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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더버그는 뒤늦은 정황설명을 하고 있었고 그 사이 찬돌은 느닷없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 따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찬돌이 대충 감을 잡았을 때 소더버그는 거기에 대한 확인이라도 해 주는 듯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당신의 이름으로 대회 참가신청이 되면 내게 연락을 하게끔 처리해 두었죠. 그런데 마침 난 샤워 중이었지 뭡니까. 뒤늦게 비서가 알려줘서 옷도 못 챙겨 입고 당신에게 채팅을 시도했는데 그 사이 접속을 끊었더군요. 그래서 대회 참가 신청 기록을 뒤져서 전화번호를 찾아냈습니다.”

“아. 네.”

찬돌은 간단하게 답했다. 그러자 소더버그는 찬돌의 아버지 박준의 죽음에 대해 애도를 표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의 일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 때 한국으로 직접 찾아가서 애도를 표해야 했는데 당시에 난 법정 소송에 휘말려 있었어요. 박준 그 친구는 내가 아끼던 직원 중의 하나였는데 그렇게 갑작스레 잃게 되어서 나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찬돌은 일단 신경을 써 주어서 고맙다고 대답하고 소더버그의 다음 말에서는 용건이 나오길 바랬다. 그러자 소더버그도 인사치레는 충분했다고 여긴 듯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거긴 지금 밤이죠? 혹시 괜찮으면 오메가와 게임을 한 번 해볼 생각 없습니까?”

“오메가라면......”

“그래요. 이번 대회에 선수로 참가하게 될 인공지능의 이름이죠. 내 입장에서는 녀석을 대회에 내보내기 전에 마지막 테스트를 해 보고 싶기도 하고 찬돌 군의 실력도 구경해 보고 싶군요. 어때요? 지금 위고로에 접속하면 한국 서버에 방을 만들어 놓겠습니다.”

찬돌은 망설여졌지만 승부가 될 만한 상대라면 언제 어디서든 바둑을 두는 일을 기피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소더버그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좋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찬돌의 손은 마우스를 잡고 있었다. 그러자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던 어지러운 별들이 사라지고 윈도우의 바탕화면에 주리의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의 얼굴은 빛의 이미지일 뿐이었지만 현실이었다. 불한당처럼 닥친 과거는 현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찬돌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하고 있었다. 반면에 현실을 기반으로 한 눈앞에 보이는 주리의 얼굴은 새삼 찬돌을 기분 좋게 하고 있었다. 찬돌은 주리의 이미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열었다. 그리고 그는 주소창에 커서를 위치시킨 뒤 ‘http://www.wegoro.com'이라고 쓰고 나서 엔터키를 눌렀다.

 위고로 닷컴의 한국어 서버에는 이미 대국장 34까지 개설되어 있었다. 접속자 수는 6만 5천 명을 상회하고 있었는데 수치는 계속 올라가는 중이었다. 찬돌은 메인 페이지에 보이는 대국장 34 안에서 방을 개설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모든 대국자들은 영어로 기입된 대화명으로 입실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 대화명이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누군가 아는 사람의 이름을 찾는 건 쉽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들어가 있지 않고 한 사람만 들어가 있는 대국실을 찾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개설된 대국실 중에는 한 사람만 들어가 있는 대국실은 보이지 않았다. 찬돌은 메인 페이지의 위쪽에 위치한 대국장 이동 목록을 클릭하였다. 그러자 대국장 1번부터 대국장 35번까지의 목록이 나타났다. 찬돌은 비로소 소더버그와 오메가가 기다리고 있는 대국실의 위치를 알 것 같았다. 위고로 닷컴은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대국장이 메인 페이지에 뜨게끔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아까 찬돌이 위치해 있던 대국장 34는 입장객이 천 명을 넘어서지 않은 상태였고 2천 명까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은 아직 충분했다. 그래서 찬돌도 대국장 34번에 위치하게 된 것이었는데, 방금 열어 본 대국장 목록에는 대국장 35가 존재하고 있었다. 찬돌은 대국장 35를 클릭하였다. 그러자 메인페이지는 새로운 대국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곳엔 단 하나의 방만이 개설되어 있었다.

