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잊어야 사는 것들

장마 값을 하려는 듯 창밖의 비는 쉼 없이 줄 창 내리고 있다

잘 공감하기도 어렵고 이해가 가지 부분이 있을 텐데도 앞에 앉아

내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청년 명섭 의 눈은 예상외로 초롱 해 보인다

아마도 내 이야기 보다 제 아버지의 이야기가 혹시 나오지 않는가 하고

귀를 기울여 기다리고 있는 눈치인데도 겉으로 나타내지 참고 기다리고 있는 걸 보면

나이에 비해 퍽 어른스러워 보이는 것이 아비인 尹 敬俊을 참 많이도 닮았다

자신은 만개 하지 못한 꽃으로 스러져 갔지만 자식 농사는

튼실하게 지어놓고 간 尹 敬俊 그가 몹시 부럽다

朴 民國

잊고 살아 왔었던 내 아이의 이름이다

살아서 잘 자라만 주었다면 어른 다된 사람이 저렇게 내 앞에 앉아있을 것이다

문중 어른들 꾸중을 들어가며 항렬과 돌림자를 무시하며 백성과 나라를 위하라고 지어준

이름이 너무 무거웠던지 두해도 못 넘기고 떠난 아이 생각이 나며

미안한 것들이 너무 많아 세월 가며 늘어난 참회의 무게로 눌러놓고

잊으려 애썼던 아내의 모습도 회억의 사이를 비집고 떠오른다

스물 두 서해는 지났을 보은 옛집 큰 방에서 일이 어제만 같다

아내가 큰 절을 올리고 있었다

두해는 떨어졌다 돌아온 대주(代主)에게 처와 권속이 반기는 절을 올리는 것이

하등 별나게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의아한 것은 그녀의 입성 때문 이였다

금박 무늬가 찍힌 천을 덧댄 스란 단을 치마하단의 한층만 붙여
가세가 줄었다고는 해도 박 참판댁 땅을 비키면 노은을 지날 수 없다는
대 지주집 혼사의 대례복으로는 부실한 것이 아니냐고 못내 아쉬워했던
老 할머니의 아쉬움은 소작인들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지나치게 화려한
혼례가 되어서는 안 된 다는 아버지의 간곡한 진언으로 격을 낮추기는 했지만

붉은 스란치마의 달린 봉황의 금박 무늬와 엷은 노란색으로

소매 깃을 덧댄 한삼이 돋보이던 녹색 원삼과 장식을 많이 달지 않아

오히려 깔끔하게 돋보였던 족두리는 인근의 장날처럼 모였던 아낙들이

뒤돌아 몰래 한숨을 쉬며 부러워했었던 시집오던 날 대례복

그 예복을 때 아니게 아내가 입고 큰절을 올리고 있다

“이젠 훨훨 마음 내키는 대로 떠나셔도 되요!

원망이나 푸념을 늘어놓으려고 연통을 넣어 서방님을 오시게 한 것은 아니예요

시집오던 날 양가 어른들 앞에서 대례를 올리며

박氏가문의 뼈를 묻을 여자가 되어 살겠다던 그 약속을 더 이상 지킬 수 없을 것 같아

들어오는 인사를 드리고 왔듯이 떠난다는 인사를 드리고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이는 수룡폭포 입구 선산 아랫자리에 묻혔고 행랑 심 서방이

자리를 가르쳐 드릴 겁니다

동문수학하며 돈독한 관포지교를 나누셨던 아버지의 心友(마음 벗)

충주댐 옆 동막골의 백 초시 어른과 사돈 맺자는 약조에 따라

수룡 폭포를 둔 마을 노은면 수용리로 14살 어린신부는 18살의 신랑을 따라와

일본 유학과 학병으로 끌려갔던 대동아 전쟁 등으로 달콤한 신혼도 없이

명색뿐인 부부로 살면서도 아내는 근동의 칭송을 들었던 요조숙녀의 이름으로 살았다

그런 아내가 이제 가시버시의 인연을 끊자고 말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를 나눠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른들 곁에 있다 시간이 돌아와 희미한 등불아래서 부부자리로 본 모습은

