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은 수법을 앞선다(1)

저번에 대비(大飛)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 기억이었고 희망이었으나 착오로 보였다. 그런데 그 글이 오로에 오른 날, 우연히 바로 그 大飛가 나온 장면과 글이 나타났다. 1973년 일본 제12기 명인전 도전기 제3국. 백을 잡은 본인방 이시다의 자신만만한 착점 백12. 그 장면이 다음 1보이다. 오청원이 이 장면에서 말했다. 중국에서는 백12와 같은 수를 大飛라고 부른다고.

1보(대비의 바둑) (1보는 실전으로 백12는 보통은 잘 두지 않는 수. 그러나 가볍다. 둘 수 있다. 이후 흑의 실리도 크지만 백의 세력도 그에 못지않다.)

1도(대비의 바둑-1) (1도 흑1은 약간 과하다. 백2로 비껴서 흑에게 다음 수가 없다.)

2도(대비의 바둑-2) (2도 흑1 정도는 흑도 둘 만하다. 서로가 둘만.)

우연이 아닌가. 마침 바둑책을 이것저것 살펴보고 있었으니 우연이 아닌가. 그렇겠다. 그렇지만 이런 기분도 든다. 우연히 그러나 필연적인 사건으로서 등장했다고. 특별한 것도 아니라고. 사실 이런 사례 비슷한 것은 우리 모두 적지 않게 경험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좋은 설명이 하나 있다.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지만, 위대한 심리학자 융(C. G. Jung)의 동시성 원리가 바로 그것이다. 둘 또는 그 이상의 여러 사건 또는 사상(事象)이 동일한 리듬을 갖고 있을 때 그 여러 사건 또는 사상은 - 우연으로 보이지만 - 서로 연결되어 드러나는 경향이 있다고. 제대로 된 이해인지는 몰라도 대충 그런 것을 일컫는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암묵적인 가정, 그 본질, 뭐 그런 것을 설명하려고 할 때 쓰이기도 한다.

이런 대화도 있었다. 영국의 어느 학자가 말했다. 중국에는 근대 서구 문명이 이룩한 그런 과학적 성과가 없었다고. 융이 답했다. 아닙니다. 중국엔 서구와는 다른 이론적 지향을 지닌 과학이 있습니다. 그 과학은 동시성 원리에 기반한 것입니다. 인과성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비인과적 원리에 기초한 것으로 충분히 설명력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흥미롭고도 진지한 것으로, 이와 관련해서 좁은 머리에 떠오르는 책은 다음. “몸과 우주,” “기(氣), 흐르는 신체,” 앙리 마스페로의 책 한둘. 앞의 두 책은 일본에서 나온 것인데 번역도 좋다. 마스페로는 뛰어난 도가(道家) 연구가. 중국 전문가.

동시성을 이야기 할 때 빠뜨리기 힘든 개념들이 있다. 리듬, 동조(同調)현상, 장(場), .. 이런 것들은 서로가 매우 밀접한 개념들로 다맥락, 공감(共感), .. 역시 놓칠 수 없다. 아마도 지난 20-30년간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단편적이지만 꽤 많은 연구가 쏟아져 나온 것으로 안다. 관심이 있다면 자료는 상당하지 않을까 싶다. 아, 참. 중국의학의 사상사(또는 연원)에 대한 이해 또한 넓은 시야를 안겨줄 것이다. 점(占)이나 사주(四柱) 같은 것의 암묵적인 가정(假定)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려면 이런 개념들을 폭넓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런 개념들은 바둑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에도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중국과 한국, 일본과 같이 다맥락적 문화를 지닌 나라에서 바둑이 큰 호응을 받고 있는 이유 역시 이런 시각에서 하나 찾을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반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그런 점에 대해서도 좋은 시사점 이상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보는데 여러분의 견해는 어떠신지? 반상은 다맥락이 흐르는 세계 아니던가.

大飛 이야기가 동시성 논리나 리듬과 같은 것에 이르렀는데, 리듬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이 필요한데 솔직히 이 글은 딱 부러지는 정의를 할 힘이 없다. 천천히 다루면 아니 될까. 사전적(辭典的) 정의(定義)를 할 힘을 이 글은 갖고 있지 못하다. 

질서, 패턴, 조율(調律), 파동, 물결, 바둑 속에 대국자가 스며드는 것/ 대국자 속에 바둑이 스며드는 것, ... , 떠오르는 단어들이지만 자신이 없다. 제대로 된 정의 하나 하고는 싶지만 과연 가능할까. 난(難)문제다.

대국을 한다. 두 대국자. 돌을 주고 받는다. 돌의 리듬이 있고 감정의 리듬이 있다. 서로 간에 공감대가 흐른다. 그 내용은 어떨까. 함께 어울리기도 할 것이고, 또 서로를 튕겨내려고도 할 것이다. 단판 승부에서도 그러하겠지만, 3번승부, 5번, 7번, 10번기 등에서는 그 리듬이 더욱 다채롭게 변할 것이다. 아마추어든 프로든 일생의 바둑 리듬? 없다 할 수 없겠다.

