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일기 198, 팔공산 후기
머리를 깎았다.
세탁소에 들러 다린 와이셔츠를 찾는다. 이번엔 다른 세탁물이 없이 하나뿐인 것을 모르고 있었다. “빨리 해서 월요일에 찾을 수 있게 해드릴게요.”
“잠깐 여기 걸어 노시고 이발 좀 하고 올게요.”
바로 옆 집 모범이발소에 들어선다.
“목욕탕에서 깎으니까 깎는 시늉만 하고 확 자르질 않아서 답답하더라고요.”
7순은 되어 보이는 이발사는 자신의 머리도 까치집인데 저 양반이 이발사가 맞나? 눈이나 보여 머리를 깎는 것일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역시 평생의 업 이었는지 바리깡으로 옆머리를 확 쳐버려 두 달 전 염색에 가려졌던 흰머리가 눈송이처럼 하얗게 나타난다.
목욕탕의 아이들은 물장구와 헤엄에 즐겁다.
집에서 가져 온 장난감 자동차를 물 바닥에 굴린다.
평소 전기면도기만 사용하던 것을 정성스레 비누를 발라 깎는다.
눈이 나빠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손가락으로 문질러보며 느낌으로 한다.
반질반질한 느낌에 상쾌하다.
빨리 가서 출발준비를 서둘러야겠군.
9:30 롯데호텔 앞에서 당근님의 차에 올라탄다.
자 이제 출발 목적지는 대구, 3년만의 재방문 이다.
2008년 3월 초 대구 팔공산의 나작 첫 모임에 그녀와 함께 참가한 후 이번에도 같이 가고 싶었지만 혼자 떠난다. 2007 년 그녀와 만난 이래 많은 곳을 같이 다녔는데, 나작 공주모임에도 같이 갔었는데 아쉽고 안타깝다. 4월 마지막 주 그녀와 전화통화를 한 것이 마지막이었나?
아니다 5월 첫 주 전화 통화가 마지막 이었군.
차는 중부고속도로를 지나 강릉 向(향)이다.
조금 지나면 그녀의 집 뒷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던 그 길인데.
아 벌써 지났군. 마지막으로 다시 보고 싶었는데.
충주 방향으로 들어선 차는 문경을 지난다.
오로 광장의 모임이 이 곳 문경에서 두 번 있었는데.
굴초, 천라지망, 연인, 박사르, 옥돌 님 등을 이 곳에서 뵈었는데.
여정의 행로는 마음이 절절하게 아픈 곳들만 지난다.
북 대구에 다가선다.
이 길을 그녀가 당시 그랜져를 팔고 새로 산 작은 경차로 120Km로 달렸었는데.
북 대구 인터체인지 앞에서 1차 팔공산 모임을 마치고 헤어지며 만석형님을 허깅했었는데.
불과 3년 만에 내 곁에 남은 것은 변함없는 바둑뿐인가?
당근님과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하니 팔공선달이 길에 나와 서있다.
저격병님은 진주에서 벌써 와 계신다.
못안 님이 도착하시고
죽시사 님 내외께서 들어서신다.
청풍님이 KTX가 지연 되었다며 들어오신다.
도리 님께서 오신다.
선달아우는 오늘 모임의 기획에 대해 설명하신다.
첫째, 지난 5년간 바둑사료의 수집과 글로 오로 를 빛내주신 이청 선생에게 감사패를 전달하고
둘째, 2008년 고성 후기로 바둑일기 100회 마무리 후 이번 200회 끝을 팔공산 후기로 맺게 된
내게 꽃다발 과 케익을 준비하셨다.
셋째, 그대그시절 큰 형님의 원행으로 자리를 빛내고
넷째,
선달 님은 분명 네 가지를 말씀 하신 것 같은데 기억조차 못한다.
두 시 경부터 시작한 막걸리 파티는 반가움에 들뜬 이어지는 대화로 끝이 없다.
바둑을 인연으로 글을 벗으로 만난 소중한 인연들이 내겐 한 없는 기쁨이다.
어느 누구 한 분 소중하지 않은 분이 있을까?
詩人의 말씀은 내겐 공부이다.
