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고3인 셋째 딸아이가 대학 수시모집에 응(應)한다고 부산을 떨고 있다. 아비로서 별반 해준 것도 없어 늘상 가슴이 아팠었는데," 이 애비가 도와줄 것은 뭐 없겠니?" 라고 물었다.

이 아이는 느즈막하게 보았다. 둘째하고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난다. 집 사람이 애 낳으러 간다고 했을 때 은근히 아들이기를 바랬었다. 산부인과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빠를 찾는다. "축하합니다. 예쁜 공주님입니다." 간호사의 말에 실소부터 나왔었다. 그러나 첫 대면부터 어지간히 이뻐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신생아 임에도 불구하고 살이 토실토실하니 머리숱도 새카만 것이...

그 당시는 한창 목욕하는 재미에 빠져있을 때였다. 새벽4시면 바로 코앞에 있는 목욕탕을 매일 갔었다. 이놈과 함께 목욕하는 재미란...여하튼 이놈이 네 살될 무렵까지 데리고 다녔다.

또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무렵에 바둑을 가르쳤다. 하도 말이 많고 되바라진 소릴 해대서 엄청나게 똑똑한 것으로 착각을 한 것이다. 드디어 나를 닮은 놈이 나온 모양이다! 기쁜 마음에 19살 늦깍이로 바둑에 입문하여 프로의 길을 가지 못한 것에 대해 서운했던 마음을 이놈을 통해 투사한 것이다. 비록 여자지만 프로가 되어라!

막상 가르쳐보니 진보가 더뎠다. 빠르면 일 년 안에, 늦어도 삼 년 안에는 내 정도 실력이 되어야 하는데, 육년을 걸려 나에게 겨우 석점 치수까지 되었으니 기재(棋才)가 없어도 한참 없는 것이었다. 답답은 했지만... 그러건 저러건 이놈을 데리고 바둑대회에도 여러 번 갔었다. 물론 입상한 적이 없어서 속도 무척 많이 상했지만...

자신도 바둑으로는 틀렸다고 생각했는지, 초등6학년 때 공부로 전환하겠다고 한다. 그래라 허락은 했지만, 못내 서운했던 심정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러건 저러건 공부하는 것도 녹녹치 않았던 모양이다. 학교공부를 거의 시키지 않았으니 학업의 기초가 형편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가만히 관찰해보니 질긴 성격이다. 엉덩이를 한번 붙이면 웬간해서는 일어설 줄을 모른다. 우리 식 표현으로 <본드 체질>인 것이다. 요놈 봐라. 이 성질머리도 지 애비를 똑 닮았네. 그 때부터 머리 쓰는 요령,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우뇌 활성화 방법, 자신감을 갖는 비결 따위를 틈틈히 이야기 해 주었다.

그러건 저러건 성적이 쉽게 향상되지 않았다. 어지간히 돌인 모양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던가? 이차방정식의 근을 구하는 공식을 모르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연필하고 공책을 가져와라. 직각삼각형을 그려놓고 a²+b²=c²인 것을 증명하고, ax²+bx+c=0일 때 x값은 어쩌구 저쩌구 공식을 유도해가며 설명을 하고 있는데 졸고 앉아 있다. 너무 기초가 없으니 이해를 못하는 모양이었다. 천하의 답답한 일이었다. 이런 돌한테 바둑을 육년이나 가르쳤다니...후회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수시 원서를  SKY에서 S만 빠진 KY 내지 그와 동등 레벨의 무조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내겠단다. "야! 네 실력에 언감생심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뭐 어때요. 되면 다행이고 아니면 말죠." 하긴... 배짱까지 닮은 것 같다.

