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전노(守錢奴)는 오늘날의 노랭이요, 구두쇠다. 수전노를 직역하면 돈을 지키는 노예쯤이 될 것이고, 의역하면 돈을 쓸 데에 쓰지 않고 탐하기만 하는 구두쇠의 다른 이름이다.

 수전노란 말은 17세기중엽 프랑스 작가가 발표한 “수전노”란 희곡이 그 시원이라고들 한다. 파리에서도 알부자로 소문난 한 구두쇠영감이 돈을 쌓아놓고도, 또 돈 욕심 때문에 아들은 돈 많은 과부와, 딸은 돈 많은 영감에게 시집보내려 했다니 돈에 대한 탐욕이 보통이 아니었나보다. 뿐만이 아니다.

 19세기 중엽에 영국작가가 발표한 “크리스마스캐럴” 이라는 중편소설도 있다. 인정머리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구두쇠인 “스크루지” 영감이, 크리스마스 전날 밤 동업자의 유령을 만나, 그를 통해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습을 보고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자신을 뉘우치고 비로소 사람다운 마음을 찾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들은 하나같이 수전노를 지탄하면서, 스스로 문제를 찾게도 하고, 또 결과를 제시하여 잘못된 심보를 고치게도 한다. 수전노가 바로 지독한 이기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세상 덕분으로 살아가면서도 세상을 위한 일에는 철저하게 인색하기에 지탄을 받았다는 얘기다.

 엊그제 산행도중 60대 중후반의 건장한 어른들을 만났다. 보기에는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건강한 모습들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한술을 더 떠 이제는 전같이 못하다며, 아니라 하면서도 등산으로 잃어버린 청춘을 찾은 듯 내딛는 발걸음은 장정들의 기운을 느끼게 했다. 순전히 엄살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숨을 고르면서 나눈 얘기는 그들의 모습과는 달리 그리 신선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하루는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놀이와 체력단련이 일과의 전부라고 했다. 놀이에도 체력이 그렇게도 필요한지, 날 좋을 땐 등산으로, 날 궂을 땐 헬스클럽이나 사우나에서 친구들과 어울린다니 노는 것과 체력보전이 삶의 목표인 듯 했다. “이제 이 나이에 무슨 일을 하겠소?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며 세상구경 하면서, 남은 인생, 아끼면서 즐기는 것이지요. 산행 덕분인지 아직은 소주 한 병쯤은” 하고 은근히 자랑까지 하는 모습에서는 노년의 건강이 축복이 아니라, 어딘가 수전노 같은 그리 밝지 않은 감정을 느끼게도 했다.

 할 일은 외면한 채, 즐거움만 쫓아 건강을 소모하는 이들을, 만약 수전노의 작가가 보았다면, 대뜸 수강노(守康奴)란 이름을 붙여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했다. 돈을 쓸 데에 쓰지 않고 탐하기만 하는 구두쇠처럼, 건강을 쓸 데에 쓰지 않고 탐하기만 하는 또 다른 구두쇠, 수강노란 상념이 스치면서 서글픈 아쉬움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얼마 전에 나 역시 직장을 그만두고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다. 지금껏 발목을 잡고 있던, 사회적인 의무감에서도 홀가분하게 벗어나 있었고, 예전처럼 기간 안에 해야 할 일도, 길을 찾아 고민해야할 과제도 없었다. 그저 햇볕은 밝고, 마음은 하늘을 나를 그럴 때였다. 그런데도 나는 이를 느끼질 못했다.

 의롭지 못했던 권력에 밀려났다는 불쾌감과 꼭 했어야 할 일을 못 다한 미련 때문이었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매달려 마음만 끓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 때문인지 평생을 일해 왔으니 나 역시 퇴직은 곧 쉬고 놀며 여생을 즐기는, 다시 말해 건강과 시간을 소비하는 것을 당연한 보상쯤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들의 모습에서 나의 수강노적인 인생을 본 것이다. 나 역시 아무 하는 일없이 그저 한일월(閑日月)하면서 건강만을 쫓아 산행을 즐기고 있는 내 모습에서였다.

 인간의 역사는 창조의 역사라고 했다. 그래서 뭔가를 만들어 낸 것이 소위 문명이란 것이 아닌가 싶었고, 여기에는 에너지(건강)가 동력이 되어 인간의 역사를 이어오지 않았나 싶었다.

 그래서 창조하는 일은 인생의 본질이며 건강의 사명이구나 했고, 일할 나이(때)가 따로 있고, 쉴 나이(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란 것도 옳은 말이구나 했다. 그래서 언제든지 건강만 허락되면 세상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얘기도 진실이구나 했다. 이게 바로 삶의 참 모습이 아닐까 해서였다.

 그렇다면 우리가 쉰다고 하는 것은 건강을 잃었거나 휴식을 취할 때뿐이어야 하고, 그래서 건강한 사람이 할일이 없다면, 인성이 병든 지식처럼 거꾸로 세상을 해치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세상이 있었기에 내가 살아 올 수 있었고, 그 삶이 있었기에 희노애락이란 사는 맛도 함께할 수가 있지 않았을까?

 내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그야말로 이 귀한 세상 때문이었다면, 이런 세상을 어찌 못 본 척 할 수가 있겠으며 내 건강만 아낄 수가 있을까 싶었다. 도무지 말조차 되지 않는 일을 무심히 지내온 염치가 창피했고, 부끄럽기만 했다.

 더구나 지금의 세상은 옛날과 달리, 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아진 세상이 되었다. 손보고 챙겨야 할 일들이 지천인 세상이 되어버렸다는 얘기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 인간이 남긴 이기심의 상처이고, 또 우리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도 수강노적인 삶이라한다면, 누가 이해하고 동조할 수가 있을까 싶었다. 더구나 수전노는 돈이라도 남길 수 있지만, 수강노는 수전노와 달리 아무 것도 남길 게 없다. 수전노보다 더 못나고 불쌍한 인간들이 바로 수강노 같은 사람들이구나, 했다.

 이어지는 상념이 갑자기 늘어진 마음을 조급하게 조여 왔다. 내 나이 또한, 떠오르는 청춘이 아니라 소위 살만큼 다 산, 지금은 지는 해가 되어 서산마루에 걸려 있는 꼴이고 보니, 남아있는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아서이다. 문득, 여보게 저승 갈 때 무얼 가져가나 라고 묻던 스님이 생각난다. 자신을 지배해온 운명은 스스로 지어온 업(業)으로 이루어진다는 얘기도 가슴을 쳤고, 이승은 내 저승의 업으로 살아왔고, 가야할 저승은 내 이승의 업으로 간다는 얘기도 가슴속 깊이 절절하게 울려왔다.

 여태까지 저쪽 편에서 멀건이 건너보던 것 같았던 스크루지의 과거와 현재가, 수강노들의  현재와 미래가 되어 꼭 되풀이 될 것 같은 생각은 결코 이런 울림 때문만은 아닐 것 같았다. 어찌되었거나 수전노나 수강노는, 좋은 이웃이 될 수는 없어도, 나를 가르치는 좋은 선생은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