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상의 경계(境界): 철학과 감성으로 자유롭게 넘나드는 걸까 (2)

다음과 같은 식으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언어에 주목하는 것으로, 상수와 하수 사이에 프로와 아마 사이에 1급과 5급 사이에 초보자와 10급 사이에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는 것이다. 왜 다른가. 반상에서 아는 바가 다르기에 그러하다. 왜 아는 바가 다른가. 실력, 또는 지식의 차이.
프로에 가까울수록 모호한 언어를 쓴다. 왜냐. 먼저 다음 분류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닫힌(closed) 영역과 열린(opened) 영역. 닫힌 영역은 답이 있는 영역. 열린 영역은 답이 없는 영역. 그 중간에 영역 하나 더 넣어도 좋겠다. 답이 있는지 없는지 단정하기 힘든 약간은 모호한 영역.

두 집을 내는 방식이 분명한 곳, 그것은 초보자에게도 분명하다. 그러나 초보자에게 중앙에서 삭감의 답을 찾으라는 것은 무리이다. 이와 달리 프로에게는 중앙 삭감의 답은 대체로 합의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한다. 다만 중앙은 허공처럼 모호한 곳. 그런 곳에서 프로는 모호한 언어를 쓴다.

부분적으로 답이 있는 것은, 그 영역은 더 이상 관심의 영역이 아니다. 해법이 주어진 것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 그러므로 후지사와 선생의 철학 운운을 프로들은 깊이 공감한다. 시간이 묵을수록 더욱 공감한다. 답이 잠정적으로 주어진 듯도 한데, 프로들은 철학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어떤 철학이냐?” 그에 대한 합의가 없다는 점이다. 후지사와 선생도 그 철학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도 남겨두지 않고 있다. 아니다. 이미 수많은 실마리를 던져두었는데 우리가 눈 뜬 장님이라서 모를 수도 있는 것이다.

예컨대, 말씀 중에 (“지금도 후지사와씨는 임씨의 기예를 대단치 않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지금도 임해봉씨의 기예(技藝)는 멀었다고 느낍니다. 임씨 쪽이 나보다 정확한 면에서는 월등하며 끝내기에서도 빈틈이 없으니 최소한 기예 정도는 상수(上手)가 아니고서는 전연 승부가 안 될 것이다.” 도 있고, 이시다(石田芳夫)에 대해서는 “잔수가 강하고 계산이 정확하며 천재적인 소질이 보인다. 그러나 좀 더 비약해주기 바란다.”고 말씀하고 계시니, 뭔가 약간 알 듯도 힌트를 주시는 듯도 하다.
 
다음 이야기도 힌트가 될까. 1971년 9월 27일 일본 명인전 도전 제5국에서 임해봉의 도전을 받을 때의 후지사와는 이런 태도와 일화를 남겨두고 있다(앞서의 후지사와 인터뷰와 말씀도 이 언저리 관전기에서 얻었다.). 관전기에서 몇 가지 뽑아내면...

1) 일찍이 山部俊郞 9단은 “80수 근처까지라면, 후지사와씨를 따를 사람이 없지 않을까.”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2) 후지사와 명인은 이 봉수(기보3 흑3)에 13분 생각했으며 본국에서 10분 이상 생각한 두 수 중의 한 수인데, 종국 후에 篠原正美 8단이 “중요한 바둑이니 좀 더 생각할 줄 알았는데 -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유감입니다.”고 한탄한다.

그랬다. (기보3) 흑3은 (기보3-1)로 두어야 했다. 그랬으면 흑이 유리했으리. 실전은 곧 패착으로 연결되는 길이었다.

  기보3-1

(기보3-1에서 중앙의 집과 두터움을 넘어서서 전체가 결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리 말할 수 있을까. 수가 분명치 않은 곳에서 후지사와는 비로소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수가 분명한 곳에서는 돌을 놓을 뿐이고. 그러면 기보3과 기보3-1은 수가 분명한 곳으로 약간 농담조로 이야기하면 후지사와보다 기예가 낮은 프로들이 놀고 또 잘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수가 분명치 않은 곳이야말로 수준 높은 명인들의 놀이터요 일터인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수법이란 것은 형체 너머 형체 이전의 그 무엇을 말함인가. 적어도 명인들의 수준에서 말이다. 물론 긍정한다고 해도 아마추어의 바둑은 바둑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수법이란 무엇일까. 手의 法. 착수가 전거(典據)하는 바. 그런 걸까. 그리 보면 넉넉하리. 반드시 형체를 갖추지 않더라도 착수의 전거, 즉 착상의 전거가 되는 바라면 그건 수법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전편 (기보1, 아래 기보)에서 크게 비상한다고 이 글이 이름 붙이고픈 그런 착수도 수법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어느 정도 그 착수의 함의가 프로의 세계와 아마의 세계 즉 바둑계에 잘 전달되는지는 아직은 불분명해도 말이다.

과거 중세시대에서 오늘날 우리가 쓰는 밭전자(田字) 행마가 오늘날의 안목으로 쓰인 예는 거의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손쉽게 쓰는 수법 중에서 중세의 명인이 잘 몰랐던 그런 활용 예도 적지 않다. 요컨대 지금 현재 뚜렷하지 않다고 해서 앞으로도 드러나지 않고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예측은 그리 맞는 말이 아니다. (기보1)의 흑2에 대해서도 그리 말할 수 있다.

수법은 형체를 갖출 수도 아니 갖출 수도 있다. 물론 합의가 충분히 이뤄진 수법에만 우리는 특정한 이름을 붙이고 그것만을 수법으로 인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틀린 것은 아니며 적절치 않은 태도도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널리 쓰고 있는 수법들도 그 언제나 한 때에는 - 그들이 발견되고 이름을 받기 이전에는 - 형체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 수법도 그 언젠가는 누군가 개척자에 의해서 착상되고 쓰임에 합의를 얻었으며 또 이름을 얻는 시간이 있었던 것이다.

수법의 착상, 그 배경에 대해서 우리는 보다 넓고도 열린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을 살아가고 이해하고 넓히려는 모두의 노력에 속할 것이다. 후지사와 선생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런 희망과 태도를 철학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런 태도가 우리 내면에 숨겨진 철학과 감성의 본질을 이룰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