십인십색이라지만 내겐 모두 한 가지씩 배워야 할 점을 가지신 분 들이다.
바둑모임이니 대국을 시작한다.
청풍님과 호선으로 시작한 대국은 내가 백으로 초반 난전에 중앙 요석이 잡혀 투석한다.
이기던 지던 몇 집 승부인 내가 음주운전을 하니 사고가 난 것일까?
승부에 그리 집착하는 내가 잠시 아니 최근 정신이 빠져 딴 데 생각이 가 있는 것일까?
못안 님과 도리 님의 대국은 누가 이겼는지 졌는지 곁에서 보고도 승패조차 모른다.
당근님의 쾌척 으로 노래방을 다녀와서도 이야기는 끊이지 않는다.
“아까 노래방에서 도리 님 곁에 앉아 뭐라 말씀을 드리려다 그냥 담배를 피워 물었습니다.
도리 님도 순간 담배를 피워 무시는데 서로 이해하며 무언의 대화를 한다 여겼습니다.”
그저 뵐 수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안도감과 기쁨인데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하랴?
새벽3시, 못안 님과 도리 님은 일 관계로 먼저 일어서신다.
서운한 마음에 길가에 나가 전송하며 그 분의 일이 형통하기를 마음속으로 빈다.
조반을 마치고 대화는 이어지는데 연휴 끝 이어 상경길이 밀릴 것 이 염려되어 일찍 출발하기로 한다.
상경 길은 벌써 이곳 저곳 막히기 시작한다.
숙소에 도착하니 오후 5시 이다.
가며 오며 많은 시간을 듣게 된 당근님의 말씀들은 귀하기 짝이없다.
내가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이며 해야 될 배워야 될 것들이 무궁한가 깨닫게 된다.
蝸牛角上爭何事 였던가?
40여 년 두어 온 바둑이 500여 편 넘게 써 온 글들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제라도 작은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 다행일까?
대구까지의 원행에서 이만한 깨달음 이라도 얻게 되니 이로 족한 것 아닌가?
그래도 내 곁에는 바둑이 있다.
그래도 내 곁에는 글벗들이 있다.
그래도 나는 한 수 한 수 더 나은 착점을 찾으려 인내하며 노력하지 않는가? 끝.
蝸牛角上爭何事(와우각상쟁하사)
결혼식장은 오목 교 전철역 앞 건물이다. 5호선 역 이라는데 강남 고속 터미널에서 7호선을 타고 대림 역에서 내려 2호선을 갈아탄다. 두 정거장을 더 가 다시 5호선을 타고 두 정거장 뒤가 오목교역이다. 예식은 한시부터 인데 거의 시간이 다 되었다. 부랴부랴 예식장 건물로 들어서는데 누가 반갑게 아는 척 한다. S의료원에서 같이 근무를 하던 이 들이군. 네 명이나 S의료원에서 참석 한 것을 보면 최영길 씨가 평소 인심을 잃지는 않았나 보다.
정작 C병원에선 소장도 참석을 안 하시고 내가 대표로 가고 일반직원은 강성열 씨 한 분만 오셨다. C병원.. 이라 표식이 달린 10만 원짜리 화환을 확인 후 사진을 찍어놓는다. 신부와 아버지의 식장 입구에서 대기 중인 사진을 하나 더 찍어 내가 이곳에 온 공식적인 임무는 마친다.
결혼식의 비용이 과다하고 뷔페 음식값도 만만치 않아 부조를 적게 하면 먹지도 않는 것이 예의 라더니 오랜만에 들려본 결혼식장 뷔페는 상차림이 가짓수가 꽤나 많다. 훈제연어와 갈비 두 점, 초밥, 닭 날개 두 쪽, 기타 여러 가지 음식을 맛이라도 볼 양 접시에 가득 담아 여럿이 모인 자리에 앉는다.
정년퇴직을 한 태일 형이 옆자리에 앉아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따라 준다.
“이런 것만 가져왔어, 안주 될만한 것을 가져와야지.”
그 분이 두 번째 가져온 접시의 육회가 먹음 직 해 보여 “형님은 맛있는 것만 가져오셨네.” 하며 한 술 떠 먹자 형님이 말씀한다.
