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막걸리를 마셨다. 다정한 벗과 함께 <삼합>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세 병인지 네 병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퍼마셨고. 술자리를 일어나면서 보니 안주가 조금 남아있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까지는 기억한다.

눈을 떠보니 사위가 써득써득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시계바늘은 다섯 시를 조금 넘게 가르키고 있었고. 습관적으로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봤다. 빨리 뛰는구만. 이 정도면 분당 120회는 되겠네. 젠장! 어제 좀 마신 것이...헛웃음을 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 마신 다음날은 모든 것이 엉망이다. 엊그제도 친구들과 거나하게 마셨다. 그 여파로 그제는 아무 일도 못하고 하루 종일 자리보존만 했다. 어제는 제법 능률이 올라 한시 십여 편을 번역하고, 관련된 자료도 대강 정리했다. 느긋하게 담배 한 대 피워 물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한잔 안하시려나?

불감청이면 고소원이라던가. 얼씨구나 하고 나갔다. 하루 종일 노가다 하느라 힘들었단다. 날씨는 왜 그렇게 더운지. 땀을 거의 한 드럼통은 쏟았다며 오늘 같은 날은 한잔 빨아줘야 한단다. 무엇을 안주 삼을까 고민하다 홍탁으로 의견일치를 봤다.

제법 볼만한 주모는 전라도 영광 출신이란다. 주모와 흰소리 몇 마디 수작을 나누고는 일배 부일배. 슬그머니 친구 녀석이 뭘 하나 내민다. 부채였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반가운 마음이 앞서간다.

고교 동창인 이 친구는 대학 때 서예를 했다. 제법 조형감각이 있어 그런대로 볼만한 글을 써댔다. 이 여현은 한량임에도 불구하고, 서예나 서도에는 일자무식이지만 그럭저럭 보는 눈은 없지 않아, 감상하는 정도는 된다는 평을 듣는다. 어느 때인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거나하게 한잔 마시며 감히 해서의 대가라는 구양순체와 안진경체를 들먹이며 흰소리를 해댄 적도 있었다. 물론 추사도 그 안주거리에서 예외는 아니었지만.

대강 초여름 무렵이면 -아마도 단오쯤 일 때- 이 친구는 부채에 몇 마디 글을 써넣어 소위 단오선(端午扇)이라는 것을 지기(知己)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나도 역시 매년 받아오다 작년에도 올해도 소식이 없었다. 약간 삐친 마음으로 엊그제 술자리에서 그 서운한 심경을 토로했다. 자네 친구가 백수가 되니 이제는 그 흔한 부채조차 아깝든가?

아! 그랬나? 당연히 준 줄 알았는데 미안허이.

포장을 뜯고 쓱하고 부채를 펴보니 <坐華醉月>이라고 씌여 있었다. 둘이 다 술이 거나했으므로 혀 꼬부라지는 소리로 어느 시에서 따온 글귀라는데 동산에 앉아 꽃향기에 취하다 보니 어느새 달이 뜬 줄도 몰랐다는 요지의 말을 한다. 당연히 이래저래 한시와 서도로 그 잡담이 이어져갔고, 결국은 추사까지 안주 사격에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 <완당평전>까지 들먹이며 잘 쓴 글이네 제법 배운 놈이네 뭐네 하는 데까지 이르러 파회하였다.


<200만 화소짜리 핸드폰으로 찍은 부채사진> 

새벽녘에 일어나 컬컬한 목에 냉수 한잔을 들이켰다. 술기운이 불콰하지만 어쩐지 부족한 생각이 슬며시 일어난다. 해장(解酲)한답시고 어제 사다놓은 막걸리를 마신다. 다시 불콰해진다.

이백이던가? 장진주사. 또 한시에 장취(長醉)라는 단어가 제법 나온다.

사업을 말아먹고 도대체 잠을 이룰 수 없어서 매일 밤 잠자기 전에 소주 두병을 깠던 적이 있다. 술기운에 서너 시간 자고 다시 일어나 또 마셨다. 이렇게 취한 채로 삼일 사일을 보낸 적이 꽤 되었었다. 참으로 메마르기 이를 데 없는 장취였다.

오늘 모처럼 장취한다. 장취한 김에 나작에 이 심경을 글로 올려야겠다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권주가를 불러줄 꽃도 없고 술도 떨어져간다는 것이다.
하나 더. 해상도 높은 디카가 없음을 한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