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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천 북부역 앞의 중앙로를 따라 걷던 찬돌의 머릿속에는 그래프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운명의 그래프였다. 그래프는 상하 진폭이 크고 좌우 간격은 좁았다. 누구나 자신만의 그래프를 가지고 있기 마련이지만 찬돌의 것은 굴곡이 심했다. 어떤 꺾이는 지점은 너무나 날카로웠고 그곳에서 목숨을 부지한 채 선을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었다. 어찌됐건 지금 그래프의 끝은 바닥을 때린 뒤 상승하고 있었다. 그 상승선이 어디까지 뻗어나가게 될지 어느 지점에서 다시 꺾이게 될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찬돌이 네거리의 횡단보도에 도착하자마자 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가 길다며 투덜대던 사람들을 지나쳐 찬돌이 먼저 길을 건넜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지만 찬돌은 아까 떠올렸던 그래프의 끝이 조금 더 올라간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찬돌은 한 시간 전에 헤어진 주리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길을 걷는 도중에 그녀를 연상케 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좋은 기분과 좋은 마음은 결국 주리에게 연결되어 있었다. 누군가를 자주 생각나게끔 하는 것의 정체가 사랑이라면 찬돌은 주리를 사랑하고 있는 게 맞는지도 몰랐다. 사랑의 감정이야 그렇다 치고 찬돌은 주리의 새로운 면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그가 발견한 그녀의 새로운 면은 그들의 사랑이 완성될 수 있도록 크게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이제 며칠 안에 주리와 바둑을 둘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그녀의 기력을 다시 테스트 해본 뒤 몇 가지 질문만 던지면 모든 것이 확실해질 것이었다. 찬돌이 주목하는 부분은 주리가 지호에게 바둑을 가르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녀도 처음 바둑을 접했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건 2년 전의 일이라고 했다. 직장 생활을 하는 사람이 2년 만에 초보자에서 3급의 기력에 오를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것도 바둑 이론서 몇 권을 본 게 전부이고 주로 인터넷에서 개념의 정리와 확장 없이 대국만을 반복했다면 분명 빠른 성장이었다. 그러고 보면 근래에 몇 번의 지도바둑을 통해 주리는 부쩍 실력이 늘고 있었다. 어쩌면 이제 2급으로도 충분할지 몰랐다. 찬돌은 최근에 그녀가 한국기원에서 운영하는 사이버 오로에서 6단으로 바둑을 두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6단에서 좀처럼 5단으로 떨어지지만 않을 수 있다면 약한 2급으로는 쳐줄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체계적인 부분을 보완하고 집중력을 높일 수 있게 된다면 빠른 시일 안에 1급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찬돌과 같은 부류이거나 혹시 그를 뛰어넘는 재능을 지니고 있기라도 한다면 완벽한 운명적인 만남이라고 기대할 만했다. 그 뒤 운명의 그래프가 정점에 치닫고 죽는 날까지 수평을 이룰 수만 있다면 바랄 나위 없이 성공적인 삶을 이루었다 할 것이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빼앗기고 정체 모를 결핍으로 인한 갈증에 고통스러워하던 기억들을 어쩌면 추억으로 묻어둘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찬돌은 주리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그녀의 몸매를 떠올려 보았다. 주리는 아름다웠고 멋이 있었다. 그러한 그녀와 저녁 설거지를 위한 내기 바둑을 벌인다. 웬만한 기전의 타이틀 방어전 못지않은 기보가 매일 저녁 두 사람의 집에서 쌓여간다. 그리고 치열하게 지적 유희를 나눈 두 사람이 밤이 깊어 함께 잠자리에 눕고 사랑을 나눈다. 그것은 완벽한 시나리오였다. 너무나 완벽해서 가슴이 요동치고 눈물이 나온다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지난번에 지호네 집에서 눈물을 흘렸던 이유를 찬돌 자신도 몰랐고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어서 난감했지만 이제는 모든 게 확실했다. 

