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ories... <제 5 회> | 나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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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라81 신화같은 사랑

Memories... <제 5 회>

2008-12-18 오후 11:50 조회 3938추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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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섭은 그의 말대로 고개를 돌리자 흠칫 놀랬다.

“누구? 혜린이? 네가 좋아한다던 얘가 혜린이란 말이야?””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녀의 이름에 현욱은 어리둥절했다.

“네가 어떻게 알아?”

현욱이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영섭은 웃어댔다.

“야, 신현욱! 지금 나랑 장난해? 어떻게 같은 과 동기를 모를 수가 있어?”
“같은 과 동기? 정말 우리 과였던 말이야?”
“하여튼 간에 네가 수업 말고는 학교생활에 도통 관심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그러게 술자리나 모임 같은 거 있으면 얼굴 좀 비추고 그러면 얼마나 좋아? 너, 우리 신입생 때도…”

영섭은 계속 중얼댔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현욱의 눈길은 혜린에게 완전히 고정되었다. 강의가 시작되어도 필기나 겨우 했지, 교수의 말이나 교재의 내용 따윈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비록 당장 현욱의 눈에 비치는 거라곤 그녀의 뒷모습뿐이지만, 지난 학기 때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그녀와 마주치고 싶은 마음에 무모한 기다림을 생각한다면 지금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더구나 그녀와 같은 과라고 하니 앞으로 얼마나 같은 강의실에서 마주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처럼 쓸데없는 기다림 따윈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녀와 마주할 수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현욱의 얼굴엔 웃음이 묻어났다. 이를 놓칠세라 영섭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렇게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와? 혜린이를 정말 많이 좋아하는가 보네?”

현욱은 쑥스러운 듯 헛기침만 해댔다. 영섭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하긴, 혜린이 정도면 정말 예쁜 편이지! 나도 신입생 환영회 때 보고 홀딱 반해버릴 정도였으니깐!”

현욱은 잠시 웃음을 거두고 의심의 눈초리로 영섭을 쏘아붙였다. 영섭은 손사래까지 치며 완강히 부인했다.

“임마, 나는 이미 임자 있는 몸이라는 거 알잖아. 윤희가 알면 그 날로 죽음이야, 죽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혜린이를 몰래 흠모하는 사내들이라면 너 말고도 꽤 되걸. 누가 봐도 저렇게 예쁜데 집적되는 인간 하나 없지 않을거 아냐? 혹시 모르지, 이미 임자가 있을지도…”

하긴, 저렇게 청초하고 수련한 혜린에게 다가간 남자가 없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치 않는 문제였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미 혜린을 사랑하는, 그리고 혜린이 사랑하고 있는 상대가 있을 것이란 생각까지는 차마 못했다는 것이었다.

“하긴, 그럴 수도…”

현욱은 금세 풀이 죽었다.

“새끼, 또 소심하게 군다. 그럴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렇다는 건 아니잖아. 뭘 그렇게 지레 겁먹어? 그보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저번에는 멍청하게 꾸물거리다 말도 붙여보지도 못했다며? 더 늦기 전에 고백해봐. 아니면 같은 과라는 것도 알게 됐으니깐 친구로 접근해보던가?”

현욱은 펜을 잠시 내려놓고는 고개를 숙이곤 머리를 감쌌다.

“글쎄… 지금 남자친구가 없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있는 상태에서 고백한다면… 정말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솔직히 친구로 접근하는 것도 좀 그래. 내 마음은 사랑인데, 우정이란 거짓감정으로 그 사람에게 다가가는 건 내 감정을 속이는 짓이고, 그 사람에 대한 진심을 배신하는 거잖아. 아무튼 지금 당장은 잘 모르겠어. 지금은 이렇게 뒷모습만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걸.”

현욱은 고개를 들어 혜린을 향했다. 보라색 코트 아래로 자연스레 흘러내린 검은 생머리… 여전히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앞으로 혜린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어떻게 진심을 보여줄지는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우연이나 기나긴 기다림도 필요 없었다. 3학점 강의다 보니 일주일에 두 번은 무조건 그녀를 볼 수 있게 됐다. 지금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다시 현욱의 얼굴엔 미소가 감돌았다.

