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상 앞에 도착했더니 벌써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향을 올리고, 촛불을 밝히며 절을 하고 있었다. 집사람이 나보고도 절을 하란다. “돌덩이 앞에다 무슨 놈의 절을 올린단 말인가? 사람에게 절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절이란 그저 자신을 하심(下心)하는 마음의 표상이니 육체의 절이 아니라 마음의 그것을 가지면 족한 것이다.” 이렇게 흰소리를 해댔다. 뚱한 표정으로 막내딸과 함께 절을 올리더니 탑돌이를 한다. 구석진 데 가서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서쪽 하늘을 보았다. 그날은 음력 8월 6일이라 초승달이 교교하게 빛나고 있었다. 동쪽하늘에서는 구름이 몰려들고. ‘내일 해돋이를 볼 수 있으려나?’ 은근히 조바심이 인다.

그러건 저러건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들 모습을 멀리서 보자니 쓴웃음이 지어진다. 뭘 바라고 저 돌덩이 깎아놓은 것에 절을 올리고 있는 것일까? 불교라는 것이 자신을 돌아보아 마음을 닦고 더 나은 인격체로 가고자 함이 아니던가?

觀音瞰海俱慈笑 (관음감해여자소) 관음보살은 자애로운 미소로 바다를 내려보고
衆女仰禱與流汗 (중녀앙도여유한) 뭍 여인들 땀 흘리며 우러러 기도하네
東風驅雲半月皎 (동풍구운반월교) 동풍은 구름을 몰아가고 반달은 빛나는데
終香燭拜何慾滿 (종향촉배하욕만) 얼마나 욕심을 채워야 향, 촛불 올리며 절 하는게 끝날까?

탑돌이가 다 끝났는지 막내딸이 내게로 왔다. “엄마는 더 기도하고 오신대요. 아무리 적게 걸려도 두 시간 이상은 걸리겠답니다.”


외옹치항 그리고 백사장에서 한 잔

딸과 나는 원래 계획대로 대포항을 향해 갔다. 회를 떠다가 낙산 해수욕장 백사장에서 먹기로 했던 것이다. 막상 대포항을 가보니 주차장도 복잡하고, 주차장에서 시장까지도 꽤 멀어보였다. 조금 더 올라가보자 하고 달려보니 얼마 가지 않아서 외옹치항이라는 곳이 나온다. 차를 세우고 한 바퀴 쓱 둘러보았다. 주말이라 그런가? 생각 외로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다. 여기저기 가게마다 훑어보고 흥정도 해보고 그러다 인심 좋게 생긴 주인하고 흥정이 이루어졌다. 둘이 먹기엔 조금 많이 떴다. 집사람도 좀 들어야 하니까.

오는 길에 가게에서 소주 두 병을 샀다. 백사장으로 자리를 들고 나가는데 바람이 엄청났다. 컴컴한 밤중에 가로등이 켜진 곳이면 어김없이 사람 한 무더기가 있다. 여기저기 돌다 간신히 자리를 하나 잡았다. 시장이 반찬이던가! 딸과 함께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어두운 밤바다에서 크게 휘몰아치는 파도를 보며 먹는 맛도 일품이었다. 한편 웃음도 났다. 한 쪽에서는 열심히 기도하는데 이편에서는 살생을 자행해서 즐기고 있으니, 세상일이라는 것이.

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전화가 왔다. 거기도 바람이 심하게 불었을 터, 두 시간 정도하고 만 모양이다. 숙소에 도착해 집사람에게 회를 내주며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홍련암에 가 일출을 보도록 합시다.”하곤 잠자리에 들었다.


홍련암과 의상대


눈을 떠보니 새벽 네 시가 조금 넘었다. 잠을 깨우느라 부산을 떨며 준비를 마치고 낙산사 후문 쪽으로 향했다. 웬걸? 날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바람은 거세게 불고 비마져 흩뿌리고 있다. “이거 틀렸다. 일출은커녕 비라도 그어야겠다.” 서둘러 의상대로 향했다. 잠시 뒤 비는 그쳤다. 다시 걸음을 재촉해 홍련암을 향해 갔다. 집사람은 백팔 배를 한단다. 딸도 절 몇 번 한다. 나는 암자 마루에 뚫어진 구멍으로 그 밑에 바위에 파도가 몰아치는 모습을 보았다. 절을 마친 딸에게도 와서 보라고 하고.

어차피 절이 끝나려면 시간이 더 남았으니 딸아이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의상대 모습도 찍어보라고 했다. 새벽의 푸르스레 써득써득한 기운에 싸인 모습이 환상적이다. 암자 뒤로 더부룩하게 자라나는 조리대 군락도 보며 거닐 때 즈음 집사람이 나온다. 둘이 같이 동해바다를 보며 일출을 보지 못한 아쉬움과 옥빛 바다색을 볼 수 없는 애석함을 함께 나눈다. 다만 집채 만한 파도가 몰아치는 모습을 보며 서로 장쾌함을 나눌 뿐이다. 커피 한 잔을 나누며 의상대 쪽으로 다시 발길을 되돌렸다.

