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첫 번째 문제는 찬돌의 도박 중독이었다. 찬돌은 주리를 곁에 둘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실천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도박중독은 그리 호락호락한 병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몇 번인가 키스를 나누고 찬돌이 주리의 가슴 위에 손을 가져다 대었을 때 주리가 심한 저항을 하지 않았을 즈음에 이르러 다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 후 두 사람은 싸우고 또 싸웠다. 여자는 경찰청에 출근하면서 도박꾼들과 사기꾼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했고, 여자의 남자는 기원으로 출근하면서 호구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그리고 둘은 만나기만 하면 그 문제로 싸웠다. 물론 일방적으로 당하는 쪽은 찬돌이었는데, 그럴 때마다 찬돌은 항거를 거두고 두 번 다시 기원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두 번째 문제는 찬돌이 더 이상 주리를 따라서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부터 발생했다. 주리는 복음주의에도 율법주의에도 경건주의에도 신비주의에도 속하지 않은 평범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복음을 주입하는 일을 지상 과제로 삼지 않았고, 식사 시간 때마다 기도를 하거나 취침 전후에 신께 문안 인사를 드리는 태도를 중시하지 않았으며, 방언 능력을 받아 보겠다고 부흥회에 쫓아다녀 본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종교관은 확고하였다. 인간은 신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보다 신을 의식하며 사는 게 나으므로 최소한 매 주 교회에 나가 신을 알현하는 일은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찬돌로서는 처음에 교회에 따라 나가 엄숙하고 평온하며 사랑이 넘치는 분위기에 적응하는 일이 어려울 게 없었다. 그런데 차츰 목사의 설교가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주리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는 주일 헌금과 십일조 헌금 내는 일을 중시 하였으며 율법주의에 매몰되어 행동강령을 나열하는 것을 좋아했다. 목사의 설교는 매주 찬돌을 향해 던지는 경고를 주제로 삼은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예배 후에 목사가 살갑게 다가설 때 찬돌이 쌀쌀맞은 태도를 취하였고 눈치가 빠른 목사는 그날 이후 찬돌을 형식적으로 대하기에 이르렀다. 찬돌은 주리에게 차라리 교회를 옮기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것은 주리에게 있어서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주리가 엄마를 잃고 힘든 시기를 보낼 때 친척들은 곧 그녀의 곁을 떠났지만 교회 사람들만은 변함없이 그녀를 찾아와 보살펴 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 두 가지 문제로 인해 찬돌과 주리의 사랑은 점화되지 못한 채 불발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상태는 주리보다는 찬돌에게 더 견디기 힘든 고통으로 다가왔다. 조금만 더 순조로웠으면 찬돌의 손이 주리의 봉긋한 가슴 위에서 잠시 머물다 마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게 분명했다. 비교적 바람직한 진도를 이루었던 그 날을 돌이켜 볼 때면 찬돌은 거짓말에 서툰 자신의 성격이 저주스러웠다. 그가 조금만 덜 솔직했더라면 그녀의 가슴이 한 손 안에 다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던 걸로 그치지 않고 지금쯤 그녀의 젖을 빨며 감격해 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와 마음껏 어우러진 뒤에 후희를 나누며 이렇게 말했을 게 분명했다. 사랑을 나눌 때의 주리 모습이 제일 예쁜 것 같다고. 하지만 자책을 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미 직장 구하는 걸 포기한 채 기원에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해 버렸고 기름진 외모의 목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선언해 버린 뒤였다. 그렇다고 새삼 거짓말을 시작한다고 잘 될 리도 없는 노릇이고 이미 빈정이 상해버린 목사에게 다가가 친한 척 연기하는 건 적성에 맞지도 않았다. 어쨌든 주리의 가슴에 이어 엉덩이 쪽을 한참 눈독들이고 있던 찬돌로서는 주리와의 잦은 충돌로 인해 키스조차 쉽지 않게 된 요즘은 살 맛이 나지 않았다.