바둑과 관련된 리듬으로 우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1) 먼저 승부의 리듬. “이번 5번 승부는 뭐가 이상해. 투지가 끓어오르지 않아. 그 결정적이었던 두 번째 판에서 그만 홀려서 진 다음에는 무언가 맥이 풀렸어.” 바둑이 잘 안 될 때 흔히 찾는 이유의 하나겠다.

2) 다른 차원은 생활. 다음 날의 대국을 위해서 정상급의 기사들은 어떻게 행동하나? 어떻게 리듬을 잡아가나? 적어도 며칠 전부터 생활을 절제한다. 그것이 리듬의 출발. 후지사와는 그 좋아하는 술을 두어 달 전부터 끊는다던가? 그 무서운 집중력. 정말이지 그리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다. 후지사와는 술을 끊고, 조치훈은 오래 전부터 하루 하루 힘을 활기를 축적해간다. “주인은 언제나 대국 전날이면 활기가 넘칩니다. 며칠 전부터 조금씩 힘을 길렀다가 바둑을 둘 때 한꺼번에 폭발시킨답니다. 그런데 이번 기성전에서는 남의 일같이 무심하기 때문에, 저래 가지고 바둑을 둘 수 있는지 걱정입니다.”(조치훈 부인의 말씀)

3) 다음도 리듬의 문제에 속할까.
지난 4월 19일. BC card 배 4강전에서 이세돌 9단이 박정환 9단과 대국할 때 국면이 마땅치 않았었다. “오늘은 손을 빼는 게 이세돌 9단의 컨셉이네요.” 이현욱 7단의 해설이었는데, 백4(실전 백68) 백8, 백10을 두고 한 말이었다.(2보 참조)

2보(손빼는 컨셉)

서로가 어려운 국면이었으나 형세는 백에게 좋지 않다고 여기는 기사가 적지 않았는데, 바로 이 장면에서 이세돌 9단은 우상귀를 살리는 한 수 대신에 그 한 수를 주변의 두터움으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물론 의식적으로 새로운 컨셉을 찾겠다는 것은 아니나, 형세의 흐름으로 보아서 뭔가 새로운 리듬감을 구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 장면까지의 돌의 리듬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변화를 구하고자 했던 것. 단지 그뿐이겠으나 역시 리듬의 변환에 대한 예민한 감촉이 없다할 수는 없었다. 

바둑이 불리할 때는 패턴을 바꾸는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유리한 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변화를 추구하려는 노력이 필요 없다. 아니,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면 바꿀 수도 있겠지만, 유리한 자의 입장에서 그런 노력은 쉽게 나올 수 없는 것. 불리한 입장에서는 반상의 리듬을 어느 순간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평범하지만 널리 알려진 인생의 변화, 그 출발이 실패와 같은 인생의 곤궁(困窮)과 관련이 있음은 반상의 변화에서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이런 예도 있다. 먼저 바둑을 감상하자.

3보(다까가와의 어린시절)

이시다가 쓴 “필승의 접바둑” 중 다까가와(高川) 어릴 적 시절 접바둑을 검토한 것인데, 그 중 ‘하수의 수준’에서,

“하수에는 온갖 수준이 있다. 본국처럼 白의 뛰어들기에 아래쪽에 붙여끄는 수준이 있는가 하면(3보에서 우변 흑10 흑12를 말함이다.), 다음 1도의 흑2로 위쪽에 붙여 빵때림을 허용하여 건너가는 사람도 있다.
1도는 안 좋다. 그러나 2도처럼 공격을 하라고만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직 힘이 붙지 않은 사람은 1도처럼 응수해도 좋다고 생각된다. 무너지지 않고 집을 차지하여 길게 끌고 가는 것이 일단 중요하다. 힘도 없는데 2도처럼 두어 무너질지도 모른다. 이른 시기에 무너지면 바둑두기가 싫어진다.
힘이 붙게 되면 2도 처럼 공격해 보는 것이 좋다.
지식이란 자기 자신의 기력에 맞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1도(하수의 수법 - 아쉬운가)

2도(하수의 수법 - 어려운가)

자, 그럼 어떤 면이 다까가와의 재능인가? 그것이 리듬과 어떤 관계?

“출발 때는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씩 강해지기 시작했다. (3보) 흑24 이하 흑54까지는 순조로웠는데 백을 작게 가둬놓고 살려준 것이 훌륭했다. 백51, 55, 57로 건너가게 한 것은 불만이 없다.
高川 소년은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지만 우변에서의 싸움을 보노라면 작전이 철저히 일관되어 있다. 속된 플레이를 연출하면서도 맥이 통한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소년은 반드시 강해진다.“

접바둑에서도, 수법은 약해도 전체를 이끌어가는 안목, 그것이 힘이 있고 일관성이 있으며 용기가 있으면 충분하다. 반드시 강해진다. 바로 이런 안목의 일관성, 그것 또한 리듬이다. 여기 다까가와의 반상은 그런 리듬을 어린 다까가와가 재능으로 갖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자, 그렇다면 수법은 약해도 맥점엔 미숙해도 반상을 자기 자신 앞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으면 - 그런 리듬을 대국자 스스로 느낄 수 있다면 - 그것으로 바둑의 승부도 강해지는가? 수법이란 역시 하위의 개념인가?

그럴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