의상대 절벽 아래로 파도가 몰아치며 누르스름한 거품이 한 군데로 모여 있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러더니 불어오는 강풍에 거품이 공중으로 떠 휘날리며 한 떼의 나비처럼 흩날린다. 딸아이는 그것을 잡아보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잡은들 무슨 소용이랴! 물거품인 것을. 의상대에서 다시 홍련암을 느긋하게 바라보니 말 그대로 바다에 떠 있는 한 송이 연꽃의 모습이었다. 옛사람들의 작명 솜씨에 새삼 감탄스러움을 집사람과 나눈다.

欲觀赤珠義湘登 (욕관적주의상등) 붉은 구슬을 보려 의상대에 올랐더니

玄海依壁紅蓮相 (현해의벽홍련상) 검은 바다 벽에는 빨간 연꽃 모습만

庵后叢竹常靑守 (암후총죽상청수) 암자 뒤 대숲은 푸르름이 늘 지켜져

楪孔窺浪或怒怏 (접공규량혹노앙) 바닥 구멍으로 파도를 엿보니 노한 듯 혹 원망하는 듯

觀水與伴支頤欄 (관수여반지이란) 짝과 함께 난간에 턱을 괴고 관수법(觀水法)을 즐기며

相羊座石吟茶香 (상양좌석음다향) 이리저리 거닐다 돌에 걸터앉아 차향을 음미하는데

長風生濤積黃泡 (장풍생도적황포) 거친 바람은 파도를 일으켜 누런 거품 쌓여

飛散群蝶捕纖掌 (비산군접포섬장) 나비 떼가 날아 흩어지니 고운 손바닥으로 잡아보누나



신흥사(神興寺)


해돋이는커녕 옥빛 바다색조차 보지 못한 것을 애석해하며 차를 북쪽으로 향했다. 아직도 이른 아침. 설악동을 지나 매표소를 거쳐 주차를 한 후 신흥사 쪽으로 거닐었다. 가다보니 오른 쪽에 거대한 청동대불이 있다. 그 속에는 몸속법당이 있다던가? 집사람은 또 참배를 해야 한다며 딸아이를 데리고 그리로 간다. 혼자 이리저리 배회하다 담배 한 대 피워 물고는 위로 가보니 거기도 공사 중이다. 계곡 물줄기를 돌리려는 모양이다. 세심교(洗心橋)라고 나무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돌다리로 되었다. 그 밑에서는 한창 공사중이니 세심교가 아니라 오심교(汚心橋)를 건너는 기분이다. 하기사 다리이름이 무슨 상관이랴! 맑은 물이 흐르던 탁한 물이 흐르던 그 다리는 그 자리에 있을 뿐인 것을.

참배를 마치고 온 가족과 신흥사 경내를 한 바퀴 둘러보고 비선대 쪽을 향해 걸었다. 가다보니 왼쪽에 돌무더기가 쌓여있다. 크고 작은 탑도 꽤 여럿이 서 있었고 일부는 무너져 있었다. 올 여름에 무차별적으로 쏟아진 국지성 호우 탓이리라. 여기까지 왔다 간 기념으로 탑이나 하나 쌓잔다. 딸아이에게 네 소원도 빌 겸 쌓아보라고 했다. 중2인 이 녀석은 욕심이 있어 제법 꽤 괜찮은 고등학교를 들어가고 싶어 한다. 집사람과 나는 돌을 날라다 주고, 힘에 겨운지 낑낑대며 탑을 하나 완성했다. 인증샷 한 번 눌러주고.

“뭘 빌었니?” 배시시 웃기만 한다.

神興何寂默 (신흥하적묵) 신명이 돋고 흥이 나는데 웬 적연(寂然)인가?
洗心喧流濁 (세심훤류탁) 마음을 닦는다더니 흐린 물이 시끄럽기만
未登臺仙飛 (미등대선비) 대에 도착도 하기 전에 신선은 날아갔는데
積願塔笑朴 (적원탑소박) 비는 탑을 쌓고는 배시시 웃네

이렇게 짧았던 1박2일의 여행이 끝이 났다. 진작 글을 썼어야 했는데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어 늦었다. 그러나 그 흥취가 더 희미해지기 전에 기록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덧붙여 아직 한시(漢詩)는 멀었다. 어린 아이 수준이다. 다만, 유치함을 무릅쓰고 올리는 것은, 흥취만은 남겨두고 훗날 공부가 익어 되돌아보아 다듬으려 함이다. 질정이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