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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일기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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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마 시절 - 가벼운 바둑, 힘든 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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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2월 14일) - 나의 아마 시절 - 가벼운 바둑, 힘든 바둑
정오를 눈앞에 둔 11시 52분.
76년.
난 그 해를 유난히도 길게 겪었다.
왜 그랬을까.
그건 그 해에 내 성장이 크게 이뤄졌기 때문이다.
난 그 해에 바둑의 큰 진전을 이뤘다.
난 그 해에 공부와 바둑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고마운 시간.
난 그 해에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는데 실패했다. 고마운 실망.
고교 3년에 읽은 소설책은 단 두 권.
전쟁과 평화.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실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바둑이란 무엇인가. 바둑을 업으로 한다는 게 무엇인가. 바둑의 시간은 그 역시, 겪어보는 사람에게만 존재하는가.
실로 공부가 많이 축적되는 시간은 길어지는 여름날의 한 밤 꿈 같은 거다.
왜냐?
안타까우니까. 안타까운 시간은 기억에 남는 것. 그렇게 보면 무난하겠다. 굳이 다른 효용함수를 들이밀 것도 없다.
바둑에 나의 불만이 쌓여있으니, 그건 바둑에 대한 나의 이해를 그대로 반영한다.
난 때로는 바둑이 매우 싫다. 단순한 푸념일까? 아니다.
76년 여름 나는 조대현 강만우와 함께 대만으로 떠났다. 충암학원 이홍식 이사장과 김수영 사범님을 모시고 떠났다. 가벼운 여행. 국가 대표로 바둑시합 간다기보다는 가벼운 여행으로 알았다. 이겨도 그만, 져도 그만인 그런 시합. 그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우리가 2대1로 이겼다. 각자 3국씩 두어 난 2승 1패.
대만에서의 나의 바둑
난 나중에 김수영 사범님께 꾸지람을 들었는데, 그건 내 바둑 내용이 엉망이어서 그랬다. 기보는 대만의 陳漢斌 군과의 대국. 陳군은 일본에서 수업을 받은 바 있는 학생으로, 조치훈 당시 七段과도 함께 생활했다고 들었다. 매우 잘 두는 바둑이었다.
수순 중 흑77로는 85로 백을 갈랐으면 그것으로 백은 손을 들어야할 판이었다.
바둑이란 묘한 점이 없지 않아서, 마음 편하게 두고 있으면 상대가 오히려 초조해지는 측면이 없지 않으니, 이 바둑 또한 그랬다.
입단 후에도 나는 불리한 바둑을 태연히 두던 때가 없지 않았는데, 그건 승부에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프로가 승부에 마음이 기울지 않는다? 그럴 수도 있다. 왜 그러면 아니 되나?
실로 나에게 바둑은 애증의 대상이었다. 성격이 많이 둥글어진 지금에도 그 일부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나는 굳이 이렇다 저렇다 다잡고 싶지는 않다. 나는 바둑에 쏟은 기회비용을 매우 크게 생각할 뿐이다.
그래도 김수영 사범님은 애태웠으리. 뒷날 중앙일보 지면에 실린 글을 일부 옮겨본다.
“초반 흑23 흑25를 허용해서는 白이 당한 모습. 사태가 이렇듯 심각한데도 우리 文군은 침착(?)하기만 해서 白32 白34 너무나 안일한 運營을 하고 있어 필자를 초조하게 만들었으니….”
실로 그랬다. 승부야 뒤로 하고 대만의 故宮博物館을 관람하는 것에만 맘이 쏠렸으니 어찌 승부에 집중할 수 있으랴. 무엇보다 입단대회 만큼 치열한 바둑이 아니라서 그랬던가. 인생의 기로를 결정하는 그런 승부가 아니라서 그랬던가. 그럴 수도 있다. 물론 모든 일에는 다 오랫동안 쌓여온 원인이 있을 법인데, 입단도 그러할 진대.
그래, 그래도 난 때로는 이리저리 관심을 분산시켰다. 그러나 76년엔 공부도 꽤 했으니, 그 당시 손에 잡을 수 있었던 바둑책은 거의 다 보았었다. 現代の名局 10권은 그 중에서도 많이 놓아본 책. 高川格, 吳淸源, 坂田榮男, 橋本宇太郞, 藤澤庫之助 - 이 다섯 분의 대국보였는데 묘하게도 후지사와 9단의 바둑만은 별로 손이 가닿지 않았다.
다섯 분 모두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갖춘 분이기에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믿는다. 요즘 후배들에게 특히나 조언하고 싶은 게 있다면, 최근의 바둑만을 보아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세상은 넓은 것. 요즘처럼 천편일률적인 바둑의 스타일만을 들여다보아서 10년 후의 자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당장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가벼운 여행이었지만, 그래도 돌아와서는 다시 바둑에 힘을 썼다. 가을은 바둑이 시작되는 시간. 프로를 지망하는 아마추어에게 가을은 입단대회와 서울, 대구, 마산, 울산, 부산 등지의 전국대회가 시작되는 첫 계절인 것이다.
나도 바둑에 집중했다. 책을 보고 바둑을 두고, 시합에 빠짐없이 나갔다. 아직은 입단 실력이 못 되었기에 큰 희망과 집념을 걸고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그 무엇이 있었다. 바둑의 세계가 약간씩 눈에 잡히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 12시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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