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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민은 터벅터벅 장충단 길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그곳을 리무진을 타고 올라가서 뚜벅이가 되어 걸어 내려오는 모습을 관찰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인생무상’을 외쳤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차민은 호텔 현관에서 그를 기다리던 리무진을 일부러 타지 않았을 뿐이었다. 차민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걷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발자국이 놓이는 곳마다 필 소더버그라는 인물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악수를 하고 떠나기까지의 모습들이 떠오르고 있었다.

 소더버그 회장의 첫인상은 미디어에서 보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신의 미남자이면서 총명함과 예리함을 겸비한 호남이었다. 소더버그가 60대에 접어들면서 조금씩 보이던 흰 머리는 이제 그의 머리를 회갈색으로 바꾸어 놓았지만 그는 그다지 늙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를 만나는 사람들은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 같다는 착각을 느끼기도 했다. 그것은 차민도 마찬가지였고 소더버그가 그의 어깨에 손을 가볍게 댄 채 거실로 인도할 때는 친밀감이 들기도 했다.

 처음엔 약간의 오해가 있기도 했지만 그 후로 지도대국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아니 돌이켜보면 그건 지도대국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정의해서 아까의 대국은 외국의 명사가 만 달러를 지불하고 한국의 프로 바둑 기사에게 도전했던 도전국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기력은 약하지가 않았다. 못해도 소위 전국구라 불리는 국내의 아마 강자들에게도 밀리지 않을 실력이었다.

 바둑이 중반으로 흘러갈 때 즈음에 이르러 차민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놀랍게도 소더버그는 돌을 깔지도 않은 바둑에서 차민을 이기려고 하고 있었다. 보통 지도대국은 배우려 하는 아마추어나 가르치는 프로나 적당히 긴장의 끈을 늦춘 채 대국에 임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더버그는 사력을 다해 수를 계산하고 침착하게 돌을 내려놓고 있었다. 사실 차민이 처음 이번 일정을 수락했을 때에 고생을 좀 할 것을 각오하기는 했었다. 만 달러라는 거액을 받는 만큼 상대방이 몇 번을 더 두자고 해도 거절할 수 없을 것을 예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은 우습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를 불러들인 상대는 두 번째 대국 같은 건 아예 계획에 없다는 듯 첫 대결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붇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대국이 끝났을 때 소더버그는 깨끗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차민은 퇴계로 근방에 이르러 다시 한 번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현재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찝찝함의 원인을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좀 더 근원적인 문제로 접근할 필요를 느꼈다.

 프로와 아마의 치수가 두 점인가 정선인가 하는 해묵은 논란은 사실 농담과도 다름없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대국 형식을 어떻게 가져가는가에 따라서 다른 결과에 이르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한국 바둑 리그의 30초 10회로 진행되는 속기 바둑일 경우에는 아마 강자가 석 점으로 패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 앞서 거론한 신과 인간 사이의 넉 점 치수는 인간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의 이야기이다. 10초 바둑 같은 초속기로 둔다면 인간은 신에게 아홉 점 이상을 깔고도 이길 수 없을 게 분명하다.

 그런가 하면 아무리 상대가 아마추어라 할지라도 시간을 충분히 갖고 실수를 하지 않는다면 프로라고 해서 쉽게 이길 수 있는 게 아니다. 더구나 여러 명의 상대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협력 플레이를 펼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부분도 농담 같은 측면이 있다. 무협 영화와 같은 활극을 보더라도 하수들은 아무리 힘을 합쳐도 절대 고수를 이기는 경우가 없다. 그리고 그것은 바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4급 기력을 가진 사람이 아무리 여럿이 모여 의논을 하며 협공을 펼쳐도 1급 기력자를 상대로 바둑의 결과를 크게 달리 할 수 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실력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농담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마 정상과 프로의 치수가 정선으로 가능하다면? 그런데 아마추어 여럿이 협공 플레이를 펼쳐서 덤벼든다면? 과연 프로라고 해서 호선으로 무조건 이길 수 있을까......

