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둑의 본질에는 영웅이 있었다

바둑계의 근심 하나는 애기가의 감소다.

물론 이는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며 10년은 훨씬 넘은 주제다. 상당히 부풀려진 숫자로 천만 운운 하던 것은 몰랐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40대 이하에서는 해를 거듭할수록 감소하는 것이 뚜렷하다. 인터넷이나 사회 환경에만 그 원인을 돌리기에는 뭔가 석연찮다.

신문의 관전기 난도 크기가 줄어들었다.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 보니 당연한 현상이긴 한데, 바둑이 기사화되는 빈도 또한 많이 줄었다. 그에 대한 어느 기자의 답은 이랬다.

“기전이 주로 승패 위주로 되다보니 기사 쓸게 별로 없으니까... 그러다보면 바둑에 비중을 두기가 쉽지 않게 되는 거죠.” (서정보. 「바둑」 2007.12)

승패 위주의 풍토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한마디로 바둑의 성장기반이 허약해진 것이다. 그것은 바둑계가 애기가가 추구하는 재화의 가치를 높이지 못했거나 심지어 낮추었다는 것을 말한다, 소비자가 높이 부여하고 있는 가치를 제대로 공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쇠퇴기에 들어선 것은 틀림없는 듯한데, 그 원인은 뭘까? 만약 지금이 쇠퇴기라면 성장기도 있었을 것인데 그 때 그 성장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오늘은 그 하나로 승부를 다루는 방식의 문제를 초점으로 잡고 싶다.

바둑계에 “바람직한 승부 구조”가 사라져가고 있다. 이것이 주제다.

2. 관전기, 바둑 이야기의 핵심이 실리다

“삼국지” 즐거우셨는지? 조조와 유비 이야기.

AD 2세기 한나라가 망하고 위진남북조가 들어설 때의 이야기. 읽은 분들은 한두 번이 아니라 몇 번 정도는 읽었을 것이다. 그런 분 많을 것이다. 내용을 뻔히 알아도 읽는다. 드라마로 보고 영화로도 다시 본다. 왜 그럴까? 알아도 너무나 뻔히 아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초점은 구조에 있다. 내용에 있지 않고 이야기의 구조에 있다. 유비와 조조, 그 두 인물의 대극에 있다.

바둑에서도 반상 내용 못지않게 주변의 이야기나 이야기의 구조가 중요하다.

그에 대해서는 신문 관전기가 핵심을 알려준다. 기보를 보면 약 20수 정도 그려져 있다. 그것을 눈으로 따라갈 수 있고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사람 그 누가 있을까? 프로 수준이 아니고서는 중반전에 특히 어렵다. 그렇지만 모두들 바둑을 본다. 읽는다. 그리고 즐거워한다.

관전기를 세 개 보자. 모두 「바둑」 79년 4월호 “관전기의 어제와 오늘”에서 얻었다.

1) “조국수가 백4로 나머지 귀인 우하귀 3三을 차지하자 이3단은 숙고 끝에 흑5로부터 시작되는 정석문답을 주문했는데 동형의 정석 완료점인 흑11의 얕은 세칸벌림을 보자 조국수는 일종의 신음 비슷한 한숨을 지으며 손이 찻잔으로 갔다. 그러나 누가 알랴! 그것은 전도를 낙관했을 때의 조국수의 버릇이었던 것이다.”

2) "홍4단은 이번엔 상변을 응시한다. 다시 두루 살피며 대강 집계산을 해본다. 그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형세는 불리한데 곳곳의 백 모양엔 아무 트집거리가 없다. 바로 이럴 때 프로기사는 막연한 좌절감과 온몸이 지끈거리는 피곤을 맛본다. 바둑이 즐거운 것이라고? 천만에! 바둑은 수행승의 고행과도 흡사하다. 지금부터 홍4단은 바로 이 고행길에 접어든 것이다. 91의 빤한 수에 27분이 걸린 것만 봐도 그의 고통을 알 수 있다.”

3) "백50은 강수로 좌변 백마의 사는 길이 마련되지 않았으면 둘 수 없는 점이다...백44에 대해 흑이 46에 늘면 온건하나 45는 기세. 그러나 이렇게 서두른 탓일까. 흑49, 51이 일관된 수단이긴 하지만 백60을 허락하여 형세는 갑자기 흑이 불리하게 변하고 말았다. 실은 흑49, 51은 좌하귀 백에 치명적 타격을 가하자는 속셈이었다....”

