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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은 체스와는 완전히 다른 게임이다. 그 밖에 양궁이나 사격, 피겨스케이팅에 못지않을 만큼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되는 스포츠이기도 하다. 바둑이 체스보다 월등한 집중력이 요구되며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더 어렵다고 말한다면 서양인들은 대뜸 불쾌함부터 느낄 테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쉬운 예로 바둑만을 잘 두는 아마추어 고수들과 체스만을 잘 두는 아마추어 고수들을 모아 놓고 한 시간 정도 서로의 종목을 바꿔서 가르쳐주고 연습을 한 뒤에 시합을 벌이면 그 답이 나온다. 바둑만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어느 정도 체스를 두어 나가면서 그래도 그나마 한 판의 대결을 이끌어 갈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체스를 처음 두면서 체스 고수를 이기는 사람도 종종 나오곤 한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체스만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 바둑을 두려 할 때는 체스조차 모르고 있었던 다른 일반인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한 판의 대결을 이끌어가는 게 불가능하다.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다. 바둑은 그만큼 복잡하며 그 종목 안에서 배워야 할 이론과 경험의 분량은 대략 세 개의 외국어를 충분히 배우는 것 못지않다.

바둑을 칭하는 여러 이름이 있지만 한국에서는 ‘수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손으로 나누는 대화라는 뜻인데 ‘수화’와는 다른 의미이지만 수화보다는 어렵지 않으면서도 수화를 배우기 위해 외우고 익혀야 할 분량보다는 공부해야 할 게 많다. 그렇다고 해서 바둑은 선택된 엘리트들만 즐길 수 있거나 따로 필요에 의한 목적이 있는 사람들만 접할 수 있는 마인드 스포츠가 아니다. 처음 배우는 순간부터 실력이 엇비슷한 상대만 앞에 있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으며, 외국어를 배우는 일보다 익히는 과정이 수월하다. 다만 스스로 만족할 만큼 능통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뿐이다.

찬돌과 소더버그 회장의 대결에 있어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초반부터 난타전이 벌어지더니 20수가 넘기도 전에 소더버그가 세 번의 체크를 외쳤고 찬돌은 한 번의 체크를 외쳤는데, 메이트를 인정하고 자신의 킹을 쓰러뜨린 건 소더버그였다. 승부가 끝난 직후 소더버그는 한동안 멍하니 않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주위에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남자들의 승부욕에서 비롯된 대결 따위엔 관심 없다는 듯 여러 가지 용무로 서성이던 여비서 카나에까지 자리에 앉아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오늘 나는 아주 소름끼치는 경험을 하고 말았군.” 소더버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소더버그가 주위의 사람들을 돌아보며 “뭣들 해? 준의 아들한테 축하 좀 해주라고.” 하고 말하자 그제서야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박수를 쳐주는 등 법석을 떨기 시작했다. 박준의 동상처럼 굳어버린 표정이 풀린 것도 그 때였다.

“꼬마가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사실 자네가 방심한 것 같은데. 아닌가?” 하며 콜린이 말하자 소더버그는 쓴 미소를 머금었다.

“초반에 방심을 하긴 했지만 나중엔 아니었어. 열 수를 넘어가면서부터는 나도 필사적이었지.”

“그래? 그렇다면 준의 아들은 정말 대단한 꼬마로군. 어쨌든 소름끼치는 경험이었다니... 자네가 그렇게 진지했을 줄은 몰랐는데.”

콜린의 집요한 질문에 소더버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마치 비밀을 고백 하려는 사람처럼 숨을 한 번 크게 내쉬고는 말을 이어갔다.

“자네들 중에 혹시 인터넷 체스 대회에 자주 접속하는 사람 있나?”

그러자 부하들 중 하나가 대답했다.

“예. 제가 가끔...”

“현재 세계 랭킹 1위 아이디를 기억하고 있나?”

“예. 작년부터 ‘마돈나’ 라는 아이디가 1위를 랭크하고 있는데 승률이 대단합니다!”

