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분수(分數)라는 게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사전에서는 이 분수를 자기 신분에 알맞는 분한(分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분수를 알아야 실패도, 어려움도, 그리고 망신도 당하지 않는다하여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꼭 알고 지켜야 할 덕목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자기에게 부여된 분한 같은 것이 분수라고 한다면 이 분수는 비단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물체에도 이미 주어져있는 운명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를테면 식물에겐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도 분수라고 할 수 있겠고, 동물들은 사람과 달리 지적능력이 낮다는 것도 분수라 할 수 있겠다. 사람의 경우에는 어떠한 노력도 한계가 있다는 얘기는 또 어떨까?

 인간들의 삶에는 하면 된다는 진취적인 기상도 필요하지만, 해도 안 되는 일이 더 많은 게 세상사라는 처세적인 교훈도 때로는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분수를 자신에게 주어진 분한이라고 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격언도 그래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고 해서 불확실한 분수로 노력하는 사람들의 기상이 꺾이어서도 안 되고, 개으름뱅이나 약자들의 변명이나 도피처가 되어서도 안 된다. 다만 타고난 운명과, 후천적으로 훈련된 인간의 의지 사이에서, 오직 자신의 길을 슬기롭게 찾아내는 지혜가 중요하다는 얘기로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분수는 자신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행복의 씨앗이란 말이 맞기는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얼마 전 내가 입원했던 병실에는 문병객이 많았다. 6인실 병실이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겠지만 나를 포함해서 세 환자가 특별히 많았다. 그런데 문병객의 유형이 조금씩 달랐다. 나를 찾아오는 문병객은 자식들이나 친척은 없고 오직 내 일상을 통해 연을 맺은 친구나 지인들뿐이었다. 그런데 내 옆 침대는 나와 달리 친구나 이웃들은 통 보이지 않고, 환자의 자녀들뿐이었다. 어린 손자들이 함께 와서 재롱을 부릴 땐 장가들지 못한 내 자식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여기에서 나는, 문병객이 지인들뿐인 나는 소위 자식농사에 문제가 있구나했고, 문병객이 자녀들뿐인 내 옆 침대는 사회생활이나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이런 상념들이 심각한 물음이 되어서 스스로 반성해 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폭넓게 얽혀가고 있는 복잡한 인생을 하나의 사건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지만, 문병객 때문에 만난 이번 물음에 대해서는 분수로 하는 대답도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자식이 없거나 친척이 없는 것은 아니다. 큰놈이 애초부터 나와 함께 이곳에서 소시민으로 살아갈 생각만 했어도, 이렇게 쓸쓸한 꼴을 보일리가 없었고, 애초부터 내 경제력을 알고 그랬는지는 몰라도, 이곳에서 장학금으로 공부하던 작은 놈은 한해 겨울, 미국서 공부하는 사촌을 보고 와서는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해서, 대출까지 받으면서 서울로 유학을 보내지만 않았어도, 아무 걱정 없이 정말 편한 마음으로 대학공부를 시키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서로가 분수만 알았던들 이렇게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가 있었을 것이란 얘기다. 자식 놈은 자식 놈대로 먹고 자는 것부터가 편리했을 것이고, 나는 나대로 객지에 혼자 가있는 자식 놈 걱정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게 다, 분수를 뛰어넘은 자식 농사의 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한편, 내 옆 침대처럼 자식 농사는 잘 지었어도, 누구 하나 찾아오는 친구나 이웃이 없다는 것은 또 다른 불행이 아닐까 싶다. 사회적 동물이란 인간이, 사회성을 외면한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자식들은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기도 했다. 이웃이 있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을 모르고, 내가 있기에 이웃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할 때 인간의 불행한 역사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너편 침대의 한 환자는 자녀들도 많았고, 지인들도 많았다. 다 성장한 자녀들이 일가를 이루어 손자들과 함께 와도 병실이 비좁은데, 웬 지인들은 또 그렇게 많은지, 마을 사람들은 아예 두서넛씩 나누어서는 시간차로 하루 종일 찾아오고 있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래서 병실이 복잡하기는 했어도, 보기도 좋았고 부럽기도 했다.

 이 환자는 양쪽 다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자식 농사도 잘 지었고 인간관계도 좋아 보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인생을 참으로 잘 살아온 분 같았다. 그냥 보기에도 말수도 적고 온화하며 푸근해 보였다. 나이도 지긋했지만 누구에게든 거부감보다는 다가서고 싶은 느낌을 주었고, 직업도 까다롭지 않은 농사짓는 분이었다. 만약에 좀 배웠다는 분이었다면 이런 편안한 기운을 풍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친구도, 이웃들도, 위 아랫사람 모두가 다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되지도 못했을 것이란 생각도 해 본다. 정직하고 겸손하며 온화하게 살아온 표본이 따로 없는 것 같았다. 자식들에겐 특별히 주문한 것도 없었을 것 같았고, 남보다 더 잘 키우겠다고 나서서 설치는 그런 형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자식들은 정직하게 살아가는 부모의 모습에서 스스로 예절을 아는 인간이 되었고, 삶도 스스로 개척해 당당한 사회 일원이 된 것 같았다. 시세말로 크게 출세한 것 같지는 않아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며 반듯하게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처럼 보였다. 희소한 문화재를 보는 것 같았다. 평범한 것 같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구나, 했고,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성공한 인생, 훌륭한 인생이라 하는구나했다.

 만일 이분들이 자신들의 농사를 비관하면서 농부가 되지 말라고 지나치게 훈도했다면, 또 자신들이 못 배운 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억지라도 부렸다면, 자식들은 소위 출세는 했을지는 몰라도 이런 행복을 결코 만나지 못했을 것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런 게 바로 참가정의 행복이요, 또 행복의 분수인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따라 병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석양의 낙조가 구름과 산과 강물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있다. 서서히 세상을 거두는 낙조 따라, 나도 하루 종일 움켜쥐고 있던 내 하루의 삶도 손에서 풀어놓아 본다. 참으로 편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풀어 놓은 게 아니라 뒤늦게 알아차린 내 분수 덕분이 아닌가도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