어느 것이 읽기 즐거운가? 다른 거 생각 없이 읽기에 몰입했는가? 아마도 세 번째의 글에는 별로 감흥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 살고 죽는 거, 그리고 유리 불리 외에는 다른 내용이 없다. 무미건조하고 단조롭다. 향기가 없다. 물론 세 번째 글을 좋아하는 분들도 적지 않다.

중요한 것은, 첫째와 둘째 글에는 내용도 있으며 그 내용이 두 대국자의 대립과 인간적 고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이다. 내용은 구조에 의해-두 대국자의 대립구조-구성되는 것이다.

관전기는 어려운 분야다.

다음 네 가지 요건 때문에 아무나 쉽게 맡을 수 없는 글이다. 문장력. 둘째는 한 판의 바둑 추이를 짐작할 수 있는 간취력. 셋째는 바둑에 대한 넓은 지식에의 정보력. 현장에 있어야 하는 밀착력. (「바둑」 1979.4)

관전기는 하나의 문학, 예술의 장르로 인정받을 만큼 독자적인 매력과 영역을 구축했다.
사진은 유창혁과 이창호 양웅이 대접전을 벌인 26기 왕위전 도전 최종국 종국 장면.
가운데 관전기자 박치문 위원이 보인다. (자료사진/월간바둑)

3. 즐거움은 이야기와 이야기의 구조에서

아마도 이러한 관전기가 바둑의 성장에 대해 무슨 본질을 알려주고 또 무슨 힘이 되겠는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는 바둑의 흥미가 본질적으로 승부가 아니라, 승부를 둘러싼 이야기, 그것도 인간적 이야기에서 오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하다. 즐거움은 이야기에서도 오지만 이야기의 구조에서도 온다.

승부의 세계를 들려주는 이야기.

승부의 구조인 두 사람의 갈등과 타협, 합일. 다른 말로 하면 바둑이 즐거운 이유 하나는, 바둑이 영웅신화를 들려준다는 것에 있다. 그러하다. 한국바둑사 50년은 영웅들의 귀환 신화를 한국인들에게 들려주었다. 그것이 한국바둑 성장의 힘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떠올려 보시라. 왜 그리도 열중하는가? 정책의 차이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단 두 사람의 대결이기에 그러하다. 1명을 뽑는다. 바둑도 그렇다. 두 대국자 중 한 명을 뽑는다. 대극의 구조다.

타이틀 도전을 떠올려보자. 제10기 국수전에서 김인이 조남철 국수에게 도전하여 3:1로 쟁취했다. 그것이 67년. 제4기 명인전에서 서봉수가 조남철 명인에게 도전한 것은 72년으로 3:1로 명인을 쟁취했다. 73년 조훈현이 14기 최고위전에서 김인을 3:0으로 제치고 타이틀을 획득했다.

바로 그럴 때 우린 3:0, 3:1, 그런 것을 보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보는 것은, 승부의 의미요, 두 대국자의 갈등이다. 우리가 보는 것은 두 대국자의 시대적이고도 인간적인 갈등이다.

의미는 다음과 같이 들려온다.

김인이 조남철 10년 아성을 눌렀대. 이제 조남철 시대는 저무는가 봐. 김인도 6년이군. 젋은 조훈현이 뒤를 이어가네. 20대의 세대교체인가보네. 역시 세상은 변했어. 20대가 이제 사회에서 힘을 얻고 있네. 그 참. 10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거 아냐? 새로운 시대의 기운이 들어오나? 시대도 삶도 그리 밀려오고 그리 밀려가는가 보네.

바둑은, 사회나 인생 역사 등 바둑 외적인 것과 결부해서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바둑만 그러랴. 세상 그 어느 것이나 저 홀로 서는 것은 없다. 언제나 결부된다.

그것이 종교에서는 인연이요 은총이며, 사회에서는 시대상이고 역사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이다. 의미는 그런 식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의미 없이는 희망도 즐거움도 없는 것이다.

