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러다임과 통념 >

(하루 속히 연재글을 올려야 하는 입장이라 조심스럽습니다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단상을... ^^)

 사람은 생각을 할 줄 알기에 위대하기도 하지만 생각을 할 줄 알기에 위험하기도 합니다. 한 때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신봉한 나머지 큰 환란을 야기하였고 요즘엔 자본주의가 지나치게 유행하여 지구의 자원을 바닥내고 사회에 정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가 최고의 덕목이라고 믿고 있지만 민주주의는 비 민주의 가능성에 대한 방어의 장치일 뿐이지 결코 이상향은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정치 제도는 사실 왕권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명한 군주가 강력한 권한으로 통치를 하면서 위대한 군주의 격에 맞는 인재들을 주위에 두고 면밀하게 정국을 운영할 때 가장 이상적인 통치가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왕도 사람인지라 결국 죽게 되고 권력이란 게 세습되면서 결국엔 수많은 문제가 불거지게 되는 일입니다.

 누구나 뻔히 아는 이야기가 화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패러다임’ 즉 ‘통념’ 때문입니다. 한 때 공산주의가 진리인줄 알았지만 결국 진리가 아닌 패러다임이었습니다. 민주주의도 진리 같지만 역시 패러다임입니다. 혹시 나중에 예수가 재림해서 천년왕국을 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아니면 한 백 년이나 이백 년 쯤 지나 인간은 정치에서 손을 떼고 컴퓨터에게 모든 행정을 일임하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사람의 수명은 보통 백 년을 넘지 않습니다만 어떤 사람은 천 년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사춘기 시절에 굳어진 사고방식으로 평생을 살아갑니다. 보통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며 지나가는 젊은 여자를 보게 되면 이상하게 기분이 상합니다. 아마 연약한 여자를 보호하고 싶어 하는 본능에서 비롯된 감정이겠지만 대개는 권위 의식과 피해 의식 등으로 인해 반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0세기 중반의 미국에서도 여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일은 금기시 되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 후엔 어떠했는지 해외여행을 다녀보거나 미국 드라마를 자주 보는 사람들은 잘 알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앞으로 몇 십 년 만 지나면 젊은 여자가 길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다니는 일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고 화를 내었던 사람은 패러다임의 문제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등학생 애들이 담배를 피운다고 머리통을 쥐어박는 일은 거의 진리에 가깝습니다. 분명이 금해야 할 근거가 있지요. 하지만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고 화를 내는 일은 근거가 좀 빈약합니다. 물론 담배가 남자보다 여자에게 더 해롭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가 있기는 하더라도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남녀의 신체적 차이점에 있어서도 통념이란 녀석은 묘하게 끼어듭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입니다만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에선 ‘페니스’란 단어를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도 거시기를 거시기라 부르지 못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서는 카페와 같은 공공장소에서나 오프라 윈프리 쇼 같은 방송에서 ‘페니스’와 ‘버자이너’를 거론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난잡한 농담이 목적이 아닌 진지한 토론과 설명 정도라면 얼마든지 언급할 수 있는 말입니다. 당연히 세상에 존재하는 물체이며 그것을 부르는 이름이니까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금기시 되고 있으며 그러한 분위기는 수십 년은 더 갈 것 같습니다.

 한 때 ‘한겨레’ 신문의 사설에서는 금기시 된 그 명사를 그것도 여성의 것을 두 번 세 번 언급하면서 홍길동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지만 우리는 그것을 그것의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고 씩씩하게 주장한 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완고한 한국 사회가 사설 몇 줄로 쉽게 바뀌기는 쉽지 않겠지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회라는 것은 늘 보수와 진보의 대립 속에서 유지되고 발전합니다. 그리고 대개 기득권을 쥐고 있는 쪽이거나 그 쪽과 친한 사람들은 보수를 견지합니다. 기득권과 거리가 먼 사람들은 물론 진보 성향인 경우가 많지요. 양비론으로 흐르게 될 것 같아 조심스럽기는 합니다만 보수와 진보의 양측으로 나뉘어 서 있는 사람들은 한 쪽으로만 시선이 고정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법적인 문제가 아닌 윤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혹시 내가 패러다임에 빠져 있지 않은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박정희 기념과 건립 문제라든가-좀 오래 된 얘기이지만- 최근의 촛불 정국 문제 등을 언급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바둑 이야기에 집중하는 게 좋겠지요?