 차민은 미구엘이라는 소년의 실력이 소더버그보다 낫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들 두 사람의 재능은 비슷해 보였는데 소더버그는 경험이 많은 듯했고 미구엘은 수읽기와 계산력이 뛰어나보였다. 그렇지만 미구엘은 필요한 대국 수를 채우지 못한 상태였던 게 분명했다. 다시 말해 강자가 되기 위해선 기존 강자들과의 대국 경험을 일정한 분량만큼 채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융통성이 생기고 다양한 스타일의 상대를 만났을 때 대처하는 게 가능해진다. 그런데 미구엘의 나이가 열서너 살 정도가 맞다면 지금의 실력은 빠른 건 아니었다. 한국에선 그 나이에 프로에 입단하는 영재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결국 미구엘은 동아시아 3국의 앞선 바둑 풍토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아마추어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차민은 오늘의 대국에서 큰 집 차이로 이겨야 했다. 시종일관 난전이 펼쳐진 바둑이었기 때문에 그는 한 번도 긴장을 푼 적이 없었다. 미구엘과 소더버그가 중요한 부분에서 의논을 하고 놓아보기를 하는 통에 실수가 나올 법한 곳에서 훌륭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기는 했지만 두 사람 모두 미숙함을 완전히 극복하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두 번 정도 선수를 놓쳤고 모양의 묘와 선수의 묘를 살리지 못해 한두 집 씩 이득 볼 수 있는 곳을 여러 번 놓쳤다. 더구나 끝내기에선 차민이 컨디션이 좋았기 때문에 몇 집 더 먼저 챙길 수 있었다.

 그런데 종국의 결과는 백 석 집 승이었다. 호선이었다면 아홉 집 반 승이었을 테지만 사전에 아무 언급 없이 그냥 바둑을 두어나갔기 때문에 정선으로 계산하는 게 예의상 옳았다. 하지만 차민으로서는 석 집 승이나마 프로의 자존심을 세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식의 생각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바둑은 전반적인 흐름상 자신이 져야 하는 바둑이었고 어느 부분에서 그렇게 흘러갔는지 아직 감을 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퇴계로에 다다른 차민의 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어디 가까운 곳에 기원이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복기를 해 볼 생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심 한 복판에 기원이 있을 리는 만무했다. 차민은 왕십리 쪽에 있는 한국기원으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택시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빈 택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택시를 기다리는 동안 차민은 소더버그가 배웅을 하느라 따라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에게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소더버그는 차민에게 혹시 박찬돌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냐고 묻고 있었다. 그러나 차민은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가 모른다고 하자 소더버그는 쓸쓸한 미소를 짓고는 이내 화제를 바꾸었다. 차민은 소더버그가 묻던 이름의 당사자가 누구일까 궁금했지만 알 도리가 없었다.

‘박찬돌? 혹시 세돌이 동생? 아니지. 성이 다르군.’

차민은 그렇게 혼자만의 썰렁한 농담으로 오늘의 일정에 대한 종지부를 찍으며 다가오는 빈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청솔기원은 창문을 열면 가로공원이 내다보였다. 화곡동 가로공원은 도로의 중앙선 일대를 차선 한 개 정도 너비로 길게 공원을 만들어 놓은 구간이었다. 구로동에 있는 거리공원에 비하면 초라할 정도로 규모도 작고 사람이 들어가서 쉬는 경우도 거의 없었지만 그런대로 도시의 아스팔트 사이에 쉼표의 역할은 하고 있었다.