그렇게 혜린을 다시 만난 그 순간부터 현욱에게 학교생활은 그야말로 활력소였다. 게다가 운 좋게도 혜린과 수강과목이 세 과목이나 동일해 일주일에 세 번은 혜린을 볼 수 있었다. 물론 강의실 맨 뒷자리에서 그녀가 강의실에 들어 왔을 때나 혹은 강의가 끝나고 강의실을 벗어날 때, 그리고 수업할 때의 뒷모습이 고작이었지만 아직은 그것으로나마 만족했다.
반면 영섭은 현욱의 그런 태도가 답답한 나머지 채근거리기 일수였다.

“혜린이가 그렇게 좋아? 근데 언제까지 그렇게 지켜보기만 할래? 말이라도 좀 붙여봐. 계속 지켜보기만 할 거야? 그렇게 해서 언제 친해지고, 언제 고백하고, 언제 사귈 건데?”
“나도 마음만은 지금 당장이라도 고백하고 싶어. 근데 나도 그 사람에 대해서 그다지 아는 게 없는데 그 사람은 오죽하겠니? 이런 상태에서 내가 그 사람에게 고백한다 한들 아무 소용없다는 건 뻔한 사실이라고. 물론 전에 네가 말한대로 친구로 접근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1학년 때는 같은 학과인줄도 몰랐던 사이였는데 이제 와서 느닷없이 친한 척 하는 건 더 웃기잖아?”
“얼씨구! 그래도 은근히 급하긴 급한가보네? 저번에는 혜린이하고 친구로 지내는 건 네 감정을 속이는 거라고 어쩌구 저쩌구 하더니 벌써 그런 생각도 해봤네. 근데 꼭 그렇게까지 비약 시킬 필요는 없잖아. 세상 대부분 커플들이 다 그렇게 시작하지 않아? 친구, 친구하다가 자기가 될 수도 있고 오빠, 오빠 하다가도 자기가 될 수 있는 거잖아? 꼭 처음부터 쟤는 친구다. 쟤는 오빠다. 쟤는 사랑이다. 이렇게 구분 짓는 사람은 없다고. 그냥 지나가다 보거나 아니면 다가가서 안녕이란 말만 해도 어디야? 그렇게 인사부터 트고 차근차근 친해지는 거지! 물론 그 방법이 너한테도 가장 이상적이고 현실적이라고 생각해. 솔직히 요즘 같은 시대에 ‘첫 눈에 반했습니다’라는 식의 순정만화 같은 고백은 아니라는 거야. 앞으로 혜린이하고 마주치면… 아니, 일부러라도 마주쳐서 인사라도 해보란 말이야”

현욱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주치기만 해도 떨려서 죽겠는데 인사는 무슨…”
“나 참, 그냥 인사하면 되는 거 가지고 뭘 그렇게 소심하게 그러는지…

영섭은 시계를 봤다. 수업이 시작하려면 1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아직 시간 있네. 이 형님이 지극히 소심한 널 위해 직접 몸소 보여줄 테니 잘 봐둬!”
“뭐? 지금 무슨…”

현욱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영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태연히 걸어 나가더니 혜린은 물론 친구들에게도 천연덕스럽게 인사했다. 현욱은 자기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그저 신기하게 쳐다봤다. 영섭의 말에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친구들은 물론 혜린까지 손으로 입을 가리면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혜린이 원래 웃음이 많은 성격인지 영섭이 정말 웃긴 얘기라도 하는지 힘껏 귀를 기울여보지만, 당연히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궁금증만 더욱 더 자아냈고 어서 영섭이 돌아오기만을 고대했다. 하지만 영섭은 한술 더 떠 그렇게 탐나던 혜린의 전화번호라도 얻으려는 듯 불쑥 휴대전화를 혜린에게 건넸다. 더욱이 혜린은 어떠한 거리낌도 없이 버튼을 눌러줬다.

순간 현욱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정작 자신은 혜린에게 인사를 하거나 전화번호를 물어보기는커녕 지난 5개월 동안 제대로 다가가지도 못했다. 그저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그녀에 대한 마음을 겨우 달랬는데 영섭은 그걸 단 몇 분만에 해내는 것을 보니 자신이 더욱 한심스러웠다.

영섭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돌아오더니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는 전화번호를 들이 내밀었다. 필히 혜린의 것이 분명했다.

“어때? 탐나지?”

현욱은 애써 딴청을 피웠다.