 거리는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미완의 삶을 연기하는 엑스트라들이 완벽하게 공간을 메우고 있는 듯 보였다. 찬돌은 그 가운데를 지나며 감히 해피앤딩을 꿈꾸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때 찬돌은 중앙극장 건물 앞을 지나고 있었다. 예전에 중앙극장이 있던 건물은 의류 할인 매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찬돌은 그 앞을 지날 때마다 쓸쓸한 기분이 들었었다. 그가 중학생 시절부터 친구들과 함께 무수히 드나들던 중앙극장엔 추억이 많았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 등급 영화를 보려고 들어갔다가 쫓겨난 일 정도는 추억에 들지도 못했고, 극장 복도에서 학교 선배들과 마주쳐서 화장실로 끌려가 맞은 뒤에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웃던 자신의 모습은 그런대로 추억의 앨범에 저장해 둘 만 했다. 그리고 절대로 잊지 못할 추억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소중한 추억은 아니었다. 어쩌면 떨쳐버리고 싶은 기억의 일부분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하지만 추억의 파일은 당사자가 마음대로 이름을 바꾸려 한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돌이켜 보면 부질없을지라도 행복했던 때의 기억이란 언제나 양지에 묻혀 있기 마련인 것이다. 찬돌은 걸음을 멈추고 극장 입구가 있었던 할인매장의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엄마와 아빠의 손을 잡고 극장으로 들어가던 어릴 적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세 사람 모두 웃고 있었고 함께 행복해 했다. 그리고 세 사람의 뒷모습은 어두운 극장 안으로 사라져갔다. 찬돌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실패한 행복과 실패한 가족의 완성이 전염병처럼 뒤 쫓아와서 달라붙기라도 할까봐 걸음이 저절로 빨라지고 있었다. 찬돌은 눅눅한 과거보다는 앞길에 펼쳐진 새로운 미래를 보기를 원했다. 밤공기는 어제보다 더 차가웠고 어제와 다른 행인들이 거리를 지나고 있었다. 그곳은 실재하는 누군가로부터 멀지 않은 곳이었다. 언제든지 전화하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언제라도 찾아가면 모습을 볼 수 있는 여인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찬돌이 조금만 더 노력한다면 그녀와의 간격을 완전한 제로 상태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도 있었다.

 대성병원 앞 교차로엔 횡단보도가 세 개 밖에 없었다. 그런데 찬돌은 하필 횡단보도가 없는 모퉁이에 서 있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서 걷다가 네거리 모퉁이에 도착해서 무심코 보행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찬돌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부천에서 산 지는 어린 시절과 최근 몇 년을 합치면 10년 가까이 되었다. 그런데 중앙로의 중앙 지점이라 할 수 있는 대성병원 네거리에 횡단보도가 세 개 밖에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니 이상했다. 그러고 보면 부천역에서 나와 집으로 향할 때는 언제나 중앙로의 오른 편 인도를 이용했었다. 그리고 대성병원 네거리에 도착한 뒤엔 길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복개천 도로를 따라 갔고 그러면 그의 자취방이 있는 건물이 나왔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인지 중앙로 왼편 인도를 따라 걸었던 것인데 집으로 가기 위해선 도로를 건너야 했다. 그런데 신호등이 직진과 좌회전 동시 신호로 바뀐 뒤에 차들은 중앙로를 가로질러 복개천 도로를 따라 통과하였으나 사람은 갈 수가 없었다. 찬돌은 6차선 도로를 무단횡단을 해야 할지 아니면 횡단보도 세 개를 모두 건너야 원래 가고자 했던 길에 닿을 수 있는 코스를 선택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순간적으로 찬돌은 짜증이 치밀었다. 먼저 시청의 도로 관리 관계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교차로를 이런 구조로 만들어 놓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초, 중등학교 시절 내내 부천에 살면서 부천역과 중앙극장 일대를 꽤 돌아다녔건만 지금 그곳에 횡단보도가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찬돌은 뒤늦게 무단횡단을 결심했다. 바로 앞에 보이는 길 건너편을 가기 위해 세 개의 횡단보도를 돌아서 가기에는 억울했다. 그런데 그가 막 걸음을 떼려는 순간 신호가 바뀌고 말았다. 앞에 보이는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제서 건너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찬돌은 무슨 함정에 빠진 것만 같아 화가 치밀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차도로 한 발 내딛었던 걸음을 거두고 눈앞에 보이는 길 건너편을 아쉽게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처구니없기도 한 작은 사건이 오늘 저녁 내내 좋았던 기분을 망쳐놓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그 무엇이 있어서 사랑의 기쁨을 방해할 수 있단 말인가. 찬돌은 주리와 함께 하는 미래로 향한 여정에 횡단보도 세 개를 돌아가는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심정으로 걸음을 돌려 중앙로의 진행 방향으로 향했다.

