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반상의 안목은 심리적 통찰을 반영하는 걸까

바둑을 이해하려고 할 때 개인사(個人史), 심성(心性), 인격, 그런 것과 바둑이 결부되는 것이 거부감을 주던 때가 있었다. 입단하기 전부터 이미 그런 맘은 갖고 있었다. 그러나 왜 그러한가. 그에 대한 답은 스스로에게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었다.

지금도 조심스럽다. 예전만큼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긍정하는 맘은 여전히 크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은 묘한 이해를 한 자락 풀어내고 싶었는데 역시 나이가 들어가는 탓인가.

연륜이 쌓이고 철학이 깊어지면 바둑의 승부도 반상의 내용도 커지는 걸까.
감히 말할 수 없는 주제다.

철학을 가지면 강해질 것인가. 노력하면 철학은 얻어질 수 있는 것일까.
감히 다루기 힘든 주제다.

연륜만 쌓여서는 통찰이 생길 수 없다.
통찰이 없다면 철학이 기초할 기반이 없다.
약간은 말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핵심은 집중력일까.
아니면 철학으로 집중했을까. 집중의 힘을 얻었을까.
삶의 궤적으로 볼 때 집중력의 재능 위에 철학을 노력했던 거 아닐까, 그리 본다.

그것을 짐작하게 해 주는 말씀.

“단 한 수만이라도 후세에 남길 수만 있다면.”

삶의 의미와 무의미.
삶의 空性.
그것을 반상에서도 들여다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말이다.
반상의 의미를 그것으로 모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표현이다.
반상에서 삶의 空性을 확인하는 것을, 그런 정체성의 확인을 중시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유불리를 떠나서,
반상을 어떻게 이끌 것인가. 언제 어떻게 승부를 던질 것인가.
그 안목을 중시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말이다.

후지사와의 단편을 봄으로서 그 얼마나 힘든 여정이었을까를 감탄해본다.
그래.
이런 인간은 예외적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바둑을 두는 자, 모두가 이 양반처럼 될 수도 없고 또 그런 세상도 인간사 아니다.

우린 후지사와가 아니다.
공성을 확인한다는 마음이 든다고 해서 누구나 저리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칫하면 이리 되기 쉽다.

지는 것을 정체성으로 오해하기 쉽다.
하나의 예로, 자꾸 지면 지는 것을 편하게 받아들이도록 무의식적으로 노력할 수 있다. 그러면 내면에서 패배와 空을 정체성의 하나로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습관을 가질 수 있다. 그 내면화가 깊어지면 실제 승부에서 지는 쪽으로 반상을 - 무의식적으로 - 몰아가는 경향이 생긴다.

박탈감이나 패배감을 자화상으로 갖는 버릇이 드는 것은 경계해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나 승부를 일상으로 하는 승부사에게는.

이런 태도가 후지사와의 태도와 무슨 차이?

몇 가지 차이를 이해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
후지사와의 일생에서 쉽게 그리고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는 단어들이 있다.

공부.
집중.
금주(禁酒).
바둑을 제1로.

그리고 그의 표현들.

“이리 두어야 진짜 우주류.”
“이리 두어야 바둑.”
“에라 모르겠다.”
“광대무변이야, 광대무변.”
“이 한 수라고 본다.”

VI. 공간 감각은 구별하고 나누려는 감각

우리의 공간 감각은 프로든 아마추어든 그리 다르지 않다.
예민함 정도는 다르겠지만 그러나 기본적인 토대는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예전에 “바둑의 발견 2”에서 이런 거 질문했었다.

      4도 (순장바둑의 초반 배석)

      5도 (중국 바둑의 초반 배석)

      6도 (일본 자유배석도 아래에서의 고전적인 秀策流 포석)

이 순장 바둑의 배석도를 보고 많은 기사들이, 많은 아마추어들이, 많은 문외한들이 이리 감정을 표현했다.

정체된 느낌을 받는다고. 아름답지 못하다고.
왜 그랬을까.

돌 때문에 불안했나? 그 배치된 것에? 그럴 수 있다.
여백 때문에 불안했나? 좁아서? 그랬을 수 있다.
사실 돌을 중심으로 사고하느냐, 아니면 공간을 중심으로 사고하느냐?
그에 대한 답은 아직 구하지 못한 상태인데 아마 이런 것도 일조(一助)한 듯하다.

대칭성이 너무나 강하다는 것이다.
그거 때문에 생동하는 감(感)을 느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중국식 바둑의 배석도는 안정감을 얻었는데.
수책류 포석도 안정감을 얻었는데.