4. 영웅신화의 구조와 영웅의 이미지, 그리고 철학

두 대국자의 구조가 주는 그 힘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분명한 것은 그 구조가 우리의 내면을 흔든다는 것이다. 그것이 심리적으로 가족의 구조에서 파생되었든지 또는 공동체에서 왔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그것이 우리 내면과 삶의 원형적인 구조이기에 그 구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힘들며, 사회적 조건이 성립된다면 그것은 언제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랬다. 그래서 바둑을 모르는 자에게도 한국바둑의 신화구조는 한국인의 신화구조로 작용한 것이다. 80년대 이후 TV에서 자료도 불충분한 사극이 그 언제나 끊이지 않고 방송되는 것을 보라. 신화 없는 전통에서는 선악의 대립적인 갈등, 그 대극과 대극의 해소과정이 우리 시대의 신화가 되는 것이다. 우리 내면의 구조를 반영하고 흔드는 것이다.

7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의 바둑에 인식으로나 호감으로나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조치훈도 단순히 그가 한국인이었기에 환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우리가 도전하고 넘어서야만 하는 일본이라는 존재에 대해 한국을 대표해서 도전했기에 환호했고 열광했던 것이다.

그의 열광은 1980년 명인을 획득했을 때 절정을 이루었는데, 바로 그 때 바둑에 대한 한국의 인식이 크게 긍정적으로 바뀐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정부에서 은관문화훈장으로 서훈한 것은 단순히 개인의 성취에 준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구조, 그 구조의 관문을 통과했기에 주었던 것이다.

조치훈은 불굴의 인간상을 제시해 주었는데, 이야말로 자본도 없이 경제 성장에 집중하고 있던 한국에 걸맞은 인간상이었다. 그랬다. 넓게 보면 조치훈이나 조훈현이나 모두 다 대결구조로 반상의 이야기를 이끌었다.

3연패 후 4연승 신화를 쓰며 기성에 올랐기에 우리는 더욱 조치훈에 열광했다.
노익장을 과시한 후지사와 9단 또한 거장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1983년 7기 일본 기성전 도전기. (자료사진/일본기원)

반상은 인간사의 상징으로 은유되었고, 사회는 그 상징을 받아들였다.

바둑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이미지를 제공하였으며 사회는 바둑계에 환호로 응답하였다. 60년대 이후 바둑의 급격한 성장은 그 신화가 성공하였음을 말해준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이미지를 안겨주었다고 하면 틀리게 본 걸까.

다소 자의적인 설정이긴 하지만, 아마도 한국인의 내면에 - 적어도 애기가들에게는 - 비슷한 이미지 주지 않았을까? 조치훈의 불굴의 한국인상, 조남철의 바둑의 아버지상, 김인의 장남상, 조훈현의 도시풍의 엘리트상, 서봉수의 아들의 귀환상 등.

그렇다. 상과 그 기사의 수식어는 잘 들어맞는다(표1).
 

(표1) 상과 수식어와 그 상징성 (1960-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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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철/ 조남철이 와도 못 이겨. 이는 곧 정당성과 권위의 상징이다

김인/ 유장하고 두터운 수법. 중후한 인품으로 표현되듯이 이는 장남이다.

조훈현/ 빠른 창, 부드러운 바람. 이는 경제성장과 도시 엘리트에 잘 어울린다

서봉수/ 야성과 된장 바둑. 근대화와 잘 어울린다.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아들의 고투.

조치훈/ 불굴의 한국인상. 자본도 없이 세계 속에 뛰어든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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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이랴. 대국 내용에도 그런 이미지 주는 것이 적지 않았다. 바둑이란 인간을 따라가고, 인간은 세상의 변천을 따라가는 걸까. 그래서 시대상이니, 시대에 걸맞은 영웅이니 호걸이니 등장하는 걸까.

1도(김인의 일본기원 단위결정 바둑)

1962년 일본기원. 백 9단 藤澤朋齊 : 흑(2점) 김인.

흑5가 맥점. 다음 A와 B를 맞봐 쉽게 수습된다. 흑5를 C 단수하는 것은 백A 이후 다음 수가 없다.

지금 보면 3단 인허 받는 것이 불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의 잡지나 여론엔 3단 받은 것이 우칭위안 이후 처음이라고 축하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심리적으로 60년대 일본바둑계가 신화의 나라처럼 여겨졌던 까닭이다. 사카다의 이름은 바둑 두는 사람들에겐 신(神)과 동의어였다.

아사히(朝日)신문에 게재된 총평이 「바둑」에 실려 있다.