 찬돌은 창가에 서서 늦은 저녁의 거리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가로공원 주변의 거리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찬돌의 손에 들린 종이컵 안의 커피는 식어 있었다. 등 뒤에선 바둑돌 놓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잠시 뒤에 한 무리의 손님들이 기원을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바둑돌 놓는 소리는 한 곳에서만 들려오고 있었다. 찬돌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허탈한 웃음 한 조각을 뱉어 냈다. 그리고 도로 가에 주차된 차들을 다시 훑어보기 시작했다. 특별히 수상한 낌새를 보이는 차량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한 시간 가까이 내다보고 있었는데 차안에서 담뱃불이나 핸드폰 불빛 같은 게 비치는 차는 없었다. 형사들도 나름대로 공을 들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찬돌은 아까부터 창밖을 향해 손을 흔들고 싶은 걸 참느라 애쓰고 있었다. 차라리 그가 형사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유치한 두뇌 게임의 종료를 선언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건 매너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 때 뒤에서 백주임의 나름대로 열심히 연기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또 이겼네. 미안해서 어쩌나? 아마 5단 맞아요? 나한테 석 점으로 지면 4급이라는 얘기가 되는 건데.”

백주임과 바둑을 두고 있는 상대는 말이 별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에 백주임과 바둑을 두기 시작할 때는 백주임에게 넉 점을 깔게 하고 두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자신이 석 점을 깔고도 여간해서 이길 수가 없으니 열이 받쳐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금 백주임과 바둑을 두는 상대는 기원이라는 데를 처음 와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처음 바둑을 접한 뒤에 5단까지 오를 수 있었고 그래서 자신이 아마 5단의 기력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원에선 1급 이상은 없으며 인터넷에서 최고 높은 7단이나 9단까지 올라간 사람들도 기원에 와서 2급 대접을 받는 일은 흔했다.

 찬돌은 종이컵을 창틀 위에 내려놓고 백주임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백주임이 상대방이 내미는 오천원을 챙기면서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반면에 상대방은 표정이 어두웠다. 돈을 잃어서라기보다 자신의 실력이 잘 쳐줘야 3급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백주임은 3급이나 아마 5단이나 다르지 않다는 말을 안 해주고 있었다. 2급 다음에 1급, 1급 다음에 1단, 1단에서 여섯 단계를 더 올라가 7단에 이르러 아마 강자의 반열에 오르는 구조는 인터넷에서만 통용되는 것이었다. 기원에서 3급, 2급, 1급이면 아마 5단, 6단, 7단과 같다고 볼 수 있었다. 다만 ‘단’의 사용은 대회에 나가 순위 안에 들게 되어 협회로부터 실력을 공인 받았을 때 얻는 별도의 명칭일 뿐이었다.

 찬돌은 백주임 앞에 앉아 표정을 구기고 있는 주리가 안쓰러웠지만 지금으로선 달리 도울 방법이 없었다. 현실세계에서는 아마 7단까지 아홉 단계나 더 올라가야 하는 줄로 착각하고 자괴감에 빠져 있는 그녀는 위장 잠입을 한 여형사이고 찬돌은 피의자였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이 삼류 극단에서 졸속으로 준비한 서툰 연극 같았고 아직 연극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어쨌든 찬돌의 입장에선 오늘 밤의 공연이 성사되기까지 일조를 하였기 때문에 먼저 판을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여형사가 기원 안으로 버젓이 들어와 위장이랍시고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은 아무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지난 번에 옥상에서 찬돌과 마주쳤던 일을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번 작전에 공을 들이는 과정에서 잠복 팀 내에서는 바둑을 꽤 잘 두는 걸로 알려진 그녀가 손님으로 위장해서 기원 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자는 누군가의 아이디어가 나왔을 때 그녀 역시 당황했을 것이었다.