 한편 주리는 찬돌을 차버려야 할지 계속 만나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녀는 계절학기 때에 범죄심리학을 청강하였고 도박중독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다. 도박중독은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에게 전염되기 쉬웠다. 고학력자보다는 저학력자가 더 빠져나오기 힘들며 스릴을 즐기려 하는 수컷들의 본능 깊은 곳에서 비롯된 습성이었다. 그리고 긴장과 해소가 반복되면서 분출되는 엔돌핀이 내인성 아편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알코올중독이나 약물중독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끊기가 힘든 게 도박중독이었다. 다만 근래에 찬돌로 인해 바둑 실력이 부쩍 늘은 주리로서는 바둑중독과 도박중독을 같은 질병의 선상에 놓고 생각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주리는 의존적인 성향을 지닌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남자를 평가할 때 연봉이나 신분이나 배경 따위를 고려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러한 주리의 눈에도 찬돌은 비전이 없어 보였고 청사 안에서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선배들이나 상관들의 안정된 모습과 비교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리는 양손에 떡을 쥐고서 어느 쪽 떡을 먼저 먹을까 고민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는 비겁함과 무자비함에 대해 강박적인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가 청솔 기원에서 찬돌과 바둑을 두고 난 뒤 훗날 애프터를 허락했던 이유는 찬돌의 기풍에서 호방함과 배려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백주임의 바둑 스타일에서 끈적끈적하고 기회주의적이며 무자비함이 느껴졌던 반면 찬돌의 바둑돌을 놓는 손길과 기풍에선 그야말로 수담을 나누는 것 같은 편안한 느낌이 전해져 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주리는 정에 이끌려서 잘못된 판단을 되돌리지 못할 만큼 고지식하거나 여린 성품은 아니었다. 만일 찬돌이 지금처럼 계속해서 그녀와의 관계를 악화일로로 몰아간다면 그녀로서도 별 수 없다는 생각을 굳혀갈 테고, 서로간의 불성실한 태도와 약간의 무례함을 교환한 뒤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만하자는 말이 나올 게 분명했다. 주리는 찬돌과 헤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자 눈물이 아른거렸다.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까지 깊은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눈물이라니 스스로 멋쩍었다. 주리는 자신이 그 동안 많이 외로웠나보다고 생각하며 그날 잠시 비쳤던 눈물을 얼른 찍어내며 그것을 애써 무시하고 있었다.

 계절은 겨울로 접어들었고 아침저녁으로 거리에선 겨울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실내에 있다가 거리로 나설 때 첫 숨에 콧속으로 파고드는 냉기에는 증발해버린 여름과는 다른 냄새가 났다. 찬돌은 기분 좋은 얼굴로 숨을 한껏 들이키면서 부천 북부역 광장으로 나서고 있었다. 이른 저녁의 역전은 노점상들과 오고가는 사람들로 인해 붐볐다. 찬돌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새삼 세상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의 걸음은 적당히 느렸고 그의 시선은 아무 곳에나 머물렀다. 신장개업한 점포, 나레이터 모델, 인도 한가운데까지 나와 있는 노점상, 수레 주위에 서서 국수를 먹는 사람들, 거리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반찬을 팔고 있는 가판 상인, 수다스런 여학생들, 연인들, 친구들, 예의에 익숙지 않은 자유분방한 젊은이들, 혼자 서 있는 남자, 등짐을 잔뜩 진 채 거리를 떠도는 부랑자, 길가의 택시들, 야한 속옷을 입은 마네킹들이 전시된 속옷 가게, 또 다른 무리의 여학생들, 또 다른 연인들, 강아지를 안고 가는 아줌마...... 그러고 보면 세상 구경은 할 만 했다.

 찬돌은 오늘 주리와 완전히 화해하였음을 확인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분이 좋았고 오랜만에 자신이 사는 도시의 거리 곳곳을 둘러볼 여유가 있었다. 지난 가을 동안 찬돌은 기원 출입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그것을 생색내는 찬돌에게 주리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같이 참석하기를 더 이상 강요하지 않겠다고 말하고는 대신 시내의 유명한 교회에서 운영하는 인터넷 예배에 함께 접속하자고 제안했다. 찬돌은 자신이 끝내 교화 대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만 같아 입맛이 썼지만 그렇게 나마 절충안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을 만큼 기뻤다.