 주관적이긴 하지만 한참을 기다리고 나니 첫 번째 신호등이 바뀌고 있었다. 찬돌은 순례자처럼 길을 건넌 뒤에 또 한참을 기다렸다. 다시 신호가 바뀌고 찬돌은 횡단보도 순례를 재개했다. 그리고 다시 한참이 지났다. 결국 마지막 신호는 예정된 색깔로 바뀌었다. 찬돌은 사다리처럼 펼쳐져 놓인 횡단보도를 걸으며 길을 건넜다. 그리고 그가 원래 가고자 했던 예정된 곳에 도착한 순간 운명의 다음 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개막을 알리고 있었다.

 대성병원 사거리의 동남 쪽 모퉁이에는 컴퓨터 판매와 수리를 겸하는 소규모 매장이 있었다. 컴퓨터 가게 안은 불이 꺼진 채 영업을 마친 상태였다. 그렇지만 가게 홍보를 위해서 거리를 향해 놓아 둔 모니터에는 언제나 텔레비전이 켜 있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케이블 TV가 연결된 듯한 채널에선 YTN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고 실외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찬돌은 평소에 그 앞을 지날 때면 무슨 볼 만한 뉴스나 영상이 있을까 해서 한 번쯤은 시선을 돌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찬돌은 괜한 시간을 낭비하고 헛걸음을 반복하고 난 뒤여서인지는 몰라도 바쁠 것도 없는 귀갓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막 컴퓨터 가게를 지나치려는 순간 그의 귀를 파고드는 소리가 있었다. 처음에 그것은 익숙한 몇 개의 단어였다. 바둑, 대회, 인터넷, NS 사 그리고 필 소더버그. 찬돌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필 소더버그라는 이름은 미디어에서 종종 접하곤 하는 이름이었지만 찬돌에게는 남다른 기억이 있었다. 먼저 필 소더버그는 한 때 찬돌의 아버지 박준의 보스였고 언젠가 그의 개인 비행기를 탔던 일은 잊을 수가 없는 기억이었다. 그런데 방금 뉴스에서 필 소더버그 회장의 이름과 바둑이라는 단어가 함께 들렸던 것 같았고 두 단어가 하나의 문장 안에서 나열되는 일은 귀를 의심케 할 만큼 어울리지가 않았다.

 찬돌은 몸을 돌려 뉴스가 나오는 모니터 쪽으로 다가갔다. 모니터에는 여성 앵커가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이 재생되고 있었다. 앵커가 흥미롭다는 표정과 함께 몇 마디 말을 이어간 뒤에 영상은 소더버그 회장의 기자회견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뉴스는 이미 상당부분 진행된 듯 소더버그 회장이 직접 발표하는 내용 부분은 나오지 않았지만 편집된 영상과 함께 아나운서의 설명이 뒤따르고 있었다.

“미국의 세계적인 IT 기업인 네트워크 세이브 사의 필 소더버그 회장은 오늘 오후 AP 통신과의 회견에서 국제 바둑 대회를 개최한다고 밝혔습니다. 대회 명칭은 제 일회 NS 오픈 세계 바둑 대회인데요. 우승 상금이 무려 천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백 삼십 억 원에 이른다고 합니다. 소더버그 회장은 전례 없이 많은 액수인 상금의 상당 부분은 자신의 사비로 충당했다고 말했는데요. 참고로 필 소더버그 회장은 해마다 세계적으로 재산 순위 10위 안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부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그다지 큰 부담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번 대회를 인터넷 상에서 백 퍼센트 치러내기 위해 기반시설에 투자한 금액이 이미 일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도대체 바둑 대회를 치룰 수 있는 기반시설에 우리 돈으로 천 삼백 억 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이 어떻게 쓰일 수 있는 걸까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일단 필 소더버그 회장의 발표에 의하면 대회를 진행하기 위해 필요한 AI 즉 인공지능 프로그램 ‘알파’와 ‘베타’ 그리고 이번 1회 대회부터 선수로 참가하게 될 인공지능 프로그램 ‘오메가’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액수가 투자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이번 NS 오픈 세계 바둑 대회는 네트워크 세이브 사에서 개발한 인공 지능 프로그램과 인간의 대결을 위한 무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만 달러라는 거금의 우승 상금은 홍보 효과를 노린 수단일 수도 있지만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바둑에서 인간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수순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습니다. 대회 일정은 내년 1월 1일부터 각 대륙별로 할당된 서버에 프로와 아마추어에 관계없이 누구나 등록만 하면 대회에 참가할 수 있으며 2월 1 일부터 11월 30일 일까지 10개월에 걸쳐서 전 세계적인 예선 경기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연말에는 월드컵 축구 경기의 본선 대회 운영 방식과 같은 32강 토너먼트 결정전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며 12월 31일에 결승전이 열리도록 할 것이라고 합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인터넷 검색 창에서 NS 오픈 세계 바둑 대회나 위고로라는 단어를 입력하시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다음 뉴스는 날씨 정보입니다.”

