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7억 정리(情離) 3 | 나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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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7억 정리(情離) 3
2021-11-26 오후 6:04 조회 369추천 10   프린트스크랩

그의 기억에 자리한 고향 지축리는 음습했다.

멀리 아름다운 북한산이 바라보이고, 깨끗하고 맑은 냇물과 넓지는 않지만 동네의 주민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만큼의 논과 밭을 가진 고장! 동네 사람들이 풍요롭지는 못해도 크게 부족하지 않은 터전에서 평화로운 삶을 이어가는 마을이었다.

그런 고향 지축리가 그에게는 늘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산자락 남의 땅에 지어진 겨우 지붕만 있는 집에 살면서 부모님은 자신들 소유의 땅 한 뙈기도 없이 평생을 남의 집 농사일을 거들고 그 품 삵으로 겨우 연명하며 살았다. 자식들이 많지도 않았지만 제대로 건사해서 키워내지도 못해 자녀들은 오로지 시간만을 먹고 자랐다. 마을에서 가장 못사는 집이 그의 집인 것이 그의 기억을 그렇게 각인시켜버렸다.

 

어린 시절 그에게 놀이터는 집 근처의 창릉 천이었다. 그곳은 봄에는 봄날대로 꽃피는 들과 함께, 여름에는 여름날대로 물놀이와 함께, 가을에는 또 가을날대로 무르익은 들판과 함께, 겨울에는 겨울날대로 시린 얼음과 눈과 함께 계절마다 그 나름의 놀잇감을 제공해주었다.

동네의 또래들 중에는 비슷한 처지가 두 명 더 있었다. 어느 날 세 사람은 늘 뛰놀던 창릉천을 벗어나 근방에 있는 공릉 천으로 원정 천렵을 떠났다. 그는 그날 그곳에서 천 두만을 만났다. 친구와 같이 공릉 천에서 놀고 있던 천 두만 일행과 그의 일행은 치기어린 장난을 시작했다. 물수제비뜨기, 팔씨름, 닭싸움 ...... 이 사소한 놀이는 사내아이들 특유의 승부욕으로 번졌고, 마침내 일행들끼리 충돌이 일어났다. 격투기를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었지만 싸움에 있어서는 세상 누구에게도 자신이 있었던 그는 그날 처음으로 졌다.

그는 천 두만을 인정했다. 천 두만도 체계가 잡힌 싸움꾼은 아니었지만 그도 자신처럼 본능적으로 타고난 투사의 몸과 주먹과 반사 신경을 가졌음을 첫 대결에서 느꼈다. 두 사람은 그날 알아챘다. 서로의 운명이 얽혀 있음을......

 

그날 박 광수는 그에게 천 두만을 배신하라는 불가능한 제안을 했다.

세월은 몸만 늙도록 만들지 않는다. 참으로 다행스럽게 마음도, 정신도 함께 사위어가도록 해버린다. 젊은 시절의 그에게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면, 그의 주먹은 이미 상대방의 턱을 부숴버렸을 것이다. 박 광수는 다행스럽게 턱이 온전했다. 그의 마음이 세상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현실의 삶은 다양한 유혹으로 삶의 궤적을 바꾸기를 요구한다. 하나의 대상에게 온 몸과 마음을 바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이!

박 기대는 박 광수의 제안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제안을 수용하려는 뜻이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너무나도 아프게 조목조목 짚어나가는 박 광수의 말에 조금씩 동조하고 있었다.

부모님 세대부터, 아니 그 이전의 조상들부터 한 번도 풍요로웠던 적이 없었던 집안.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자신도 물론이고, 자식들과 그 후대에도 풍요로울 기회가 없을 가문. 세상의 부는 대물림 되도록 되어 있고, 이미 개천은 말라버려 용이 자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자본이 늘려가는 부는 근로로 벌어들이는 부를 오래전에 추월했고, 그 차이는 이제 극복하지 못하게 되어버린 현실! 일상의 삶으로 신분 상승은 이미 불가능한 것임을 박 광수는 아프게 설득하고 있었다.

 

기회!

우직하게 올곧게 하늘을 우러러 거리낌 없이 살아서 어디에 자랑하고 무엇에 쓴단 말인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말고 단 한 번의 굽힘으로 자신과 후대에게 크나큰 선물을 하는 것이 오히려 남자가 해내야 할 일이라고,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세뇌하듯이 박 광수는 열과 성을 다해서 주장하고 있었다. 우리들 흙 수저가 자식들을 금 수저의 반열에 올려놓을 기회는 절대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님을,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간절하고 애타게 주장하고 있었다. 동변상련의 아픔! 그는 박 광수에게서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가타부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없이 일어서서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박 광수는 애잔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를 회유하는데 성공했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장비동 리프트에 한 사람이 올라 있다. 그 사람은 장비동에 불이 켜지고 천 두만 일행이 들어선 순간부터 촬영을 시작했다.

윤 미영이었다.

