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脫線

전학을 간 충북 근동에서는 제법 유수 하다는 제천의 J高 였지만 평준화 이전에

서울에서도 명문으로 첫손에 꼽히던 K高 와는 너무 많은 학력의 격차를 보였으므로

K고에서도 치열한 자리다툼의 뒤지지 않고 수석 까지는 아니더라도 앞자리를 놓치지 않던

적자생존 원칙이 몸에 배어있는 각축의 습관은 경쟁을 벌일 상대를 찾지 못하자

방향타를 잃은 배처럼 공부를 해야 하는 의미를 상실하고 갑자기 표류하기 시작했다

학업은 어떤 동기부여도 잡지 못한 내게서 점점 흥미를 잃게 하며

가속을 부치며 멀어져 갔고 빈자리에는 알지 못하던 허무감이 밀려왔다 

아마도 그런 허무의 무료함이 내게 치선(治宣)이라는 괴짜 노인을

조그만 경계도 두지 않고 마음 깊숙이 받아들이게 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늘어난 여유와 한가로움은 잡다한 것들로 여겨 멀리했던

주위에 관심꺼리를 찾아 헤매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스스로 찾아낸 승부세계에

발목을 담그고 재미를 붙여가는 자신을 뻔히 바라보면서 멈추는 것을 잊고 말았다

“바둑을 둘 줄 아시는가?”

인사를 나누지 않고 무심하게 오가는 것을 묵인만 하며 지내던 그가

심심파적을 깨며 드디어 내게 소통을 허락한 첫 대꾸를 건네왔다

“어려서 선친께 가는 길 정도만 배웠습니다

확실한 기력은 잘 모르겠고 어깨 넘어 추측으로 한 5~6급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럼 화점 네곳에 한 점씩 놓아 보겠나?”

칫수를 조금 내려 부르느라 더듬거리는 내 대답에 그는 잠시 내 표정을 한번 쓱 훓어 보더니 흑 돌이 든 통을 바닥에 대고 밀어 건네며 가늠하지도 않고 칫수를 정해 주었다

시키는 대로 한다면 4점을 붙이고 두는 것이다

내색을 하지 않았으나 몹시 불쾌했다

확인 되지 않은 상대방의 기력을 얕잡아 보는 가벼운 그의 행동은

괴팍함으로 포장돼 보였던 그간의 중후함이 이 정도의 경망한 오만 때문 이였나 하는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섣불리 그에게 다가가 값싼 늙은이의 허세를 맛보게 될

내 경솔함을 후회하며 그렇게 첫 점을 착수하며 시작됐다

같잖은 그의 오만을 철저히 부수리라 작심하고 필승의 전략으로 판을 꾸며갔다

화점을 근거로 날일 자 전개 등으로 무리하지 않게 실리 위주로 두어간 바둑은

중반 까지 알토란같은 집을 9곳에 성을 기반으로 탄탄하게 구축한 영토로

비록 군데군데 백의 성채가 보이긴 했으나 흑의 낙승으로 무난히 끝난 것 같이 보였다

한데 종반이 가까울수록 승리를 확신하며 작은 국지전에서 조금씩 양보를 감수하면서도

여유롭던 국면은 계가를 염두에 두며 반상을 확인할 때 쯤 에는

어느새 거의 집수의 차를 느끼지 못하게 줄어들어 있더니 종국에는

점차 다가오던 불안감을 넘지 못하고 반상으로도 백에게 1집의 승리를 헌납하고 말았다

“기재는 훌륭한데 실전감각이 무디고 몸을 너무 사리는 소심함이

승부의 연연하는 조바심을 만들고 사나이의 기상을 해치고 있는 것 같으이

잘 두었네!“

시험기간이라 일찍 귀가했던 그날의 조우는 불쾌함만 가득 남긴 채 끝이 났다

해가 지기 전에는 좀 채로 잘 들어가지 않던 평소에 그답지 않게

해는 아작 한발이나 남은 이른 오후였음에도 불구하고 복수의 한판도 허락하지 않고

웬지 그는 더 이상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몸짓으로

일언반구의 인사도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휭 하니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급작스럽게 돌변한 그의 태도로 나는 잠시 멍해지고 말았다

나이가 비록 어려 친구로 대할만한 연치는 아니라 할지라도 상대방의 기분 따위는

애초에 염두에도 두지 않는 몰상식한 그의 행동으로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철저하게 무시당했다는 더러워진 기분에 휩싸여 돌아오며 머릿속으로 복기를 시작했다

서로 간에 접전이라고 할 만한 전투도 없었다

그렇다고 뼈 아플만한 실착도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패인을 찾을 수가 없다

내가 그를 속인 것을 잃어버리고 나는 사기 맞은 놈처럼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기실 내 바둑은 나이에 비해 아무에게나 함부로 조언을 받을 만큼

그리 호락호락 한 바둑은 아니였다

유일한 소일 거리자 취미로 일본 유학중 익히신 바둑만을 즐겼던 내 선친은

책과 글이 걸린 일 외에는 소주 한잔 입에 대지 못하시는 천성 샌님이셨다

상당했던 것으로 어머님을 통해 전해진 그분의 기력은 일본기원에서

입문을 권유 받을 만큼 뛰어 났던가 본데 그런 인연 덕 이였는지 바둑은 놀이처럼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내게 스며들어 있었고 1968년 조치훈이 일본기원에

11세로 최연소 입단 기록을 세우며 전국이 떠들썩했던 그해에

고등학교 1년생으로 중앙일보가 창설한 제1회 전국 고교생 바둑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조 기연이라는 걸출한 상대를 8강에서 만나 입상은 못했지만

시골바닥에서 농락당할 그런 류의 바둑은 아니 였는데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그것도 9점을 깔고 둔 접바둑이라니 이게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집안의 기둥뿌리 까지 몽땅 다 뽑고 떠난다는 암에 걸려 선친이 돌아가시지만 않았다면

비록 생계수단으로 호평 받지 못한 길이였다 해도 가고 싶어 한

꿈이 서린 바둑으로 입은 마음의 상처는 너무도 크게 남아

장난삼아 둔 한판으로 자위 하려 애썼지만 패인을 찾지 못한 자신의 미욱함은

스스로 자신을 괴롭히는 악재로 자라나 결국은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울화를 억누르며 밤을 새우고 말았다

생각 같아서는 새벽 댓바람에 집으로 쳐들어가 두고 싶던 한 판으로

하는 수 없이 치러야하는 시험 시간은 천년처럼 길게 느껴야 했으며

퇴교 후 무심결에는 잠시면 닿았던 골목 입구를 천리처럼 멀게 만들었다

숨이 턱에 차 득달같이 그의 집 앞에 당도 했지만 천불이 나있는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해바라기를 즐기는 그의 모습도 평상에 늘 있던 접이식 바둑판도 보이지 않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