소더버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말을 이어갔다.

“사실은 그 마돈나라는 아이디는 내 것이라네. 비록 온라인에서이긴 하지만 유명한 체스 명인들에게도 승률이 뒤지지 않는 실제 체스 세계 챔피언인 셈이지.”

소더버그의 말에 사람들 모두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콜린 역시 마찬가지로 놀란 기색이다가 크게 코웃음을 치며 소더버그를 빈정대기 시작했다.

“하여간 자네 집착은 대단하군. 한동안 과거에 카스파로프를 슈퍼컴퓨터로 꺾은 건 무의미한 일이라는 둥 칼포프만큼은 직접 꺾겠다는 둥 그러더니 결국 직접 체스를 파고든 건가?”

소더버그는 콜린에게만큼은 격이 없이 대한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순순히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었다.

“사실 요즘 몰리하고 사이가 안 좋았던 건 담배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어.”

“그랬군. 그래. 칼포프는 인터넷 대회에 접속하던가?”

“대회에는 나오지 않더군. 하지만 비공식적으론 몇 번 붙은 적이 있었지. 언젠가 상당한 실력을 발휘하는 아이디가 등장했기에 본사 웹 개발부에 해커 출신인 존슨이라는 친구 알지? 그 친구한테 아이피 추적을 시켜서 찾아보니까 칼포프가 사는 동네가 뜨더라고.”

“이겼나?” 하는 콜린의 물음에 소더버그는 희열을 느끼는 표정이 되면서 대답했다. “두 판 연속으로 지더니 접속을 끊은 뒤 아이디를 삭제해버리더군.”

하지만 소더버그의 회상과 희열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문득 시선을 떨구고 아래에 보이는 열한 살짜리 소년을 바라보면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쓸쓸함과 경이가 뒤 섞인 것이었는데 어느 쪽이 더 본심에 가까운지는 소더버그 자신도 몰랐다. 그러다가 소더버그는 찬돌에게 악수를 청하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 때는 이미 얼굴에 인자한 미소가 가득했다.

“찬돌이라고 했니? 네가 체스를 오늘 처음 배웠다는 사실에 난 전율을 금할 수가 없구나!”

찬돌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올려다보다가 일어서서 순순히 소더버그의 손을 맞잡았다. 소더버그는 찬돌의 손을 잡은 채로 말을 이어갔다.

“바둑이라는 게임이 원래 대단한 것인지 네 머리가 특별히 비상한 것인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너의 재능을 소중히 여기고 멋진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좋겠구나.”

찬돌이 “예. 감사합니다. 회장님.” 하고 말하는 순간 소더버그 뒤에 서 있던 박준은 눈물을 다 글썽이고 있었다.

“필이라고 부르렴.”

“예. 필.”

찬돌이 소더버그의 퍼스트네임을 부르는 순간 박준을 비롯한 동료들은 한순간 불꽃같은 질투심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느껴야만 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들 중 누구라도 찬돌이 벌였던 것과 같은 드라마를 만들어 낼만한 자신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소더버그는 박준의 어깨에 팔을 둘러 자신의 가슴 쪽으로 당긴 채 함께 바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유능한 사업가답게 그들 사이에 벌였던 일의 정산을 잊지 않았다.

“헤이. 준. 자네의 한국 지사장 자리 2년은 내가 보장하겠네.”

그러자 평안을 찾은 박준이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고작 2년이요?”

소더버그가 지지 않으려는 듯 박준의 말을 되받아쳤다.

“자네가 체스를 둔 건 아니었잖은가. 원한다면 내기를 걸고 직접 도전을 하든가.”

“어이쿠. 사양하겠습니다.”

‘하하하하.’ 사람들이 웃어대며 박준과 소더버그를 따라 바에 모여들어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박준은 문득 찬돌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찬돌이 수줍은 미소를 지은 채 아빠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박준은 아들을 향해 기분 좋게 웃어주었다. 그리고 곧 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시선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