 돌이켜 볼 때 찬돌과 주리의 사이가 다시 발전적인 관계로 회복되는 계기는 의외로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그것은 주리가 바둑 과외를 맡아 가르치고 있던 제자를 찬돌에게 떠넘기려 하던 일에서부터였다. 꼬마의 이름은 지호이며 나이는 열 한 살이고 자폐아였다. 지호는 주리가 사는 동네에서 알게 된 어느 경찰 공무원의 아들이었다. 주리는 지호의 엄마와도 친했고 언니라고 부르면서 자주 왕래하였는데 평소 지호의 자폐 증세를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거실 구석에서 바둑판을 놓고 알까기 놀이를 하는 지호를 보고 주리는 오목을 가르쳐 보면 어떨까 싶어서 접근했다. 처음에 지호는 오목을 두자고 하는 주리를 멀뚱멀뚱 바라만 볼 뿐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지호 엄마가 의외의 정보를 주었다. 지호는 오목을 잘 두는데 좀처럼 두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주리는 지호를 달래가면서 왜 오목을 둘 줄 알면서 안 두냐고 물었지만 지호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주리는 끈질기게 지호를 설득해서 결국 지호와 오목을 둘 수 있었다. 그리고 지호의 오목을 두는 실력이 훌륭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까지 많은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당연히 이길 줄 알고 백을 쥔 주리는 40여 수까지 버티다가 결국 지고 말았다. 주리는 지호에게 오목을 잘 두면서 왜 안 두려고 했느냐고 물었지만 지호는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주리가 다시 한 판 더 하자고 하자 지호는 망설이더니 대뜸 백돌이 든 바둑통을 자기 앞에 가져다 놓는 것이었다. 그 때 주리는 지호가 자존심이 세고 승부욕이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목이 다시 진행되자 지호의 엄마는 지호가 웬 일로 한 판 더 두는가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주리는 직관력이 발휘되면서 지호의 비밀이 무언지 알 것만 같았다.

 지호가 아빠한테서 오목을 처음 배운 것은 일곱 살 때였다. 그런데 여덟 살 무렵이 되자 지호는 부모 중 누구와도 더 이상 오목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부모는 그 이유를 모른 채 아이가 싫증이 났는가 보다고 여기고 말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지호는 엄마 아빠의 오목 두는 실력이 너무나 형편없었기 때문에 흥미를 느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주리는 달랐다. 돌을 놓는 속도도 빨랐고 30수 이전에 항복을 하는 경우도 적었으며 가끔은 무승부도 나왔다. 어느새 지호는 주리를 친구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날 처음 주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 후로도 주리는 지호네 집을 방문할 때마다 지호와 오목을 두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주리는 지호 엄마의 넋두리를 듣게 되었다. 그것은 아들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는 자폐아 자식을 둔 엄마의 당연한 고민이었다. 그래서 주리는 지호를 위해서 좀 더 현실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지호에게 바둑을 가르쳐 보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찬돌은 지호와의 첫 지도대국에서 석 점을 깐 흑에게 석 집으로 이겼다. 그리고 다음 판에는 두 점을 깔게 한 뒤에 일곱 집을 이겼다. 두 판 모두 속기로 진행되었고 지호의 기력은 주리가 사범 역할을 더 이상 감당치 못하겠다고 선언할 만큼 좋았다. 찬돌은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바둑돌을 쓸어 담고 있는 지호를 바라보며 뒤에 앉은 지호의 부모에게 희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그것은 지호에게 천재성이 있다는 사실과 한 번 가르쳐보고 싶다는 의견이었다. 지호의 부모는 눈물을 글썽이면서까지 기뻐했다. 그런데 가슴이 벅차오르는 건 찬돌도 마찬가지였으며 이미 앞일에 대한 계획과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현역에서 한창 활약해도 시원치 않을 스물일곱이라는 젊은 나이에 후진양성이나 하고 있게 되었다는 한탄을 할 법도 한데 의외로 긍정적인 생각이었다. 나아가 찬돌은 자신의 방황이 드디어 끝이 났으며 운명이 왜 그에게 바둑을 두게끔 이끌었는지 이제 그 이유를 찾은 것만 같았다.

 찬돌은 지호 부모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주리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주리는 문득 찬돌의 뜨거운 시선을 느꼈으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해 억지로 외면하고 있었다. 지호는 찬돌을 쳐다보았다가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이 주리의 얼굴이었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찬돌을 돌아보았다. 그 때 주리도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다시 찬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호의 부모도 어리둥절한 얼굴로 찬돌을 쳐다보았다. 찬돌은 앞에 앉은 두 제자가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여 좀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지호와 주리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