“아니, 별로. 아직 날 알지도 못하는데 전화번호는 알아서 뭐하겠니? 설사 전화한다고 해도 이상한 놈으로 취급당할게 뻔한데…”
“네 놈이 아직 배가 불렀구나. 그럼 말고.”

영섭은 얄밉게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현욱은 조금은 아쉬운지 슬쩍 눈이 돌아갈 뻔했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근데 무슨 얘기 했어?”
“그냥 별 거 없었어. 너한테 본보기를 보여주려고 한 것뿐이지. 뭐, 앞으로 이런저런 같은 수업 들으니깐 정보공유도 하고 그러자 그랬지. 그래서 전화번호 가르쳐달라고 했고.”
“그게 다야?”
“그럼 그게 다지. 너처럼 혜린이한테 특별한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괜한 뻐꾸기 날릴 필요는 없잖아. 그러니깐 너도 우선 너의 그 특별한 감정을 너무 앞세워서 의기소침하지 말고 먼저 친해지려는 생각으로 다가가는 게 낫다니깐. 그래서 조금씩조금씩 너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멋지게 고백 한 방을 날려줘야 넘어가지, 너처럼 단 번에 고백해서 하려면 오히려 무리수도 많고 역효과만 난다고. 내 말대로 우선 동기니깐 그 명목으로 조금씩 친해져봐.”

현욱은 수긍하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영섭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런 것 같은 게 아니라 그런 거라고. 내가 연애는 너보단 한참 선배잖아.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확실한 계획과 철저한 전략으로 그 상대의 마음을 공략해야지, 우연찮은 만남이나 기회로 그러는 건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가능하다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현실이야! 아주 냉혹하고 냉정한 현실이지! 내가 한 가지만 물어볼게. 너 한혜린 정말 좋아해? 사랑해?”

현욱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응!”
“하루빨리 혜린이랑 사귀고 싶지?”

이번에도 현욱은 단호했다.

“당연하지!”
“그래, 지금 중요한 건 네가 전에 말한 것처럼 자기 진심을 속이니 어쩌니 하는 것 보다 하루빨리 혜린을 네 여자로 만드는 게 더 중요한 거란 말이야!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혜린이에 대한 네 사랑이란 감정만 진심이면 되잖아. 거듭 말하지만 그 방법이나 수단은 그저 네 진심을 전해줄 도구일 뿐이지, 진심 그 자체는 될 수 없다고.”

현욱은 잠시 골몰하더니 영섭의 말을 완전 수긍한 듯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영섭은 문득 다른 생각이 났는지 가볍게 손을 마주쳤다.

“참! 이번 주 금요일에 신입생 환영회가 있는데 참석할거지?”

현욱은 금세 표정을 찌푸렸다.

“작년에 내 신입생 환영회도 안갔는데 이번엔 간다는 건 더 우습지 않아? 그냥 집에 일찍 갈래.”
“좀 학과 일에 참여도 하고 관심도 가지고 그래라. 네가 작년에 왔어봐. 그러면 당연히 혜린이도 봤을 테고 그럼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혹시 알아? 지금쯤 CC가 되어있었을 줄… 더구나 혜린이도 온다잖아.”

순간 현욱은 솔깃했다.

“정말?”
“그래, 좀 전에 그러더라. 솔직히 이번만큼 아주 자연스럽고 확실한 기회가 어딨어? 이참에 너의 존재감을 확실히 심어주라고!”

현욱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힘주어 말했다.

“좋아! 확실하게 심어주겠어!”

현욱의 자신감에 영섭은 호탕하게 웃으며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그런 자신감! 좋다, 좋아!”

현욱은 어느덧 혜린을 바라보았다.
그때 한 여학생이 강의실로 들어왔고 혜린을 보자 반가운 듯 손을 흔들었다. 혜린도 반가운지 왼손을 들며 인사했다. 현욱은 눈에 그녀의 왼손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그녀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가 있지는 않을까?

금세 긴장된 표정으로 눈을 찌푸리면서까지 그녀의 왼손에 집중했다. 다행히 그녀의 왼손에는, 특히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는 어떠한 반짝임도 없었다.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기에 반지의 유무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확실히 반지는 없었다. 최소한 교제하고 있는 남자는 없는 것으로 여겨지니 최소한 그녀의 ‘애인’이란 커다란 장애물에 봉착해 허우적댈 필요는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는지 괜히 몸이 축 늘어진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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