 찬돌은 뉴스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뉴스는 일반인들로서도 꽤 놀라운 내용이었지만 바둑인들로서는 충격적이라 할 수 있었다. 먼저 천만 달러라는 우승 상금은 과거 프로복싱이 유행하던 시절에 마이크 타이슨 정도 되는 거물이 세계 타이틀 매치를 벌일 때 받을 수 있었던 거액이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비인기 종목이라 할 수 있는 바둑 대회에 내걸 수 있는 액수 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금액이었다. 현재 세계 기전 중에 가장 높은 상금은 대만에서 열리는 응창기 바둑 대회에서 내건 40만불이었다. 하지만 응씨배라고도 불리는 이 대회는 4년 마다 한 번 씩 열리므로 실제적으로는 최근에 창설된 BC 카드 바둑 대회에서 내건 3억 원의 상금이 가장 컸다. 그리고 그 다음이 LG에서 내건 2억 5천만원, 그 다음이 삼성화재에서 내 건 2억 원 순이었다. 그렇다면 NS 사에서 내건 130억 원에 달하는 상금이 가져올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기존의 세계 기전은 유명무실하게 될 것이고 세계적인 강자들을 비롯한 모든 바둑인들은 이 대회에 올인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돈을 쫓아 불나방처럼 모여든다는 비난을 피할 수 있는 명분도 있지 않은가. 그 동안 슈퍼컴퓨터가 세계 체스 챔피언들은 격파했지만 바둑이라는 영역만큼은 감히 컴퓨터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설 엄두도 낼 수 없다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마침내 천재적인 컴퓨터 공학자로 유명한 필 소더버그가 바둑에서 인간을 꺾을 수 있는 컴퓨터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며 야심차게 그 내용을 선보이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 자체로도 이슈는 충분하지만 서구 사회에서도 드디어 바둑에 관심을 갖고 진지하게 접근하게 되었다는 긍정적인 시각과, 소더버그 회장의 천문학적인 재산이 바둑 보급을 위해 사용된다면 나쁠 게 없다는 주장이 대세를 이루게 될 게 분명했다.

 찬돌의 경우에도 위와 같은 생각이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떠올랐고 나름 정리된 뒤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찬돌이 느끼는 기분은 다른 바둑인들이 느낄 수 있는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찬돌의 기분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한 가지 표현 밖에는 없었다. 그것은 바로 ‘소름끼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표현은 16년 전에 소더버그가 찬돌에게 체스를 졌을 때 이미 사용한 바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소더버그는 찬돌에게 똑 같은 기분을 돌려주고 있었다. 찬돌로서는 그야말로 섬뜩하면서 소름이 끼치는 기분이 들었고 턱이 떨리기까지 했다. 생각해보니 체스를 처음 접하는 찬돌에게 패한 소더버그가 당시 받았을 충격은 적지 않았을 것이었다. 당시에 소더버그 회장은 칼포프인가 하는 체스 세계 챔피언을 인터넷 상에서 만나 꺾은 적이 있다고 말했고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했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체스를 처음 둬 보는 어린 꼬마에게 일격을 맞고 패하였으니 내심 자존심에 큰 타격을 받았을 것이었다. 그런데 16년이 지난 이 순간 소더버그 회장은 찬돌에게 역습을 가하고 있었다. 바둑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그가 바둑을 공부하기 시작한 뒤 컴퓨터 공학이라는 자신의 재능을 더하여 찬돌의 영역으로 뛰어들어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것이었다.

 찬돌은 더 이상 그대로 길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필 소더버그가 찬돌을 비롯하여 동양의 정신세계에 도전장을 던질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인지 당장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아까 뉴스 앵커가 관심이 있는 사람은 ‘위고로’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 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찬돌은 집 쪽으로 향해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곧 그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