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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일기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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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의 승부 - 공부하는 기사들 - 나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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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12월 1일) - 5년간의 승부 - 공부하는 기사들 - 나도 했다
아침 8시 0분.
밤새 바람이 흔들리더니, 진눈깨비가 내렸다. 올해 들어서 처음 만나는 눈인가. 서설 瑞雪인가. 12월은 나에게 특별한 계절이었다. 눈이 많이 내리던 서울의 외곽 남가좌동에서 나는 술을 더 이상 마시지 않겠노라는 결심을 한 적이 있다. 1984년 12월의 중순에.
그 때 함께 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임선근과 조대현이었다. 밤새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 아침의 바람에 휘날리던 그 화려했던 눈발. 자동차 타이어 길만 몇 줄 그어져 있던 도로. 멈추어선 듯한 시간.
그런 한 때가 나에게 있었는데, 나는 여름엔 그 점에 대해서는 그 어떤 조짐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는 어떻게 알까.
데카르트 방식? 각성 覺性? 각성 覺醒?
일반인이 생활에서 얻는 방식으로는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 하면서 얻을 것이다.
나는
프로로서의 나는
프로로서의 나를
내 동료와 선배들로부터 찾았다.
대국, 술자리, 커피 한 잔, 한국기원 건물 밖의 풍경, …
그런 사물들이 나를 찾아주었다.
희망은?
희망은 나를 찾아주지 않나?
미래에 있을 법한 나의 얼굴.
임선근은 술친구도 술친구지만, 종범이 못지않은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들 그만 못하랴,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눈에 쉽게 보이는 것이었다. 그는 부산이 고향이라 - 아직 결혼도 아니 한 때라 - 서울에 오면 여관에서 묵었는데 그 친구 방에 가면 바둑판이 있었다.
그 친구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기사들이 묵는 여관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YMCA 옆 골목 약 30 m 앞에 있는 용일여관이었는데, 그 여관은 기사들이 포카 등 게임을 할 때 자주 애용하던 것이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여관은 둥근 마당을 입 구 口 형으로 건물이 에워싸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는 작은 화단도 꾸며져 있는, 전형적인 여관이었다.
여관에는 언제나 바둑판이 비치되어 있었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에 여관에 묵더라도 그 날 둔 바둑을 꼭 한 번은 복기해보고 싶은 것이 기사들의 생리. 달리 연습바둑을 두지는 않았다. 내가 만난 20대 기사들은 - 지방 기사들은 여관에서 지낼 때 바둑판을 꼭 옆에 하나는 두고 있었다. 그리곤 내일의 시합에 대비한다든가 또는 오늘의 바둑을 복기해보곤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지방 기사들의 일상이었다. 서울에 올라오면.
좁은 여관방에서 바둑을 복기한다? 담배 연기도 가시지 않은 방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보였다. 담배는 당시 기사들의 애호품.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방에 담배가 가득차도 사회 또한 묵인하는 풍토였다. 시대의 표상 같은 것이었을까.
좌우간 나는 기사들의 열정을 알 수 있었다.
지방 기사들이 서울의 여관에 묵을 때, 그들의 방에 갔을 때 더욱 잘 알 수 있었다.
그들은 - 당연하게도 - 바둑에 젊음을 걸었었다.
쉬어야 할 곳에 바둑판을 비치해서 바둑을 공부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뭐했을까.
나도 공부했다.
내 입단하고 난 다음에 실력이 늘었다는 증거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승부를 기다릴 줄 아는 것.
다른 하나는, 중앙으로 한칸 뛰는 맛을 안 것.
한칸-1
아래 기보에서 흑1 한칸은 누구나 쉽게 잡을 수 있는 급소이다. 이 장면, 이 한 수.
그러나 아래 (한칸-2)에서 백3은 쉽지 않은 결단이다. 흑4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백3을 택했다. 흑4가 오더라도 A의 끝내기가 크고, 또 백B도 급소로 상변이 별 거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백3은 좌변에 대해서도 두텁다.
한칸-2
그러나 실전에서 - 내 바둑이 아니다 - 대국자는 백3 대신에 4를 택했고, 흑에게 3 모자를 당했다.
승부를 기다릴 줄 아는 것과 중앙으로 한칸 턱 하니 뛰어두어, 호흡을 가다듬는 것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라 하겠다. 아마도 대국 시간이 4시간으로 길어져서 그런 호흡이 생긴걸까.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책은 이미 웬만큼 보았기에 새로운 책을 구할 필요는 없었다. 대신 최근의 실전 기보를 놓아보는 것, 그것이 공부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무엇보다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 기사실에 나가서 기사들의 바둑을 보는 것, 대국을 보는 것, 그것이 많았다.
프로가 되어서 좋은 것은,
프로들의 의견을 옆에서 들을 수 있다. 그것이었다.
비유가 적합한지 몰라도
바닷물에서 놀면 작은 멸치도 짜지만
민물에서 놀면 큰 잉어도 싱겁다.
프로들 속에서 생활하면 자연스럽게 프로로 동화가 된다.
생활도 바둑도.
내 바둑 실력은 프로들이 만들어 주었다.
동료, 선배, 후배들이.
아침 9시 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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