 난곡 기원에서의 사기 바둑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을 확보하지 못한 경찰은 주범까지 놓쳐 버렸기 때문에 백주임을 물고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주임은 찬돌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정확한 이름은 물론 주소도 몰랐고 서로의 핸드폰 번호도 나누지 않았다고 했다. 다만 부천에 살고 있다는 것과 성이 박 씨여서 박사장으로 부르기로 했다는 것. 그리고 역곡 기원에 자주 들르는데 거기서 오다가다 만나서 일을 꾸미게 되었다는 게 백주임에서 얻어낸 전부였다. 그나마 백주임을 단독범으로 몰아 검찰에 넘기겠다고 협박해서 이끌어낸 실토였다. 지능과의 장과장이라는 사람은 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백주임의 본명이 장병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회를 포착하고 세 치 혀를 최대한 놀려댔다. 장과장과 백주임, 아니 장병엽은 같은 문중이며 과거 정치판에서 이름을 날렸던 장세동이나 자신이나 ‘세’ 자 돌림이기 때문에 ‘병’ 자 돌림을 쓰는 사람은 삼촌뻘이라는 소리까지 해가며 우선 경계심을 허물었다. 그리고 주범을 현행범으로 잡기만 하면 백주임, 아니 장병엽을 기소 대상에서 빠지도록 입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백주임이 아닌 장병엽이 앞으로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할 수 있도록 지인과 여자도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다. 같은 문중 사람끼리 서로 도와야 하며 범죄의 소굴에서 건져주는 건 그의 의무라고 진심 어린 말투로 설득했고 결국 성공했다.

 백주임의 탈을 쓰고 있는 장병엽과 주리는 다시 바둑을 시작하고 있었다. 주리는 찬돌이 있는 쪽을 흘끔거리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지나치게 시선 관리를 하고 있는 걸로 보아 찬돌을 의식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찬돌의 눈에 그들 모두의 연극은 어색해 보였고 어차피 주리의 등장으로 인해 연극의 각본은 실종된 채 애드립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뒤엔 구회장과 그의 친구 한 명이 기원으로 들어와서 연극의 2막을 열기로 되어 있었다. 구회장은 원래 찬돌과 절친한 사이였다. 과거에 구회장이 큰 사기도박에 빠져 전 재산을 잃을 뻔 했을 때 찬돌이 구해준 일이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백주임은 찬돌이 구회장한테서 종종 돈을 따가는 모습을 보고 호구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구회장과 찬돌이 밤새 가짜 수표를 가지고 내기도박을 하고 경찰이 들이닥치면 백주임을 골려주기 위해 꾸민 장난이었다고 오리발을 내민다는 게 찬돌의 계획이었다. 난곡에서의 혐의에 대해 경찰이 추궁을 한다고 해도 사실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원래는 사기도박을 계획했는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중간에 그만 두고 자리를 떠났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피해자도 없었고 사기도박 모의만으로는 구속된다 해도 집행 유예로 끝날 게 뻔했다. 다만 남는 것은 찬돌과 백주임 사이의 관계가 극적이면서 저절로 정리된다는 사실 뿐이었다.

 시각이 자정 가까이에 이르고 주리가 백주임에게 넉 점을 깔고 간신히 바둑을 이겼을 때에 찬돌은 아무래도 판을 엎어야겠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서울 지방 경찰청 지능 범죄 과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이상 기원을 전전하며 남의 돈이나 따먹는 노릇도 더는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디서부터 뒤틀려 버린 인생인지는 알 수 없어도 그나마 바둑을 두면서 생활을 할 수 있는 삶도 이제 종국을 앞두고 있었다. 만일 한 여자를 만나 짝을 이루게 된다면 취직을 해야 할 것이고, 바둑은 그야말로 취미생활로 남겨두거나 끊어버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후회는 없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어차피 프로페셔널도 아마추어도 아닌 ‘프로 1급’의 삶을 살게 된 지금의 모습은 찬돌이 선택을 해서 얻은 결과는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그 과정에는 떠올리기도 싫은 가족의 해체가 있었다.

 다만 끌리는 한 여자가 운명처럼 다시 나타나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런데 그 여자와 좋은 관계를 기대해 볼 수 있으려면 경찰에 끌려가 피의자 신분으로 취조를 받는 건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모두들 가면을 벗고 연극이 무산되었음을 알릴 때가 되었음을 확신한 찬돌은 카운터로 가서 기원 원장에게 전화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

“구 회장님. 접니다. 이 쪽으로 오고 계시는 중이시죠. 그런데 오실 필요 없어졌습니다. 예. 자세한 말씀은 다음에 뵙고 말씀 드릴게요. 예. 그럼.”