잠시 이 단계에서 다음 설명2를 남겨두고자 한다.
당장 이 문제를 다루지는 않겠지만, 잠시 고려할 가치는 충분한 의문이다.

(있을 법한) 설명 2
--------------------------------------------------------------------
아마도 이런 이유도 있을 법하다. 순장바둑에서는 중앙이 없다. 
그래서 답답했을 수 있다. 중앙에는 자유가 핵심인 것이다.
중앙의 개념적 질감에는 자유가 핵심인 것이다.

긍정한다면 말할 수 있다.
중앙에서 의식의 공간을 키우는 것은 따로이 작업을 해야 한다고.
중앙에서 안목을 키우는 것은 따로이 작업을 해야 한다고.
--------------------------------------------------------------------

19줄 반상에서 공간의 감각은 무엇을 가장 큰 속성으로 하나?

예전에 “바둑의 발견 2”에서 이리 말했다.

“반상은 19x19의 현재 방식이 가장 흥미를 더해준다. 그것은 흑5가 백6의 착점을 최대한 제한한다는 것, 즉 흑5의 권력이 최대한으로 되는 공간이 19x19라는 점에서 확인된다. 그 공간에서 협공과 벌림이 가장 조화로운 관계를 갖는 것이다.”

“그러면 백6이 최소화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흑5의 권력이 최대한 높아진다는 것만을 의미할 뿐이다. 백6도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높일 수 있다. 어떻게? 착점 흑7의 권력을 최소화하면 된다. 현재의 바둑 수준에서 그런 백6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논증할 수 있는지는 회의적이지만 말이다.”

      7도 (백6을 어디에 두나? 어디에 두어도 백은 공격 받는다.)

7도에서 보듯이, 흑5까지는 지난 2천5백년 바둑에서 발견한 가장 전형적(典型的)인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어느 포석도 이와 본질이 다를 바 없다. 그것이 3연성이든 신포석이든. 중국식이든 슈사쿠의 물레방아 포석이든.

알 수 있다.
19줄 반상은 그 공격적 성향을 필연적으로 내포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그것이 그 세계이다. 주어진 세계이다. 마치 우리가 이 지구 위에서 살아갈 존재로 등장한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운명이다.

19줄 자체가 이미 바둑은 공격적인 성향의 조건 세계임을 알려준다.
결정된 것이다!

그렇다면 진화의 방향과 그 한계도?
프로의 마음, 그 현재의 조건과 한계도?

그것까지는 말 못한다. 그러나 충동은 살아있다.
그렇다!
그리 말하고픈 충동이 강하게 남는다.

이 충동을 운명론적이라거나 결정론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다.
모든 분야에서 논리는 이미 결정론적 이미지를 가슴에 안고 있다.

적어도 21세기 초 현재, 인간은 설명을 하려는 욕심을 갖고 있다.
그렇지 않다고? 아니다. 누구나 그러하다.
설명이란 무엇일까.
결정하려는 충동의 실현.

반상을 돌아보자.
반상은 모호하다.
그럴 때 우린 반상을 설명하려는 충동을 벗어나지 못한다.
착점한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이 곧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설명은 구별을 요구한다.
반상에서 그 구별은 나누고 분할하고 자르는 노력으로 나타난다.

VII. 왜 후지사와를 얻으려고 하는가

8도를 보자.

      8도 (상하좌우로 반상을 자르는 백1)

저 백1은 반상을 어떻게 자르고 있나.
상하(上下)를 좌우(左右)로
좌우를 상하로
바꿔놓고 있다.

단순히 모자(帽子)라고 부르는 행마 아닌가?
그러하다. 그러나 모자는 그 구도를 얻기 위한 행마 중 하나일 뿐이다.

삭감이라고 해서 충분하지 않나?
충분하지 않다. 삭감은 상대의 세력, 또는 모양의 규모를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상의 의미는 그 “삭감”이라는 단어에서 얻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수직선은 수평선에 비해 눈으로 부여잡기가 더욱 힘이 든다. 이것은 흥미로운 사실인데, 중력의 힘, 눈동자를 움직이는 데 들어가는 노력 등에 의해 그런 효과가 온다고 한다.

그래서 이리 말하면 실례가 될까.
만약 빌딩의 수직선을 - 눈으로 볼 때 - 수평선을 보는 만큼의 노력으로 충분히 붙잡을 수 있었다면, 도시공간에 대한 시인들의 소외감이 그토록 강하게 시(詩)에 기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둑에서도 영향을 미치는데,
그것이 “큰 곳보다 급한 곳”이 지침으로 남아 있는 이유의 하나가 되겠다.

큰 곳은 대개 수평선에 가깝고
급한 곳은 대개 수직선으로 구상되는 곳이다.

