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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일기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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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의 승부 - 주변인의 생활 - 뭘 해야 할지 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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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12월 27일)- 5년간의 승부 - 주변인의 생활 -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밤 10시 57분.
오랜만의 늦은 밤. 정신이 그리 어둡지 않다.
역시 술을 마시지 않고, 사람들과 만나 세상사 흐르는 얘기, 그런 얘기를 해서 그런 걸까.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이다.
안으로만 갇히지 않기를 바라는데 잘 안 된다.
균형감을 갖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가만, 그러니까 대학원 면접 때 서정호 교수님이 그리 말씀 하셨다.
바둑을 둔다고? 아, 그러면 바둑을 둘 것이지 왜, 공부를 하려고 해?
답을 갖고 들어서지 못했다. 묵묵부답이었다.
속으로는, 한 번 해보면 어떨까요. 관심은 약간 있습니다만.
다른 교수들도 웃었다.
그래도 시작은 하게 된다.
언제나처럼 바둑계가 승부를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나는 85년 3월부터 학교에 나가기 시작했다. 프로바둑계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전문직으로 인정받기 시작할 때 나는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강의는 김홍명 교수의 정치사상사. 이름만 듣던 마키아벨리, 맑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등의 지적 知的 흐름을 따라갔다. 솔직히 말해 짧은 원서는 읽었지만 맑스의 자본론과 같이 길고도 긴 책은 손이 선뜻 나아가지 않았다. 약간씩 주마간산 식으로 읽었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맛만 좀 보는 편이었다.
공부보다도 더 맘에 드는 것은 때로 술 마시러가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으랴. 마포 최대포집 정도에 가면 무난했다. 돼지고기 굽는 연기 자욱해서 기침 절로 나오는 철로 옆 작은 집. 큼지막하게 썰어서 나온 고기 뭉치에 소금을 뿌리고, 잠시 후 두텁게 썰어서 소주 한 잔. 좁아서 서로가 어깨를 부딪치며.
그러니까 나는 맛만 보러 다니는 정도의 태도밖에 지니지 못했다.
돌아보면 아까워서 아쉬운 시간들.
실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는데 말이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것 아니던가.
한국기원에는 아무래도 좀 뜸하게 나오게 되었다.
문제는 대국.
학기 초엔 강의 시간표가 화요일이나 목요일에 잡혀있는 것을 먼저 신청한다. 그러면 대국과 겹쳐지지 않는다. 대국은 대부분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그렇게 잡혀지기 때문이다.
겹쳐지는 경우엔 바둑을 뒤로 했다.
아무래도 새로 시작한 것에 더 관심이 가는 법이지 않겠는가.
뚜렷이 공부를 내 인생의 길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없었지만, 그래도 말이다.
드물지만 가끔 이런 일도 있었다.
시험이나 강의가 보충되어 오후에 있을 경우.
그러면 오전에 대국을 하러 나온다. 나는 속기니까 상대만 빨리 두어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냐. 상대가 있는 것이 바둑. 시간이 부담되면 아무래도 대국이 잘 안 풀린다.
던지고 일어서야 한다.
좌우간 그렇게 시작한 나의 새 생활 때문에 바둑은 다소 소원하게 되었다.
85년 1년 동안 불과 31국에 승률 54.8%인 것이 그 무엇보다 당연한 증거라고 하겠다.
연수 기간이 있었던 84년엔 26국에 승률 80%가 넘었었는데.
승률이 높으면 당연히 대국 수도 많아지는 것.
자, 그렇게 다시 시작한 나의 학창생활.
그러나 바둑이나 공부나 그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면 언제나 주변인에 머물러야 한다.
주변인은 무슨 주변인?
그런 말은 좀 고상한 말이다. 고상하다면.
미리 말하지만, 내 대학원 성적은 B가 보통이었다. C도 있었다. 하하.
A는 몇 개 되지 않았다. 대학원 성적은 A를 받아야 그래도 겨우 보통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래도 자신은 만만했다. 자신감을 갖지 않고서야 어찌 한 학기인들 뻔뻔하게 등록하고 B를 받고서도 만족하겠는가.
85년의 첫 번째 학기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적당히 하는 것이었다. 뭔가 시큰둥한 태도를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만족한다.
이런 것도 한 몫을 했다.
당시는 맑시즘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을 때였다. 그래서 사상 思想을 전공하겠다는 학생들이 줄을 섰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적당히 맛을 보고 난 다음에 나의 전공을 정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때까지는 적당히 하자. 그것이 나의 판단이었다.
이것저것 다양한 맛을 보지 못하고, 일찌감치 학문의 방향을 결정해버리는 그런 학생들을 나는 아쉽게 바라보았다. 저렇게 판단이 빨라서 어디에 써먹지? 판단의 근거가 충분한가?
핑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해서 자신만만하게 답을 주는 태도는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
오래 전에 읽은, 임어당 林語堂이 쓴 소동파 평전 蘇東坡 評傳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읽어볼 만한 책이다. 어디 갔을까. 번역본을 읽었는데 책 잘 번역했다.
소동파가 왕안석 王安石과 함께 나무가 다 삭아빠진 구름다리 앞에 섰을 때다.
왕안석이 선뜻 그 구름다리를 건너갔다 돌아왔다.
동파는 이리 보았다.
장래 위험한 놈이다. 생명을 함부로 여긴다.
송나라 휘종 황제 때 왕안석이 시행한 신법 新法에 대해서는 평가가 단순하지는 않지만,
그 정책의 무모함은 여실히 알려져 있다. 많은 사람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그 정책.
나라의 몰락을 재촉한 정책. 물론 그 정책이 아니었어도 이미 나라 경제는 무너질 때까지 무너졌다는 견해도 없지 않지만.
나와 같은 태도를 지닌 자는 결단력이 없는 것인가.
깊은 밤에 젖어드는 이 때다.
와인 한 잔 할까?
밤 11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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