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좋아 하다보니 산엘 자주 가게 된다.

 또 산행이 잦다보니 이력 또한 제법 붙어가고 있다.

 이력이라는 것도 별것 아니다. 이제야 겨우 산(山)맛을 조금 알아가고 있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산행하면 여럿이 가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혼자 하는 산행도 있다는 것을 아는 정도다. 

 사실 여럿은 여럿대로 좋고 혼자는 혼자대로 좋다. 여럿일 때는 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어 좋고, 혼자일 때는 자연과 나누는 대화가 즐거워서 좋다. 그러나 혼자 하는 산행을 더 좋아하는 까닭은 우선 편해서다. 누구와의 동행은 제약이 많지만 자연과의 동행은 제약이 없다.  

 자연과 친구가 되어 보라. 사전에 약속할 필요도 없고, 가기 싫은 사람 가자고 달랠 필요도 없다. 그저 가고 싶을 때 나서기만 하면 된다. 또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보다는 자연과 나누는 대화가 더 좋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사람이 싫다는 얘기가 아니다. 보다 편하고 진지한 대화가 좋다는 것뿐이다.

 사람과의 대화는 우선 기호와 관심이 달라 화제부터가 맞추기 어렵고, 분위기도 보통은 잡담으로 흐르고 만다. 그러나 자연과의 대화는 화제 고를 걱정도, 잡담이 될 염려도 없다. 그러니까 부담도 없고 막힘도 없다. 그야말로 마음 대로다. 침묵이 길다고 채근하지도 않고, 말이 많다고 나무라지도 않는다. 물어보면 대답하고 고민하면 해답을 준다.

 혹 내가 심각하면 같이 침묵을 지킬 줄도 알며, 관심과 수준이 같으니 화제 또한 궁색하지 않다. 얼마나 편하고 잘 맞는 친구인가? 삶의 지혜는 이런 데서 얻는다. 더구나 퇴직 후에도 뭐가 그리 바쁜지, 미련 없이 벗어 던진 틀에 무엇인가에 다시 갇혀, 덧없이 흘러만 가는 자신을 그나마 잡아주는 기회가 되고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루를 바삐 보내긴 했으나 별로 남는 것 없는 날들과는 달리, 혼자 다녀온 날은 흐뭇하고 생기가 돈다. 자연과 나누는 대화는 시간을 죽이는 산행이 아니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는 산행이 되고 있어서이다. 특히 은퇴했다하여 매일 시간만 죽이고 있는 노구들의 삶에서는 절실한 문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는 동행하는 산행과 혼자 하는 산행을 적절히 배분하는 여유도 부릴 줄 안다. 한번은 여럿이 가게 되면 두 번은 혼자서 궁상을 떤다. 자연과 아무도 몰래 나누는 친밀감을 인간과의 그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러나 혼자 할 때 산에서 만나는 안쓰러워하는 시선들은 어쩔 수가 없다. 한마디로 어떻게 살아왔기에 동행하나 없느냐 다. 같이 사는 사람도 모르는 판인데, 처음 보는 사람이 나를 얼마나 알까싶어 이것도 별로 구애받지 않기로 했다. 다만 나로 하여금 측은한 마음을 갖게 한 그것이 오히려 미안할 뿐이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산 속을 혼자서 걷노라면 외로움은 은밀한 자유를 느끼고, 적막함은 자연의 소리를 듣게 한다. 흐르는 구름에 두둥실 자신을 맡기는 순간이 바로 이때부터인가? 내가 자연이 된 것인지, 자연이 내가 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적막감속에 말없는 대화만 오갈 뿐이다. 

 누가 뒤 따라 오는 것도 몰라 깜짝 놀라기도 하고, 길을 막고 누워있는 설해 목에 머리를 부딪쳐 별을 보고 깜빡 깨어나기도 한다. 길눈은 어두워지나 보이지 않던 세상이 보이면서 화두가 터진다. 나는 주로 묻는 쪽이고 자연은 대답하는 쪽이다. 누구들처럼 못들은 체 하거나 딴전을 피우지도 않는다. 대답도 어김이 없다. 이치부터 잔잔하게 따져 수긍이 가도록 얘기한다. 사건을 통해 해답을 주기도 하고, 현상을 통해 가르쳐 주기도 한다.

 동행들이 있을 때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던 것들이다. 이런 날의 저녁은 흐뭇하다. 뭔가 삶에 대한 행복한 보람을 느끼는 그런 기분이다.  혼자 하는 산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남들에겐 비록 별것 아닐지라도 나에겐 깨달음을 얻어 터트리는 구도자들의 오도송(悟道頌)과도 같은 그런 기쁨이다.

 어제도 혼자 산엘 갔다. 가는 날이 장날인가? 이날엔 호젓한 시간을 별로 갖질 못했다. 의외로 산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근교의 산이기도 했지만 휴일 탓이 더 컸던가 싶었다. 그러나 자주 끊어지긴 했어도 대화는 있었다. 자연은 어떤 조건에서도 배움은 주는 모양이다. 다만 인간들의 마음이 문제인 것 같다.

 이날도 땀이 흥건히 배어나올 무렵 호젓한 시간을 방해하는 한 산객을  만났으나 혼자이고 싶어 먼저 보냈다. 그는 총총히 사라졌으나 얼마 뒤 더 많은 무리가 들이닥쳤다. 사람들이 많아지니 시끄럽고 요란했다. 조그만 것 피하다 덤 티 만난 꼴이다. 차라리 혼자 가는 산객과 동행하는 편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만 남았다. 그러나 마음을 열어놓은 탓인가? 바로 이 아쉬움이 또 배움을 주었다. “그러게 스스로 만들 수 없는 환경이면, 피하기보다 적절하게 활용하는 게 더 낫다” 는 핀잔 같은 것이다.

 또 진달래꽃이 화려하게 물들이고 있는 산협에서는 자연의 위대함보다 그 속에 감추어진 처연함도 함께 느끼게 했다. 느낄 듯 말 듯, 푸른빛 감도는 붉은 색의 정령은 해맑은 빛을 사방에 뿌리지만 피를 토해 빚었다는 꽃말답게 강렬하면서도 어딘가 애틋한 그리움을 속으로 삭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산 속에 감추어 두고 혼자보기가 아깝다는 생각뿐이었다.

 “이 처연한 화려함을 옷감에나 화폭으로 옮길 수는 없을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이때 자연은 또 들어 보라 했다. “색도 생명이 있을 때 제 색을 낼 수 있다”며 “이렇게 살아있는 색을 어떻게 옮길 수가 있느냐?”다. 그래서 영롱한 빛깔은 색의 정령인 색령들의 눈빛인가 보다.

  정말인지 모른다. 색의 아름다움은 영롱함에 있고, 영롱함은 서려있는 기운(氣運) 때문일 게다. 그래서 생명력을 아름다움의 진수라고 하지 않았을까? 아름다움 중에서도 으뜸이 건강미란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오랜만에 한 산행이 조금은 시끄러웠어도 내 남은 인생을 다시 보게 하는, 참으로 좋은 하루였구나, 했다. 역시 혼자 하는 산행이 좋은 것은, 싫거나 좋다는 기호의 문제보다는, 구도자의 서원처럼 천명(天命)을 알고 이순(耳順)에 이르고픈 숙명 같은 욕구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