천 두만은 그녀에게 침입자들이 골프장을 공격하는 동영상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었다. 만약 그들이 싸움에 패한다면 경찰에 동영상을 제출해서 골프장을 잃지 않도록 법에 호소하도록 해달라는 의미였다. 촬영도중 그녀가 발각된다면 그녀의 신변 또한 위험할 것임이 뻔한 일이지만, 그는 그녀에게 역할을 요청했다.

그녀는 그 요구를 즉시 수용했다. 오히려 자신에게 그런 요청을 해준 도진이 아버지가 더 고마웠다.

전투가 길어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그녀의 속은 시커메졌다.


박 기대는 등 뒤의 남자가 어느덧 지쳤음을 느꼈다. 벌써 한 시간 넘게 이어지는 싸움에 세월이 갉아먹은 육신은 급속한 속도로 체력이 소진되었고, 천 두만의 호흡이 가빠지며 자신의 등에 그의 몸을 의지하기 시작했다. 다리에 기력이 풀리고 있다는 방증이다.

박 기대는 발에 무엇인가 걸리기라도 한 듯이 오른쪽 무릎을 꺾었다. 그러자 그의 등에 의지하고 있던 천 두만의 몸이 한 번 휘청하더니 넘어지지 않으려 왼팔이 땅을 짚었다.

그 짧은 시간, 천 두만의 자세가 무너졌고 약점이 노출되었다. 그와 대결을 벌이던 김 남운이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려져 있던 칼이 천 두만의 등을 파고들어 심장까지 꿰어버렸다.

심장이 찔리는 충격에 눈을 부릅뜬 그는 그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느라 목을 길게 빼고 있는 적의 목덜미가 허옇게 보이자, 땅을 짚었던 왼팔을 다시 들어 올려 마지막 힘을 다해 드러난 목에 팔을 휘감고 마지막 힘을 다해 조였다.

우두둑

극강의 왼팔은 김 남운의 목뼈를 으스러트리며 두 사람은 한 덩어리로 땅에 나뒹굴었다.

형님!”

박 기대와 박 광수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단어가 튀어나왔다.

이 돌발 상황으로 인해 전투가 멈춰졌다. 그리고 모두는 각자의 두목을 향해 모여들었다. 하지만 김 남운은 이미 목숨이 끊어진 상태였고, 칼이 아직 심장에 박혀있는 천 두만은 막바지 숨을 내뱉고 있었다.

 

그 순간, 박 기대가 퍼뜩 제 정신을 차렸다. 치명상을 입고 쓰러진 형님은 그의 본성을 강력하게 일깨웠던 것이다.

뒤늦은 본성의 각성!

그는 울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박 광수를 향해 외쳤다.

지금 즉시 남은 사람들과 이곳을 떠나라! 그리고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마라.”

박 광수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박 기대의 눈빛에 떠오른 적의와 살의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의 눈은 그가 짧은 순간 돈의 유혹에 취해서 주군을 배신했던 모습을 버리고 다시 천 두만의 부하로 되돌아갔음을 말하고 있었다. 주군이 쓰러지자 그는 크게 각성하여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주군을 해친 적들을 모조리 베어 넘기려는 일기당천의 장수로 변해 있었다.

양측 모두 두목을 잃음으로 이미 전투가 끝나버렸고, 더 이상의 승부를 가리는 것이 의미 없어진 것을 알아챈 박 광수는, 재빨리 축 늘어진 김 남운을 들쳐 업고 모든 부하들을 수습하여 골프장을 떠났다.

 

그들이 떠나자 박 기대는 천 두만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천 두만이 왼손을 힘겹게 들어 박 기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막바지 기력을 모아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네가,,,,,,등 뒤에,,,있을 때가,,,제일,,,좋았다!”

말을 마친 천 두만의 왼팔이 땅에 떨어졌다.

박 기대의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땅에 떨어졌다. 회한에 가득 차 가슴이 저며지는 눈물이었다. 짧은 한 순간 마음이 흔들려 형님의 등 뒤를 지키지 못했는데, 그 단 한 번의 순간이 자신이 평생을 받들어 모신 형님을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형님의 등을 고의적으로 잠시 비웠었다는 사실을 알고나 있다는 듯이 형님은 아프게 마지막 말을 남기셨다.

박 기대는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 단 한순간이었지만 형님의 등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는 형님을 등에 업었다. 천 두만의 몸에서 나온 피가 자신의 몸을 흠뻑 적셨다. 그는 형님의 피가 자신을 적시는 것이 감사했다. 그 피가 자신의 죄를 씻어내는 의식처럼 느껴졌다.

 

리프트에 숨어서 동영상을 찍던 윤 미영은 돌발적인 상황에 경악하고 말았다. 잠시 후 정신을 수습하고 나니 침입자들은 벌써 퇴각을 했고, 박 기대는 이미 도진이 아버지를 들쳐 업고 건물 밖으로 나서는 중이었다. 그녀도 서둘러 리프트를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섰다. 그러나 사방이 칠흑의 어둠에 쌓여 박 기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박 기대가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을 것으로 생각한 그녀도 서둘러 골프장 밖으로 나섰다.