“우칭위안 9단도 1929년 내일(來日)하여 승단대회에 참가한 때 3단이 윤허되었다. 모두 거기를 출발점으로 하여 대기사가 되었다. 특별3단 윤허의 선례는 빛나는 것이다. 김군도 이런 선배들의 족적을 더럽히지 않도록 연구를 거듭하여 재능을 길러 훌륭히 대성해주기 바란다.”

2도(유장하고 두터운 수법, 인격처럼)

백1 이하는 두터운 수법. 가히 유장(悠長)하다든가, 바다와 같은 기풍이라든가, 중후하다는 말을 들을 만한 수법이다. 우변 백을 먼저 구하고 싶은 충동을 누른 백5도 의미 깊다. 반상의 수법과 인격, 영웅신화의 내용이 서로 잘 조화되어 가다듬어지는 국면이다. (1966년 제10기 국수전 도전4국. 백 5단 김인 : 흑 8단 조남철)

3도(때론 형제간의 우애처럼)

흑2를 보고, “그냥 거기를 두어?” 가볍게 중얼거렸다. 우변 a에 받아둘 것을 예상한 것. 백3 백5는 두텁다. 이후 진행된 수순은 <3-1도>. (1978년 제13기 패왕전 제3국. 백 패왕 김인 : 흑 7단 조훈현) 

당시의 관전기를 발췌해보자.

“김8단과 조7단, 두 사람의 대국 분위기에는 독특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조7단과 서봉수 5단과의 대국 분위기와는 전혀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따뜻함이었다. (중략) 상대방이 잘 두면 잘 둘수록 뭔지 고맙고 든든한 그런 관계, 승부 자체보다도 더욱 커다란 신뢰의 안개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고 있었다.“

김인의 인격과 기풍을 연결시키는 글이라 하겠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3도>의 우변 백3, 5는 참으로 두터운 인격처럼 보인다.

4도(철학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1983년 기성전 도전 7번 승부를 앞두고 두 개의 이야기가 남는다.
첫째는, 4판만 가르쳐주마(후지사와). 세판만 배우겠습니다(조치훈).
둘째는, 치훈이와 다른 철학을 보여주겠다(후지사와).
(1983년 제7기 기성전 도전7국. 백 9단 조치훈 : 흑 기성 藤澤秀行)

그러나 어디가 철학의 깊이를 보여준 자리인지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철학은 모든 수에 들어있는가? 흑6 다음은 <4-1도>. 흑6은 참으로 멋진 감각.

철학이 다르다는 후지사와의 장담은 이후 바둑의 깊이에 대한 잠언처럼 들렸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두고 바둑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했다. 아마 그런 깊이 있으리. 이 글도 그리 본다. 바둑은 기(技)만으로 이뤄지지 않으며 그 기(技) 또한 계산과 같은 그런 것이 아니다.

5. 영웅신화가 사라진 지난 10년

2010년대 무렵 뚜렷해진 현상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음 몇 가지 현상이다.

1) 바둑의 승부에 단체리그전이 지배적이 되고 있다. 도전기는 사라지고 있다.

2) 내용에 개성이 사라진 바둑이 많다. 대국자가 불안에 쫓기고 있기 때문이다. 제한시간이 겨우 10분인 바둑에서 개성은 사라진다.

3) 랭킹제로 기사의 능력을 평가한다. 이는 인간을 평준화시키는 경향을 가져온다.

이 여러 가지 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로 모아진다. 그것은, 바둑에서 이야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에 앞서 나타난 현상이다.

지나친 스포츠화가 첫째다.

축구나 야구의 프로구단제를 도입해서 바둑의 승부 구조를 바꾸고 있는데, 이는 이점도 있지만 놓치는 점이 더욱 많다고 할 수 있다. 도전과 응전이라는 인간 고유의 생명력을 바둑으로부터 앗아가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제한시간을 10분으로 한 것도 반상으로부터 개성-이는 기풍이 된다-을 몰아내는데 한 몫을 하였다. 앞서 보았듯이 영웅신화의 중요한 모티프가 곧 영웅의 개성 아니던가. 그러나 제한시간의 단축은 그것을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랭킹제는 개인의 개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평균적인 인간을 요청한다.

예를 들어 어느 기사는 일부의 기전에서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 70년대 기왕을 2연패했던 김희중은 다른 기전에서는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한다. 랭킹제는 평균으로 기사를 평가한다. 인간이 크게 변할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한다.