수직선은 수평선보다 다루기가 힘들지만, 그래서 우린 상하좌우를 자유롭게 다루는데 의외로 자유롭지 못하지만, 만약 우리가 개념의 폭을 넓히면 그래도 다를 것이다.

예를 들어 분할(分割)이라는 말 또는 “자르다,” “가르다”는 말, 그런 것을 쓰면.

그러하다. 우리에게 수직은 힘든 것이었지만, 이제 그것을 보다 쉬운 노력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의식의 공간만큼 반상의 공간도 다양화가 가능하다. 확대가 가능하다. 잘려진 반상은 새롭게 인식에 잡히고 그것은 새로운 승부의 질감을 안겨준다.

돌 중심의 중국 고대 중세 바둑에서 수직선에 대한 강조가 없었던 것만 보아도 우리의 노력 또한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포석을 대할 때 두 개의 중요한 개념을 쓰곤 한다.

1) 배석(配石)
2) 구도(構圖)

그렇지만, 저 구도라는 말을 이론적인 범주로 가져와서 지침으로 사용한 적은 거의 없지 않나 한다. 구상한다, 그런 표현도 많이 쓴다. 그러나 그 또한 반상의 그 어떤 특징 또는 지침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우리가 다른 어감을 가지고 그 표현을 쓸 수 있다면 그건 또 다른 세계를 열어주는 힘을 가질 수 있다. 능동적인 동사적 표현을 더해서, “분할(分割)한다”는 그런 표현은 반상에 다른 힘을 실어줄 것이다.

각자의 내면의 감정질(感情質)에 따라 다른 표현 사용해도 될 것이다.

자른다.
가른다.
분할한다.
구도를 잡는다.
구상한다.
 

보다 적극적인 표현, 그 질서를 그 단계를 표현하는 그런 신화, 언어.
그것이 반상의 공간을 넓힐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의식의 공간, 감정의 공간, 반상의 공간.

우린 반상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나 더 가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것은 관념으로서 하나의 인식의 틀로써 잡아두어야 하는 것이기에
개념을 써보면서 반상의 마음 공간 그 하나를 열어젖혀보자는 것이다.

수직으로 자른다.
수평으로 자른다.
좌우 대칭이 반상의 세계이니, 수평이든 수직이든 다를 바 없겠다.
그러나 우린 의식한다.
반상, 저 배경에 무엇이 있느냐에 따라서 수직이 되기도 수평이 되기도 한다.

반상의 구도를 이미지로 잡으면, 그것도 크게 공간을 자르는 방식으로 이미지 작업을 하면, 우린 그런 수법을 쉽게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어쩌면 지금까지의 수법에 대해 감정적인 느낌을 하나 더 부가하는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느낌에 비로소 제 자리를 잡아주는 것이다. 그 동안 가졌던 그러나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그래서 인식의 틀에서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그 어떤 감정에 대해 힘을 제대로 찾아주자는 이야기다.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느끼는 것만으로는 부여잡지 못하고 갖고 놀지 못한다.
이름을 붙여서 자리를 잡아주어야만 한다. 반상은 개념만큼 넓어지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나는 놀라운 사실 하나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감정도 사실은 당연하게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마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 분께는 놀라움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감정, 연인끼리의 그 격렬한 불붙는 감정도 서구에서 12세기에야 비로소 등장한 감정이라는 사실 말이다.

바둑에서도 다를 바 없는 설명이 가능하겠다.

(바둑의 진실이라고 할 만한) 설명 3.
---------------------------------------------------------
놀라운 사실 하나는,
20세기에 세력이 제대로 인식되었을 때, 공간에 대한 폭넓은 감정이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감정을 담을 신화, 언어, 질서가 없다면!
---------------------------------------------------------

그래서 후지사와의 그 장면이 필요한 것이다.
그 후지사와 그 장면은 우리의 인식을 넓혀줄 하나의 신화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반상의 조건만으로는 신화적인 의식화 노력이 쉽지 않다.
그러나 기사가 영웅으로 활약하면서, 우리에게 하나의 이상적인 존재로서 제시된다면 그 신화 작업은 그 의식의 창조 작업은 보다 쉽게 이뤄진다.

그래서 필요했던 것이다.
바둑의 저변이 활성화될 때, 바둑문화가 꽃피우고 있을 때
기사들의 신화가 널리 만들어지고 널리 알려졌던 것이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의 지난 400년.
그것은 수법의 이해가 반상과 반외를 오가면서 이뤄진 것을 알려준다.

의식의 공간.
반상의 공간.
그 공간의 확대에
사회적인 이야기, 그 노력이 경주되고 또 필요했던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