 

천 두만을 등에 업은 박 기대는 클럽하우스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 중앙에 천 두만의 몸을 단정히 눕혔다. 그리고 클럽하우스 내의 모든 전등에 불을 밝혔다.

천 두만에게 클럽하우스를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의 삶이 모두 바쳐진 이곳이 그를 떠나보내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었다.

다시 천 두만의 곁으로 돌아온 그는 망연히 앉아 있었다. 지금의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바뀌지 않는 지금의 현실을 자신은 이겨내고 살아낼 자신이 없었다. 그와 함께했던 지나간 시간들이 몹시 찬란했었음을 알았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앞으로의 삶은 다시는 찬란할 수 없음도 알았다. 그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솟았다.

형님을 배신한 자신

아무도 모를지라도 자신만은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고, 앞으로 살아간들 그 시간들은 죽음보다 더 참혹할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눈물을 훔쳐낸 그는 품에서 칼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다.

형님의 곁에 그의 몸도 눕혀졌다.

깊은 밤 주변의 깊은 어둠속에 클럽하우스의 불빛만 찬란하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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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포인트 |  2021-11-26 오후 7:49:13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  
⊙신인 💖💛💛💛💖^^
머루 |  2021-11-26 오후 7:56:1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세월무상 입니다.
아늑한 기어속의 세월들은 기약도 없는 빈곤속에서 허덕였지만
그래도 그때가 그리운건 왜일까요 !!
천년만년 부와 명예를 거머쥘것만 같았던 소설속의 인물들~ 인생무상 이기도 합니다.
흔히 죽음엔 원수가없다 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고맙습니다.  
⊙신인 [머루}님의 '기약도 없는 빈곤'이라는 글이 제 마음에 닿습니다.
막연함과 절망감!
그 시대를 딪고 이렇게 작은 여유나마 누리는 노년의 삶이 새삼 다행스럽고 고맙
습니다.
dltjdqja |  2021-11-27 오후 1:38:55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공수레공수거 옛 선인의말씀이생각나는군요 천두만과박기대에게박수를보냅니다
잘읽고 늘감사합니다  
⊙신인 저는 '청춘'이라는 노래를 무척 좋아합니다. '언젠간 가겠지~'로 시작하는 부분을
'어느새 다갔네~'로 바꾸면 제 심경이 그대로 담기더군요.
머잖아 '공수거' 하겠지만, 남은 시간들 행복하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저도 오랜동안 부족한 글 아껴주셨음에 감사드립니다!
자포카 |  2021-11-27 오후 7:39:20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아! 작가님 너무 아프게 그려내시네요  
⊙신인 [자포카]님은 늘 제글에 100% 감정을 이입해주셔서 저를 감동시키세요~^^
어느 생명체든 '소멸 '은 참 아픈것이라고 생각해요.
변함없이 '작가'라고 칭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영포인트 |  2021-11-27 오후 8:26:1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초라하지도 비루하지도 않은 천두만의 마지막 모습이 좋네요.
천두만은 끝까지 천두만이었습니다.
저의 부탁을 들어주신 듯 싶어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신인]님  
⊙신인 몹시도 분주하실 날들임에도 선배님께서 다시금 격려를 주시네요!💙💖💛
다시금 말씀 올립니다.
저는 선배님의 응원이 아니었으면 이 글도 절대 마무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한 회차 남았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
주향 |  2021-11-29 오후 3:47:3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마지막 힌회차를 기대해 봅니다
이번회 에서 느낀 제 감정은....작가님께서 그려오신 한폭의 수채화를 본듯 합니다
어린시절의 저를 다시 느끼게 해준 이번차 였고 공수래공수거의 삶을 다시 베운 마지막
회 전 인것 같습니다
귀결이 어찌 되는지 작가님이 세상을 향해 던지는 말이 무엇 인지.....마지막회를 애타
게 기다립니다
 
⊙신인 저와 비슷한 연배이거나 더 연배가 높으신 분들의 어린 시절은 크게 다르지 않으
리라 여겨집니다. 저는 글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사는데, 혹은 파는데 '어느정
도 금액이면 이해가 될까'였습니다. 그래서 글의 제목이 '1527억'이었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시고 호흡 같이해주시고 격려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일소일노 |  2021-12-31 오후 5:55:24  [동감0]  이 의견에 한마디
초라한 오로 광장에 한줄기 빛을 발해 주시는 신인 작가님 등장!!!
작가님이 노래도 좋아하신듯 ^^
일소일소 일노일노 후렴부 " ~ 가지고 갈것 하나 없잖아 ~~~ " 천두만 미리 알았으면



 
⊙신인 부족한 글을 촘촘하게 읽어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격려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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