10년 전에 만나 같이 근무를 시작했던 분들, 그저 정겹고 좋아 한잔 마시며 이제사 그 분들의 그때 그 모습이 지금 내가 흉내내야 할 올바른 정겨운 모습들이었구나 싶어 닮고 싶은 마음이다.
종이컵으로 네 잔은 마셨으니 소주 두 병일까?
과하게 마셨지만 그리 취하지는 않는다.
동기였던 홍규, 나중에 들어왔지만 나보다 연상이던 이들.
지난 10년의 추억이 아직도 새롭다.
이렇게 얼굴 한 번 볼 수 있는 것이 그걸 반기는 것이 인생이고 생활인 것인데.
무척이나 오랫동안 작은 평화도 맛보지 못하며 살아 온 것일까?
이제사 평화를 느낀다.
평화는 거창하거나 먼 것이 아니고 처가 매일 고생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곁에 있을 때는 손 발을 주물러 주고 성찬은 아니어도 그녀가 정성껏 차려준 저녁상에 반주 한 잔이 나의 평화 아닌가? 나의 핸드폰은 그녀가 자판과 창이 큰 것으로 마련해 준 것이고 나의 돋보기는 그녀가 같이 가 맞춰준 것이고 나의 양말은 그녀가 자꾸 사와 신겨 준 것이고 나의 와이셔츠는 그녀가 아픈 손가락으로 다려준 것이 아닌가? 이만하면 족하지 무엇을 바랄 손가? 나의 모든 것은 그녀가 갖춰준 것이 아닌가? 그녀의 정성과 사랑으로.
내가 갚을 수 있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회사에 열심히 나가 묵묵히 오래 일하며 같이 일하는 다른 이들에게 기분 좋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겠지. 직장인의 바람직한 모습은 바로 태일 형님의 모습이었지. 항상 웃으며 항상 궂은일을 먼저 해주고 항상 양보하고.
오늘 결혼식에 내가 참석하는 것을 S의료원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나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C병원 동료들이 모은 부조를 전달하러 들려 전하기만 하고 가려 했었는데.
나는 아직도 세상경우와 이치를 모르고 사나 보다. 부족하기만 한 나 이다.
회사의 이익과 생산성 향상, 효율을 위해 누구를 잘라야 하나? 어떻게 근무기강을 확립하나? 어떻게 일벌백계로 경종을 울려 회사의 지시에 따르게 하나? 자나깨나 이런 궁리만 하며 젊은이들을 다그치며 갓 출근한 이들에게 야단이나 치며 내 위치에 도전을 허용하지 않으려 혼자 고심하던 나는 달팽이 뿔 위에서 혼자 춤추던 것인가? 혼자 이 세상과 싸우던 것일까?
對酒(대주)
白居易
蝸牛角上爭何事(와우각상쟁하사)
石火光中寄此身(석화광중기차신)
隨富隨貧且歡樂(수부수빈차환락)
不開口笑是癡人(불개구소시치인)
술 한 잔 앞에 두고
백거이
달팽이 뿔 위에서 무슨 일로 다투는가.
부싯돌 불빛 같은 찰나에 이 몸 맡기고 있을 뿐인데.
부유하면 부유한대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즐겁게 살지니
입 벌려 웃지 않으면 이 또한 어리석은 사람이리라.
학벌 없고 가진 것 없고 내 세울 것 없는 형님에게서 그래도 항상 웃는 그의 모습에서 배운다.
병신자식 가슴에 품고 인내하며 세상에 굴종하던 동기에게 배운다.
삼성그룹 사장 매형 덕을 마다하며 자신만의 길을 걷던 동료에게 배운다.
한결같음 속에 병원을 나와 택시를 몰아도 식장에 온 동료에게 배운다.
이 많은 벗들이 있으니 또한 족하지 아니한가?
이른 아침 출근하여 점심 전 식장으로 출발하여 근무를 빼 먹는 것만 즐거워하다
내 벗들을 잊고 있었음을 느끼며 자리를 같이 한 즐거움에 이제야 눈을 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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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싱그럽게
팔공선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