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벽돌을 네귀퉁이에 쌓아놓고 두텁고 넓은 나무판을 올려놓은 나의 책상옆에는 언제나 바둑판 하나가 덩그런하다. 그것으로 누군가와 바둑두어본지 까마득하지만 19로의 격선(格線)은 전등빛을 반사하며 침묵하고있다.나의 책상위에는 인류가 출현한 후 가장 오래된 책중의 하나인 주역이 있다.

나는 책읽기를 좋아한다. 독서가 아니면 오두막히 창으로 보이는 앞산을 몇시간이고 바라본다. 독서와  생각은 나를 살게하는 힘이다. 나는 그 시간을 통해 나를 부르는 것들과 만난다. 그들은 과묵(寡默)과 낡은 옷으로 거지꼴에 다름아니지만 나는 그들과 언문언(言文言)으로 대화하며 하루 또 하루를 보낸다.

하루는 시간(時間)이다. 시간은 때의 사이, 때의 공간에 줄을 그어놓은것에 불과하지만 나의 시간은 이 작은 시골집의 골방에도 생성하고 소멸한다.

주역은 시간을 말하는 책이다. 주역은 시간을 빌려 몸을 의탁하고 달리는 시간의 불청객들인 인간에게 시간의 모습과 의미인 무의미(無意味)를 보여준다. 시간은 무정하다. 주역은 문자로 된 책이다. 주역은 문자를 통해 시간의 색감과 느낌을 전해준다. 역(易)은 말로 행위를 다  말할수 없고 문자로 사실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書不盡言言不盡事)했다. 그말은 주역 스스로 만능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주역만큼이나 오래된 것이 바둑이다. 바둑은 주역이 만들어질 당시의 고대사에도 나타난다. 나는 주역을 잘 모르고 바둑도 잘 모른다. 그러나 나는 오래된 것들과 친하다. 초사 산귀속의 무당을 사랑하고 주역속의 수레를 타고 장가가던 귀신도 좋아한다. 바둑을 짝사랑하는 이유는 나만의 비밀이다.

삶은 언제나 세계속에서 부조화하다. 개인적 삶이 공동체의 삶속에서 부조화하지 않다면 그거야말로 문제일것이다. 어느시대 어느 사회에서도 인간은 세계와 늘상 충돌하고 불화한다. 인간이 존재라면 시간은 존재와 세계를 끌어안고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게 다스린다. 시간은 시대라는 편리한 장막으로 이것들을 한곳에 가두기도 하고 풀어 놓기도 한다.

시대(時代)란 장막은 기실 시간의 입장에서 볼때 인간이 땅에 그어 놓은 금에 불과하지만 시간을 살고 있는 인간들은 마음의 금이라도 그어놓아야 편안함을 얻는 모양이다. 시간은 없는 것이기도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을 기필코 표현하겠다는 문자는 재현과 재구성으로 나타난다. 문학으로 재현하고 역사로 재구성하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주역도 말하듯 존재가 시간속에서 했던 일을 재현하고 재구성한다는 것은 실현불가다. 존재를 복제할 수 없듯 존재의 일상을 재현할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얼마전 지인의 도움으로 중국에가 바둑관계 자료를 많이 복사를 해온적이있다. 그중에서 황룡사와 서성우의 기보를 바둑판위에 놓아본다. 바둑수가 높아서가 아니다. 기보가 있어 16세기 사람들의 바둑을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바둑알을 다시 쓸어 담는다. 백돌 하나가 화점에서 버팅기고 있다. 전등빛을 반사하는 백돌 한점...  저것도 존재이며 삶일수 있을까.

나의 바둑수는 졸렬하지만 바둑의 시간과는 조금 친하다. 나는 바둑을 통해서 시간의 저쪽을 조금 알았다. 바둑 관계의 옛 사료를 좇으며 엿본것이 있기때문이다. 바둑판은 시간이고 바둑알이 존재라면. 시간속에 놓여진 존재는 우리들이 말하는 개인의 삶이고 자아일것이다. 시간은 존재들에게 희노애락을 주는 극장용 필름이다. 시간은 존재들이 붙어살며 필름에 자국으로 흠으로 남긴 빗줄기 모양의 흔적에 불과하다.

존재는 원래 그런것이다. 존재는 시간을 살며 시간을 기다린다. 영원히 오지않을것 같던 늙은 아비의 순간과 늙은 어미의 순간을 맞이하고는 지나온 건조한 날들을 추억하며 우리들은 허무하게 시간속의 잊혀진 존재가 될것이다. 나도 그럴것이다. 복제되지 않는 나의 삶을 누가 위로 하며 주목할 것인가. 하여 나는 시간앞에 겸손할 수 밖에 없다. 시간앞에 겸손하라는 것, 그것이 망나니(?)로 살다가 겨우 깨달은 나의 공부의 전부다.

전남 신안군 비금도(이세돌고향)에 있는 최치원이 신선이되어 바둑을 두고 놀았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돌바둑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