 결국 최근의 이세돌 문제가 화두가 될 수밖에 없겠군요. 가뜩이나 분분한 의견이 난무하고 다분히 신경질적인 대립들로 인해 짜증이 쌓여가던 분들에게는 죄송합니다만, 때로는 찬물을 대차게 끼얹을 때 시원하게 해결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한 번 발언을 허락해 보심이 어떨런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세돌 사범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위의 사람에 대해 인상 깊은 기억이 있습니다. 일 년 전쯤엔가 모 대회에서 이세돌 사범이 승리를 한 후 인터뷰를 하던 장면입니다. 여자 아나운서는 축하를 하고 대국 내용과 소감을 여러 차례 묻고 있었는데 이세돌 사범은 시종일관 피곤한 기색으로 건성건성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아니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는 심지어 아나운서가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하고 버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때 화면에서 아나운서가 당황하던 모습도 참으로 가관이었습니다. 저는 한 일 분 정도 진행되는 인터뷰를 보면서 배꼽을 잡고 웃어댔습니다. 거의 방송사고와 다름없는 사건이었으며 다 웃고 난 뒤에는 사실 저도 이세돌 사범에 대해 불쾌한 기분도 들더군요. 마치 방송을 보고 있는 저한테도 불성실하게 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현장에서 아나운서가 해설자들에게 마이크를 넘겼는데 해설자들도 당황하다 못해 얼굴이 흙빛이 되어 간신히 방송을 마무리 짓던 모습은 나름 상당히 인상적이었고 제가 보았던 MBC의 수많은 방송사고들보다 훨씬 잊혀지지 않을 사건이었습니다.

 최근에 이세돌 사범이 좌충우돌하면서 벌인 일들은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절대로 용서될 수 없는 행동일 것입니다. 하지만 진보적인 시각에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용서하고 이해하려 할 게 틀림없습니다. 제 성향은 진보적이어서인지 그 날 이세돌 사범이 인터뷰에서 보인 태도에 대해 불쾌하긴 했지만 쉽게 넘어갔고, 그 후 이세돌 사범을 성원하고 그의 기보를 흠모하는 일에 있어서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연세가 좀 지긋하시고 보수적인 마인드를 지닌 분들이라면 그날의 사건만으로도 이세돌 사범에 대해 정나미가 떨어져서 안티팬의 입장에 서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세돌 사범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앞으로 20년, 30년 동안 이 사회의 주력으로 계속 남아 제2, 제3의 이세돌을 볼 사람들입니다. 또한 길에서 담배를 물고 다니는 젊은 여자에게 다가가 담뱃불을 빌리고 텔레비전에서 거시기에 대한 정확한 명칭으로 발음하는 것을 듣게 될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세돌 사범을 반대하는 분들인데요. 혹시 진리 쪽에 서 있다는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한국 바둑의 미래니 전체 바둑인을 위함이니 하는 대의 전제들은 결코 명제는 될 수 없으며 그저 통념일 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법과 규칙에 의해 제재될 일 외의 사안을 가지고 도덕적 잣대로 규정하여 힘을 가하려 하거나 비난으로 몰아가는 일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위대합니다. 때론 생각을 고집하여서 위험하기도 하지요. 모쪼록 한쪽으로 치우쳐서 비극으로 치닫는 일만은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에... ^^ ‘프로 1급’에선 이러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 찬돌의 아버지는 어떻게 해서 죽었을까요? 주리의 엄마가 자살한 뒤에 주리의 아빠는 어디로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는 걸까요? 사람들의 집착과 욕망으로 인해 빚어진 비극. 그 가운데서 찬돌은 과연 정신적인 성찰을 이루고 자아를 세울 수 있을지... 기대하시라. 올 여름을 강타할 바둑 이야기의 블록버스터. 프로 앤 1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