역사학을 전공하고 싶단다. 이것도 공부로 전환한다고 했을 때부터 은근하게 세뇌시킨 결과다. 인문학을 해야 제대로 된 학문을 하는 것이라는 소신과 어릴 때 뭘 몰라서 그쪽으로 가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을 이놈한테 투사시킨 것이다. "인문학을 하려면 그 기본이 문사철(文史哲)이라는데 문학과 역사 및 철학을 해야한다고 하니 역사해라. 그거 재미있고 좋은 것이다." 틈만 나면 강조했었다.

첫째와 둘째는 간호학을 했다. 집사람 언니 즉 애들 이모 영향을 받은 것이다. 간호사되어서 미국간호사 자격증 따고 미국오면 돈 많이 벌 수 있다고 꼬드긴 것이다. 거기다 애비가 백수이다 보니 빠르고 쉽게 취업할 수 있는 간호사가 되어 집에 보탬이 되겠다는 의지도 작용했다. 내가 길길이 뛰며 반대했었다. "사내 놈들이라면야 먹고사는 길을 찾는다지만, 계집애들이 뭔 돈벌 궁리로 그런 허접한 것을 한단 말이냐? 공부를 하려면 제대로 된 것을 해야지."  그 때 큰 놈이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아빠! 내 인생 내가 사는 겁니다. 아빠가 이래라 저래라 할 권리가 없어요." 그렇지... 자기 인생 자기가 사는 거지...그 말 한마디에 나가 떨어졌다. 그 두놈이 벌어오는 덕분에 그나마 집안이 그럭저럭 이렇게나마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고 보니 셋째 놈이 역사학을 한다고 설쳐대니까 은근히 기분 좋은 것은 사실이다. "야! 이 애비가 뭐 도와줄 거 없을까?" 자기 소개서 써 놓을 테니까 그거 손좀 봐달란다. 그런 거라면야 얼마든지지. 그러더니 학교 담임이 애들 추천서 써주는 것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단다. "걱정마라. 내가 추천서 써줄테니 그거 담임선생한테 갖다 주고 알아서 대충 베껴 써달라고 해라." 설마하니 내 딸에 대해 담임이 이 애비만큼 알까 싶어 흰소리를 하고 그 덕분에 추천서 여러 장 쓰는 작업을 했다.

자기소개서 양식을 보니 한심무인지경이었다. 지망하는 학과를 가기 위해 무슨 노력을 기울였는지 기술하란다. 내가 그랬다. "얘야! 솔직하게 쓰자. 거짓말로 꾸며대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이냐. 차라리 '저는 바둑 공부하느라 기초가 너무 안 되어 있어서 학과 공부 따라가기도 바빴어요. 관심은 있었지만,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낼 여가가 없었습니다.' 뭐 이렇게 쓰자." 

대강 이렇게 저렇게 서류 정리해서 한군데 접수를 마감시켰다. 앞으로도 몇 개 더 남았단다. 기대 반 걱정 반인 딸에게 또 한마디 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서류전형에 합격해서 면접 보라오라고 하면, 아빠가 E.H.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요약 정리해줄 테니 그거 달달 외워가. 동북공정하고 일본의 역사왜곡 실상도 정리해줄께." 이놈 얼굴이 환해진다.

조선상고사야 사십이 조금 넘었을 때 읽기 시작해 몇 번 독파를 했으므로 달달 외울 정도니까 별반 걱정이 안되는데, 그놈의 <역사란 무엇인가>책이 문제다. 이 책은 스무살 남짓 무렵에 한 번 읽어봤었는데, 기억도 안나려니와 박스에 쳐박혀 있던 책을 찾아서 책장을 펴보니 글씨가 깨알이었다. 노안으로 돋보기를 쓰고 보는 데도 읽기가 벅찰 정도다.

그러나 어쩌랴! 애비로서 해줄 것이 이런 것 밖에 없으니. 책을 대강 훑어보니 그 무렵에 읽으면서 줄친 것이 눈에 띈다. '짜식! 그땐 이런 문장에 필이 꽂혔었구만.' 실소가 절로 지어진다. 그러건 저러건 당분간 노안과의 전쟁을 치루어야 할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