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아흔세 살 된 인자하신 할머니 한 분이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하여 가벼운 마음으로 문상을 다녀온 일이 있었다. 

 원래 잠깐의 이별도 슬프고 안타까운 일인데 영원한 이별이 되고 보면 그 슬픔이 오죽하랴. 그러나 천수를 누린 죽음만큼은 소위 호상(好喪)이라 하여 상주나 상객 모두 가벼운 마음으로 상례를 치르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날의 상주는 결코 가벼운 슬픔이 아니었다. 진실은 말이 될 때 이미 진실이 아니라고 해서인가? 가슴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절제된 오열이 주변에 전이되어 함께 울지 않은 이가 없게도 했다.

 “일자무식이요 농사밖에 모르는 할머니였지만 세상에 오신 소명을 누구보다 훌륭히 마치고 가셨기에 더 가슴 아프다” 고 했고 “춥고 배고픈 시절에 이 세상에 오셔서 아들 하나를 낳아, 오직 두 손 하나로 정직하고 근면한 농부로 길러 냈으며, 또 할머니의 흙 묻은 손과 사랑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 손자는 훌륭하게 성장하여 대학 강단에서 그 할미의 유훈을 자랑스럽게 강설하고 있는데 어찌 가슴 아픈 이별이 아니냐.” 고도 했다. 바로 망자의 손자가 한 체읍이었다.

 이날 문상 갔다가 느닷없이 돌이켜 생각해본 것이 “존재에 대한 소명” 과 “세상사랑(利他)”이었다. 사람의 인격이 그 사람의 지위나 지식과는 무관하듯 배움의 대상 또한 경륜이나 지식과는 무관한 것인가 보다. 그래서 배움은 대상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배우는 자의 자세가 문제가 된다고 했나 보다. 셋이 길을 가도 그 중에 스승이 있다고 한 얘기도 이런 얘긴가 싶다.    

 정말로 세상의 모든 존재에게 뭔가 부여받은 소명이 있다면, 결코 짧지 않은 세월동안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나의 소명은 무엇이고 제대로 해 내기는 했는지 겁부터 난다. 더구나 지금은 할 일을 다 한 후에 뒷전에 물러나 있는 상태가 아닌가?

 만약 60갑자까지 한바퀴 돌고 온 그간의 내 삶이 오직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다면, 은퇴한 지금은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뭔가 하고 싶다 해도 할 수 있는 기력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저기 다가오는 인생의 끝자락을 멀건이 건너다보면서도 아직도 무엇인가에 쫓기듯 인생의 지락만 생각하고 있는 꼴이란 스스로 한심한 존재로 만들기에 충분한것 같기만 하다.

 시간이 별로 없는데도 뭔가 해야 할 일은 제쳐두고 엉뚱한 짓만 하고 있는 듯한 불안이 더 답답하다. 이대로 가다간 누구처럼 저승 갈 때 가져갈 게 하나도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기(利己)로 굳어진 개인주의가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상식처럼 보편화된 요즘, 그래도, 자신의 것은 물론 할미의 소명까지 볼 수 있었던 지성은,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슬픔 못지않게 남다르다 싶었다.

 아들 같은 젊은이에게서 받은 놀라움이었기에 정신없이 살고 있는 내 삶에의 충격이 더 크게 다가온 듯 했다.

 과연 내 생명의 소명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