 대국장 35의 1번 방에 보이는 한 명의 대기자의 이름은 바로 ‘OMEGA’였다. 찬돌은 먼저 설레는 기분부터 들었다. 오늘 저녁 뉴스에 소개된 오메가를 자신이 홀로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렇지만 조금 전에 그와 통화한 사람은 소더버그가 틀림없었고 오메가는 소더버그가 지난 16년 동안 공을 들여서 탄생시킨 복수의 화신이 분명했다. 그러한 생각이 들자 찬돌은 저절로 침착해졌다. 찬돌은 커서를 이동시켜 오메가의 이름 위에 놓은 뒤 더블 클릭을 하였다. 그러자 화면이 바뀌면서 바둑판 이미지가 나타났고 위고로의 대국실 전경이 펼쳐졌다.

 위고로의 대국실은 기존의 바둑 사이트처럼 화면 좌측에 바둑판이 위치하고 화면 우측에 인터페이스가 위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고로 대국실의 인터페이스는 철저히 단체 경기를 배려한 가운데 구성되어 있었다. 여러 가지 버튼은 한눈에 보아도 팀플레이를 위한 옵션 장치임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하단에 위치한 세 개의 팀원 석에 알파와 베타를 팀원으로 설정할 수 있는 옵션이 인상적이었다. 함께 할 팀원이 없는 사람의 경우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 대국을 조율하고 형세 판단을 할 수 있게끔 한 설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바둑에 대한 경험이 많거나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만이 한 판의 바둑을 정상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현실을 극복하도록 한 보통 사람들을 위한 배려였다.

 어떻게 보면 인공지능의 도움에 의지해서 바둑을 두는 일은 바둑을 두는 의미 자체에서 벗어나는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차피 리더는 대국자 본인이고 결국 대국자의 능력과 판단에 의해 승패가 나뉘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과정들은 바둑에 있어서 좀 더 발전적인 수준을 추구하는 대개의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게 분명했다. 문제는 소더버그가 위고로의 인공지능에 부여해 놓은 바둑 수준이 관건이었다. 만일 일반 대국자들과 함께 하게 될 알파와 베타의 훈수 능력이 1급 미만의 실력이라면 적어도 알파와 베타로 설정된 모든 시도는 해프닝으로 막을 내리게 될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우려는 찬돌이 인터페이스 설정을 알파와 베타의 도움을 받는 것으로 한 뒤 대국을 시작하면서 첫 번째 돌을 놓는 순간 말끔히 씻겨 나가고 있었다.

 알파와 베타는 놀랍게도 하나의 돌을 놓을 때마다 그 의미를 명확한 언어로 규정하고 있었다. 심지어 첫 번째 돌을 놓는 순간부터 ‘귀의 화점 포석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는 설명이 뒤따랐다. 우선 위고로의 대국실에서는 돌을 착점할 때 두 번의 클릭 과정을 거치도록 되어 있었다. 즉 첫 번 째 클릭을 하면 가상의 흐릿한 돌이 놓이게 되고 알파와 베타가 그 돌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평가하는 글이 뒤따랐다. 그리고 가상의 돌이 놓인 같은 위치에서 두 번째 클릭을 하면 착점이 완료되는 것이었다.

 찬돌은 아까 알파와 베타와 팀을 이루어 대국을 하겠다는 설정을 완료하는 순간 오메가의 대국 신청이 왔었던 순간을 돌이켜 보았다. 15분을 대국시간으로 선택하였고 흑백을 결정하기 위해 랜덤으로 돌 가르기 과정을 거친 뒤 찬돌이 흑을 쥐게 되자 덤은 여덟 집 반으로 설정되었다. 찬돌은 그 때 내심 6.5가 아닌 8.5라는 수치가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제 수순이 지속되면서 알파와 베타가 모든 수순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표현들을 접하자 찬돌은 어쩌면 유동적인 덤의 적용이 공평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좀 더 수순이 지속됨에 따라 귀에서 몸싸움이 펼쳐졌고, 알파는 마우스 오른 쪽 버튼을 사용하여 놓아보기를 할 것을 권장하고 있었다. 찬돌은 시키는 대로 마우스 오른 쪽 버튼을 클릭하여 귀에서 벌어지는 몸싸움의 다음 수순을 놓아 보았다. 그러자 알파는 바둑판 위에서 흐릿한 가상의 돌들을 놓아 정석 수순을 보여주면서 정석이 마무리된 후의 모양이 주변 배석에 관련하여 좋은지 나쁜지를 판단하는 설명을 하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선택한 정석이 후수로 끝나게 될지 선수로 끝나게 될지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고 있었다.