늘 다소곳이 조금 비껴 앉아있어 잘 빗어 넘겨 늘 단정히 묶여있던

머리 단 이 드러내준 고운 이마만이 눈이며 코와 입술보다 먼저 왔기 때문일 것이다

곧추 세운 오른쪽 무릎의 두 손이 얹혀있는 담담히 앉은 모습이지만

몹시 당찬 사람이라는 느낌이 저절로 전해져 온다

하긴 그런 사람 이였기에 구순이 가까운 시할머니를 비롯한
층층시하의 어른들을 모시고 오랜 시간을 뜬 말없이 잘 참고 살았을 것이다

희로애락의 감정 표출이 없는 그 담담함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러 오고 있다

가슴 한편이 와르르 무너져 왔다

강하고 무던한 사람이라 치부하고 아이가 죽었다고 연락이 왔을 때도

그저 참아 주려니 믿고 무심했던 것이 불찰이다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결성 하던

몽양 선생의 큰 뜻을 보좌해야 했던 중대한 와중이라도 잠시 일을 접고

집에 내려와 혼자 어려움을 겪었을 아내를 달랬어야만 했다

“마음을 다진 것 같으니 그리 하시오

그간 고생이 많았소“

가지 말라고 매달려라도 보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무심히 보낸 세월이
너무 미안 스러워 떠나는 것을 그저 지켜 보아야만 했다
얼굴 잊을 만하면 한번 다녀가던 부부 사이에 생긴 아이는

아내에게 남편을 대신 해주던 인연의 끈 이였고 미래였을 것이다

이름 하나 달랑 지어주고 뜬금없이 구름처럼 바람처럼 훌쩍훌쩍 다녀가던

남정네를 대신해 놓치지 않으려고 꼭 쥐고 있던 그 끈은 아이가 홍역에 걸리며 끊어졌고

이제 손에 쥘 것이 없는 아내는 집을 떠나가려 하고 있다

고개를 숙여 목례를 올리는 아내의 많은 사연이 무언으로 가슴 가득히 건너왔다

조용히 장지문을 나선 아내의 발자국 소리가 마루 너머로 사라지자

가슴이 텅 비어버린다

그때는 모든 것이 민족과 국가라는 큰 그늘이 모두 덮어

최소한 잃어버린 것들의 대한 아픔을 대신할 위안거리라도 줄 줄 알았다

어떤 보상이나 공적의 대한 賞을 바라고 한일들은 아니 였지만

자식을 돌보지 않고 아내를 보내며 젊은 세월을 바친 우리들에게

국가와 민족이 남겨준 것은 허탈과 분노였다

민족을 배반한 경찰과 판검사가 나치 협력자를 심판할 수 없다는 명확한 기준에 의거

사법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벌여 1944년 말에 당시 사법부 판사의

17퍼센트에 이르는 403명의 판사들을 처벌하고 시작된

프랑스 나치 협력자 청산작업에는 무려 16만 명이 조사를 받았고

실제 집행은 1500여명의 그쳤지만 7천여 명이 사형선고를

4만 명의 이르는 나치 협력자들이 불명예 조처 및 공민권 박탈을,

38000명의 달하는 또 다른 나치 협력자들은 유무기 징역 및 금고형에 처해졌다.

“국가가 애국적 국민에게는 포상을 민족배반자나 범죄자에게는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국민들을 단결시킬 수 있다“

“나치 협력자들의 엄청난 범죄와 악행을 방치하는 것은 국가 전체에

전염하는 흉악한 종양(腫瘍)들을 그대로 두는 것과 같다.”

2차 대전 이후 프랑스의 나치 협력자 청산을 주도했던

드골이 당위성을 역설하며 주장한 말이다

프랑스가 과거를 정리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

기억의 바탕을 둔 진실과 정의였다.

저항 할 수 없는 검은 세력의 짓 눌려 있다가 함께 풀려난 프랑스에서는

민족을 억압하는 세력에 항거하던 레지스탕스를 부모로 두었던 자식들은

존경과 흠모의 눈으로 부모를 바라보고

고난의 세월을 국가의 바친 레지스탕스 출신들은 자신들이 사랑한

내 조국의 내 거리를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며 활보하고 있을 것이다

한데 우리는 어떻게 했었든가?
가문을 이어가는 한 代의 시간를 넘어선 36년의 잃어버린 
통곡의 세월을 보낸 그 아픔을 우리는 어떻게 지우며 살아왔든가?

아직 비는 멈추지 않고 내리고 있었고 침묵의 들어 기침을 골라내는
초췌한 내 모습을 바라보는 명섭의 두 눈만이 멈추어져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