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어떻게 이어가나

1. 자기 응시에 대한 가벼운 경험 하나

근 4년 만에 바둑을 두어 보았다. 처음엔 위축된 모습으로. 행마가 자꾸만 아래로 아래로 처진다. 삶과 죽음에 민감하다. 안전을 도모한다.

며칠 두다보니 이래서는 아니 되겠다는 판단이 선다.
그래서 시도한 것이 두터움.
아니다. 싸움을 먼저 했나? 그랬던 듯하다. 싸움을 먼저 시도해 봤다. 하하. 당연히 깨진다. 깨졌다.

그래서 다시 시도한 것이 두터움.
당장 무너지지는 않는다. 그리곤 적당한 때에 싸움을 걸어본다. 약간 반상이 짜여진다. 물론 고수를 만나면 당장 무너진다.

시간에 큰 어려움을 느낀다.
초읽기에 온 몸이 조여든다. 이 몸이 이 몸 아니고 이 정신이 이 정신 아니다. 시간의 압박. 그 앞에 무너진다. 시간을 통제할 힘이 부족한 몸이 시간을 다룰 정신이 약한 몸이 시간을 주어진 대로 받아들이고 있으니 끝난 다음의 마음마저 불편하다. 어리석은 하루. 이틀.

그렇지만 그런대로 약간은 회복되었다. 물론 단순히 옛감각의 회복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옛감각도 그런대로 약간이야 회복되었겠지만, 무엇보다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약간이나마 바꿀 수 있다는 바로 그것이었다.

어떻게 바꾸었을까?

두터움이란 무엇인가.
싸움이란 무엇인가.

그에 대한 개념적 이해와 그것이 반상에서 어떤 마음을 기초로 주도되고 있는지를 가볍게 지켜보았다. 내면의 안정과 불안정, 무질서와 질서, 그런 것이 항상 그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수법의 선택에는 조급함과 불안이 뒤따랐다.
불안하구나. 그 마음을 인식하고 두니, 수법은 자연스레 부담감 없이 펼쳐졌다. 물론 당장, 금방 그리고 쉽게 수법이 손에 잡히지는 않았다. 다만, 그 현재상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이 도움이 되었다는 정도다.

입단대회를 생각해본다. 그 본선. 83년 가을에는 12명이 본선에 있었다. 하루에 두 판 또는 세 판을 두는데, 나흘 닷새를 긴장으로 보내야 했다. 참으로 힘든 승부. 그런데 그 이전과 달리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자신을 내려다 보는 것. 그것이 약간 가능했었다. 긴장을 지켜보는 자신을 그려보았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자신을 한 걸음 떨어져서 보는 것이니, 지나친 긴장이 오면 약간 통제할 수 있었다. “음.. 긴장하고 있구나. 별거 아니야. 그냥 견뎌내자. (그게 오래 가겠나.)” 긴장을 인식하는 그 자체로 이미 한 긴장 풀어버릴 수 있었다. 그것이 한 판 한 판의 대국에서 지나친 몰입에 들어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당시 잘했던 것은 아니지만, 긴장을 스스로 약간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했다. 의식적으로. 지금 돌아보니, 그런대로 잘 견뎌냈다. 긴장을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2. 약간은 곤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처음에는 몰랐다. 그냥 수법의 경계, 이리 제목을 붙이면 쓰기 쉬울 줄 알았다. 경계란 이리저리 오가는 것이고, 수법은 논리적인 답을 구할 수 있는 맥점 수준으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쓰게 되니, 이런 문제가 떠올랐다.

반상일기나 오로산책은 제목 그 자체가 선입견이 없는, 아무런 맛이 없는 단어였다. 그래서무엇이든 집어넣어도 충분히 소화될 수 있는 것이고, 실제로 단답형 글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렇지만 수법의 경계, 이 제목에는 “수법”도 “경계”도 뜻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뿐만 아니다.
그 동안 관심 영역이 다소 변했는데, 아직 그 관심을 충분히 소화해내지 못한 상태여서 그와 관련된 것을 반영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줄 알았다. 그러나 누가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단 말인가.

예컨대 분할, 내면화, 객관화, 스케치, ... 이런 개념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바둑을 이해할 때나 설명할 때 사용하면 좋을 그런 공간이자 도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작은 주제를 20개 남짓 생각했다. 글의 의무 같은 기분으로 구상했다.
 
그런데 그 구상과 함께 새롭게 떠올린 개념들이 이 글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하나의 주제 안에서 글이 완결되는 구조와 달리, 구상해둔 주제로 긴 호흡의 책을 한 권 쓰는 기분이 강하게 든 것이다. 마치 바둑의 발견 세 번째 권을 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마저 느낀다. 솔직히 이는 바라는 바도 아니고 그리 될 수도 없다. 그럼에도 그런 기분이 강하게 드는 글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하나 하나의 글 안에서 할 말도 다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읽는 입장에서도 “대체 무슨 말이야?” 할 분도 많을 것이다.