어제와 다른 오늘, 그것이 바로 도전 아니던가. 평등과 공정성을 강조하다보니 실제 피와 살을 가진 생동하는 개인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1995년 바둑TV가 개국되고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신문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바로 이런 때 바둑TV가 제한시간을 짧게 하면서 단체대항전을 주도했다. 그것이 앞서의 3가지 현상의 핵심이다.

짧아진 시간 속에서는 관전자도 자신을 반추할 시간이 사라진다. 시간에 쫓기는 곳에 인간은 사라진다. 인간의 이야기도 사라진다. 그 모든 것이 승부의 이야기를 사라지게 한다. 하나로 귀착한다. 승부의 구조가 가벼워지는 것에 귀착한다.

1995년 바둑TV가 개국했다.
현재현 한국기원 이사장(중앙)과 김현정 바둑TV 사장(왼쪽)이 케이크 커팅하는 모습.
(자료사진/월간바둑)

1940년대, 50년대 일본바둑을 흥왕시킨 10번기제가 어떠한 승부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현현각에서 발행한 「투혼 坂田榮男」의 일부를 읽어보자.

“치수고치기 10번기...대국제도로는 가장 가혹한 것이었다. (中略) 단의 권위를 거는 절대절명의 승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中略) 용호가 상박하면 반드시 한쪽이 상한다는 식으로 팬들은 승부바둑에 시선이 집중되어 만천하가 열광하였던 것이다.”

10번기는 다름 아닌 영웅의 회귀 구조이다.

명인과 본인방 등 도전권제 또한 그와 다름 아니다. 한국의 도전기 즉 국수전이나 명인전 왕위전 또한 다르지 않다. 그 승부의 구조는 영웅신화의 구조인 것이다. 도전과 패배, 극복의 과정인 것이다. 인류의 내면을 밝히는 신화의 구조가 바둑 승부의 구조였다. 그러기에 일본에서도 고대 중국에서도 도전의 신화구조는 언제나 바둑의 힘이 되었다.

19세기 초 명인 쟁탈을 둘러싼 인세키(幻庵因碩)와 죠와(丈和)의 반외 암투는 바둑의 내용을 더욱 더 인간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어주었다. 정치적인 모략과 인간적인 비극은 반상의 냉정과 긴장에 잘 어울리는 배경이었다. 그 과정에서 비로소 바둑은 인간적인 기예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이 한창 경쟁했을 당시의 바둑을 한 번 보자. 내용의 처절함은 배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죠와에게는 명인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인세키는 자신의 제자인 7단 인테츠(赤星因哲)를 죠와와 대결시킨다. 만약 7단인 인테츠를 죠와가 백으로 이기지 못한다면 명인의 자격이 없다고 정부에 주장할 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둑은 지고 제자는 피를 토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5도(인세키의 명인 암투-토혈지국)

백2가 역사적인 묘수로 이후는 알파벳순. 백이 우하귀를 선수로 벗어난 것이 요점이다. 백2는 우변 흑의 뒷맛을 한껏 노린 “적중(敵中)의 수”라고 하겠다. (1835년 백 本因坊 丈和 : 흑 赤星因徹)

토혈지국은 일본 바둑의 정체성을 살려주는 의미가 되었다. 신화가 되고 실제가 되었다. 그것이 인류의 문화사다. 그랬다. 조훈현과 서봉수의 대결 구도는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 기단의 서사(敍事)였다. 그리고 조훈현과 이창호는 그 뒤를 이은 90년대의 서사였다.

그러나 이창호와 이세돌의 대결은 2000년대의 서사를 이루지 못했다.

왜 그런가. 이세돌이 등장할 때에는 이미 한국의 기단 조건이 영웅신화를 생기게 하는 힘을 많이 잃었기 때문이다. 이창호가 없어서가 아니라 무대가 사라진 때문이다. 그와 함께 한국 바둑의 이야기가 신문에서나 애기가의 대화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미사여구가 아니다.

이야기는 반상을 이루는 것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해석을 강조한다.

내면의 갈등, 상대에 대한 반발, 모순적인 현실, 그런 것이 반상을 이루지 못한다면 대체 무엇이 반상을 이끌어낸단 말인가. 인간의 이야기를 배제하고 어디에서 인간의 승부를 찾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