 털고 일어나야 했다. 거액의 상금을 움켜쥘 수 있는 기회는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찬돌의 침묵은 길어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무언가 복잡한 숙제를 안고 괴로워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유력한 관점이었다. 머리가 터질 듯이 복잡하고 다른 사람들이 당황하고 있다는 사실도 의식하지 못할 만큼 몰입하게 하는 생각이 무어란 말인가. 주리는 난데없는 지금의 상황이 결코 가볍지 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찬돌이 안쓰러워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주리는 찬돌이 짊어진 마음의 짐이 무엇일까 찾아내기 위해 다시 생각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호는 어른들의 무서운 침묵에 놀라서 침도 삼키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리는 지호까지 챙길 여유가 없었다. 주리는 찬돌과 함께 한 지난 시간들을 되돌아보았다. 찬돌이 주리와 지호 두 사람의 재능을 한꺼번에 발견하고 눈물을 흘렸던 일. 바둑을 배우는 일을 거부하는 주리에게 함께 하는 기쁨을 바둑에서 찾을 수 있다고 설득하던 찬돌의 모습. 아파트 주차장에서 주리가 이유 없이 울 때 그녀의 손을 꼭 잡아주던 찬돌의 손. 그리고 그 후 NS 오픈 세계 바둑 대회에 함께 참가하자고 권하면서 욕심을 완전히 버릴 수 있다면 혹시 우승도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웃던 모습에서 거짓과 가식 따위는 없었다.

 주리는 그들 세 사람 사이의 문제는 절대 아니라는 확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세 사람 이외의 문제가 무어란 말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이어지자 주리는 아차 싶은 느낌과 동시에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 들었다. 셋 이외의 나머지는 존재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끈은 인간 사회를 기묘하게 엮어놓기 마련이다. 주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의문이 심중에서 솟구치고 있었다. 찬돌이 시공 감각마저 상실한 채 괴로워하고 있는 이유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아파트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리는 거실에 마련해놓은 책상 두 개 중에 베란다 방향으로 놓인 책상에 앉아 있었다. 지호는 베란다를 등지고 현관 방향으로 놓인 책상에 앉아 주리의 얼굴이 굳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현관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주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마지막 존재가 입을 열고 있었다.

“경기 끝났니? 지갑을 놓고 나갔지 뭐냐. 아빠 누구 좀 만나고 올 테니까. 늦거든 먼저 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