이 글의 맥락이 이렇다는 것을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많은 분들이 이미 아시겠지만, 글에서 주어가 사라진 것도 글의 맛을 건조하게 만든 배경이 되고 있다. 어느 순간 -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 사라졌다. 1인칭 주어가.

가볍게 읽고, 이런 세계도 반상에 숨어 있구나, 라는 정도로 받아들여주시기 바란다.
바둑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는지,
바둑의 세계를 과연 조금이나마 넓힐 수 있는지 여부는
욕심은 있지만 감히 바랄 수 없음을 절감한다.

3. 적진 속에 수가 있다

먼저 기보 하나 볼까.

1보(道知 생애의 1국)

도치 생애의 1국이다. 개인의 자부심이 서려있는 고된 1국이다.
자, 그렇지만 우리에겐 더욱 저 기보가 알려져 있는 이유는 좌상귀에서의 흑의 묘한 끝내기 수법 때문이다.

1도(고금의 묘수로 알려진, 수순의 묘)

흑1(실전 1보 흑225)부터 백12까지 절대의 수순으로, 이는 흑이 이 바둑을 1집 이기게 하는 절대의 길목이었다. 만약에 흑이 백집에서의 수순을 뒤로 하고 먼저 흑9 젖혀이으면(흑9 백10 흑11), 백은 손을 빼도 무방하다. 흑이 흑1 이하의 수순을 다시 두더라도 그 때는 백이 흑5에 대해 백6으로 두지 않고 백12에 붙여서 아무런 수도 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 그런데 이 글의 관심은 저 접전에 있지 않다.

20세기에 와서 가지와라 9단은 우변에 이미 흑에게 좋은 끝내기의 맥점이 있음을 밝혀 좌상귀 저 유명한 수순이 아니어도 이미 흑에게 이 바둑은 유리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을 보자.

2도

제1보에서 우변 흑243, 백244, 흑245, 백246. 그 수순을 잠시 보류하자. 그러면 2도가 남는다.

저 2도에서 수가 있다. 묘한 끝내기의 수단이 흑에게 있다.

3도

3도가 답이다. 절대의 수순으로 흑이 실전에 비해 1집 이상 이득인 것을 알 수 있다.

매우 흥미로운 수순이다.

그런데 이제부터가 이 글의 관심이다.

4. 형태와 심리적 저항

1도와 3도를 비교해 보자.

앞서 1도 흑3이 “석점의 중앙이 급소”라는 그 격언에 들어맞는 형태를 잘 응용한 묘수인 것을 알겠다.
3도 흑1 역시 다를 바 없는 형태의 급소 자리를 잡았음을 알겠다.

의문이 든다.

1) 왜 도치는 3도를 놓쳤을까.
2) 왜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저 3도를 발견했을까.
3) 1도와 3도, 그 두 형태는 같은 것일까.
4) 1도의 흑3과 3도의 흑1이 같은 자리에 놓였다고 할 수 있는가.

의문을 한둘 더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넘어가자.

이런 문제는 해결할 필요가 있는, 그런 중요한 주제인가?
그냥 그렇겠거니, 뭐 비슷한 거 아냐?

그리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글도 바로 앞서의 저 의문 4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은 못 하겠다.

그러나 이 글이 앞으로 제기하는 문제와 해결 방안은 그런대로 한 번 정도는 우리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그런 것이 아닐까. 그런 희망을 갖고 있다.

저 작은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글은 다음과 같은 개념에 주목한다.

심리적 저항.
내면화.
대칭.
이미지와 스케치.

별로 썩 잘 맞는 개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글을 썼다가, “어, 이 개념은 쓸모가 없네!” 그리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좋다.
만약 이 글에서 다루는 바가 의미가 없는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것도 매우 유쾌하다. 앞으로 그 문제는 접어두어도 좋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앞으로 이 글은 그 동안 반상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생소한 개념을 몇 개 사용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 개념에 대한 엄밀한 검토는 하지 않을 것이다. 바둑에서 별로 아니 쓰이고 있다 뿐이지, 세상에서는 널리 쓰이고 있는 개념들이니까.

독자 여러분이 의문을 제기해 주시고 질정(叱正)을 널리 주신다면 그것이야말로 고마운 일이다. 글이 더 나아질 것이다. 책을 쓴다는 기분을 가지고 있기에 별로 유쾌하지 않은 칼럼식의 글이지만, 독자의 질정이 많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부족한 점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제기한 의문은 다음 글에서 답하도록 하겠다.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