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지러운 방안에 냉기가 흐른다.
삶에 지친 옷가지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초췌한 모습의 그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반겼다.
호탕하고 패기있던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그의 얼굴을 보며 우리의 삶은 참 비정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예전 다니던 직장의 동료가 몸져누웠다는 연락을 받고 병원인가 했더니 웬걸 사글세 집이었다.
만만찮은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집에서 간호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아파왔다.
IMF를 사십대 중반에 맞았던 그는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이것 저것 사업에 손을 대다 그만 이렇게 되고 만 것이다.

" 요즘도 바둑에 미쳐있냐? "
나를 보고 문득 바둑 생각이 난 것인지 아니면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그런 것인지 그의 입에서 바둑이라는 단어가 튀어 나왔다.
내가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 바둑이래도 실컷 둘 수 있으면 좋을텐데... 몸이 이러니...."

예전 직장 기우회의 회장을 지낸 그는 엄청난 바둑광이었다.
회사의 지원이 많지 않은 기우회에 사비까지 털어가며 바둑대회를 수시로 열고 프로기사 초빙 다면기를 추진하는 등 그 열성이 대단했었다.
그의 말처럼 다른 어떤 이야기보다 바둑 이야기가 지금 이 자리엔 어울릴거란 생각이 들었다.

바둑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허름한 집안을 둘러보는 것도 신변 이야기를 물어 보는 것도 그에겐 아픔이 될 것 같았다.
나의 이런 저런 바둑 이야기에 그의 얼굴엔 화색이 돌고 있었다.
아련한 추억이 그의 얼굴 곳곳에서 꽃처럼 피어올랐다.

함께 간 다른 동료들도 둘의 바둑 이야기가 계속되자 차마 끊지를 못하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왔다.
어디 직장을 다니는 모양이었다.
우리를 본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번져갔다.
예전 부부동반으로 자주 만나 회식도 하고 노래방을 가곤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집안 곳곳에 흩어져 있는 옷가지 등을 치우며 그녀가 말했다.
" 참, 오랜만이네요. 잘 들 지내시지요.. 누추해서...."
동료중 한사람이 어색함을 깨어 보려는 듯 말했다.
" 계수씨는 아직도 대단한 미인이십니다...늙지도 않으세요,  허허허...."

그녀가 차를 내어왔다.
우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는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 반드시,, 좋은 날이 다시 올겁니다. 힘내세요."
무슨 말이라도 해야했다.
내가 그의 손을 잡으며 말을 이었다.
" 임마, 아플 시간이 어딨어? 빨리 일어 나야지... 대마불사 있잖아...."
그가 싱긋 웃었다.

잔돈푼으로 거둔 봉투를 건내며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어색한 웃음을 짓다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는지 방 한구석에 있는 서랍장을 열었다.
그러더니 바둑통 한 조를 꺼집어 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런 바둑통이었다.
" 바둑판은 이사하는 중에 없어져 버렸어,,, 워낙 경황이 없어서,,, 이거만 있으면 뭐해, 너 가져...."
" 임마, 나중에 다시 바둑판 사면 되잖아... 나,, 바둑통 많아...."
거절을 했지만 그가 계속 바둑통을 들고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
바둑통을 받았다.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나오던 나는 알 수 없는 현기증을 느꼈다.
그가 준 바둑통을 가만히 만졌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이 읽혀져왔다.
그저 그에게 기적이 일어나기만을 간절히 빌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