 찬돌은 30여 수가 진행된 가운데 인공지능의 개입에 대해 내내 어색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는 마우스에서 손을 뗀 뒤 생각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만일 아까와 같은 방식으로 인공지능이 계속해서 떠들어댈 때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떠한 느낌을 받을 것인가. 저급자의 경우엔 틀림없이 부족한 경험에 대한 보완이 될 것이며 향후 펼쳐지게 될 전반적인 전략 싸움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상급자의 경우엔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자신의 게임 내용에 오류를 최소화 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찬돌은 내내 조용하던 전사 이미지의 베타 로고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이제 바둑이 중반으로 접어들고 전투가 펼쳐지면 대화창에는 베타의 설명들이 나타나면서 베타가 놓아보기를 권장할 게 틀림없었다. 찬돌은 이번엔 생각을 좀 더 먼 곳으로 펼쳐 보았다. 만일 사람들로 구성된 팀이 경기를 하게 된다면 지금 알파와 베타가 자리한 곳에는 다른 팀원들이 들어가서 의견을 내놓고 놓아보기를 직접 해 볼 게 분명했다. 찬돌은 소더버그가 위고로 닷컴에서 구현하고자 하는 전체적인 그림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더버그는 바둑이라는 동양의 게임이 매력적이긴 하나 학문적인 접근을 그대로 답습하고 바둑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에 있어서도 기존의 형태를 그대로 따라서는 서구 사회에 반향을 일으키기가 쉽지 않으리라 판단했을 것 같았다.

 바둑이라는 게임은 정해진 시간 안에 개인과 개인이 서로의 두뇌 회전 능력을 겨루는 행위 이상의 차원이 분명히 존재한다. 바둑은 다양한 형태에 대해 미리 공부를 하여 대비하거나 자신의 대국 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여러 방면에서 훈련을 하고 경험치를 높여 둘 때 승리에 가까워질 수 있기 마련이다. 찬돌은 순간 소더버그가 알파와 베타의 인공지능 기능보다는 팀 플레이에 집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유력하다고 느껴졌다. 소더버그는 늦은 나이에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자신이 아무리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라고 자부할지라도 수학이라는 학문에 있어서는 서른 살이 지나게 되면 누구나 재능을 잃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둑이라는 게임은 지극히 수학적인 원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결국 소더버그는 바둑을 배우면 배울수록 절망감이 커갔을 게 분명했다. 그로서는 남은 여생을 바둑에 몰입한다고 해도 결코 챔피언은 될 수 없을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찬돌은 대국실 안의 대기자 목록을 쳐다보았다. 거기엔 찬돌이 국제 대회용 대화명으로 정한 ‘Coldstone’과 ‘OMEGA’ 그리고 ‘Madonna’ 세 명의 대화명이 있었다. 찬돌은 마돈나라는 대화명을 다시 보면서 어릴 적 소더버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당시에 소더버그는 사이버 세계의 체스 챔피언으로 활약하면서 마돈나라는 아이디를 사용했다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그러고 보니 소더버그는 자신이 애용하는 닉네임으로 체스에 이어 바둑에서도 챔피언이 되고 싶어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찬돌은 소더버그가 팀원으로 택한 사람들이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소더버그라면 동양의 프로 바둑 기사를 용병으로 영입하는 따위의 선택은 안 했을 것 같았다. 아마 그라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영재들을 훈련시키고 바둑의 새로운 영역이라 할 수 있는 팀 경기 자체에 기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찬돌은 소더버그가 아직까지 숨겨둔 카드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찬돌이 어린 시절 벌였던 작은 사건으로 인해 이렇게까지 일이 커져 버렸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었다. 이제 찬돌뿐만 아니라 동양에서 머리 좀 쓴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현대 사회에 혁명적으로 기여한 서양의 컴퓨터 공학과 그 총아라 할 수 있는 ‘오메가’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게다가 서양에서 태동한 새로운 룰에 맞춰 세계 곳곳에서 발굴된 영재들의 협공까지 감당해야 할 운명 앞에 놓인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찬돌은 지금 오메가와의 대국 내용을 지켜보고 있을 소더버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