백주임과 주리는 찬돌이 통화하는 내용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어서 당황했지만 두 사람 모두 내색을 감추느라 아무런 말도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리고 찬돌이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찬돌의 목소리는 차가왔으며 그 동안 연상인 백주임에게 버릇없이 굴긴 했지만 이제껏 보이지 않던 명령조의 말투를 내뱉고 있었다.

“백주임. 밖에 나가면 도로 건너편에 검은 색 소나타가 보일 거야. 그리로 가서 보면 니가 잘 아는 얼굴도 몇 명 있을 테니까 가서 전해. 오늘 밤에 계획된 일은 다 취소되었으니까 그만 퇴근들 하라고 말야.”

백주임은 일이 중간에 그만두게 되었다는 자체의 문제에 대해 몹시도 당황스럽다는 반응을 먼저 보이고 있었다.

“야. 어떻게 된 거야. 오늘 판을 만들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뒤늦게 백주임은 뭔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앞에 서 있는 찬돌의 침묵으로 인해 아까 찬돌이 했던 말이 다시 생각났다.

“뭐? 밖에 누가 있다고?”

찬돌은 백주임에게 마지막 인사를 고했다.

“조용히 일어나서 나가. 그리고 앞으로는 서로 만나는 일이 없으면 좋겠어.”

백주임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전후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주리가 보기에도 백주임은 찬돌이 꿈에도 눈치채지 못하리라 확신하였고 그만큼 너무나 놀란 게 확실해 보였다.

“박사장......”

미안함과 후회가 담긴 백주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찬돌은 대답이 없었다. 결국 백주임은 말없이 일어나서 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주리도 더 이상 그곳에 앉아 있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잠시나마 일단은 찬돌을 체포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사리에 맞지 않다는 판단이 섰다. 그래서 주리도 백주임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갈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찬돌이 그녀에게 떠나지 말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전에 없던 공손한 말투였다.

“광녀 씨는 그냥 앉아 계시죠.”

찬돌이 말한 ‘광녀’라는 단어의 의미를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은어 비슷한 것이 생겼다는 사실에 묘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일단은 밖의 동료 형사들에게 알려져서는 곤란하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주리는 복화술 비슷한 낮은 어조로 찬돌을 부르고 있었다.

“야.” 

찬돌은 능글맞거나 비겁하게 태도를 이어가지는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그녀에게 함께 있기를 제안하고 있었다.

“나하고도 한 판 둡시다. 아까 잠깐 보니까 기풍이 좋아 보이던데.”

주리는 찬돌의 눈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범죄자들이 지닌 특유의 뭔가 켕기는 그림자가 전혀 없었다. 심지어는 소년이 소녀를 바라보듯 하는 맑은 눈을 닮아 있다는 착각까지 드는 게 이상했다. 그 때 백주임은 주리가 찬돌 앞에서 다시 자리에 앉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면서 기원 문을 닫고 있었다.

 찬돌은 주리가 앞에 마주앉자 기분이 좋아졌는지 연신 크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리는 찬돌의 그러한 모습에 함께 웃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상대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와 동료 형사들이 함정을 파놓고 빠지기만을 기다렸던 사냥감이었다. 그리고 그 사냥감은 아직 기가 살아 있었고 사냥꾼들을 향해서 언제라도 뿔을 겨눌 수 있는 위험한 존재였다. 주리로서는 비록 상대가 웃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찬돌이 내뱉은 진심어린 고백에 그녀의 심장은 차츰 빨라져갔다.

“그거 알아요? 이 쪽 계통에서 바둑을 잘 두는 미인이 얼마나 귀한 대접을 받는지? 흐흐. 반가워요. 광녀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