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에 있을 때의 일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주변에 젊은 직원들 몇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웃에 살고 있고 직장도 같았지만, 연령도 차이 나고 근무 부서도 달라, 서로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만날 기회가 없다보니 다정할 이웃이면서도 이웃 같지 않게 살게 되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으로 늘 찜찜하게 지내오던 터였다.

 더구나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 나는 다정한 이웃을 만드는 게 목표였던 “도시새마을운동”의 실무자였고 보면 더 할말이 없었다. 사실 무엇 하자고 이렇게 메마르게 사는가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퇴근만이라도 같이하자고 매일 전화를 걸기로 했다. 우리들 중에는 나만 승용차로 출퇴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출근할 때에도 같이 했으면 좋으련만, 내가 늑장을 피우는 바람에 출근은 각기 하더라도 퇴근만은 함께하며 이웃으로의 정을 나누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이마져도 잘 되지 않아 주일에 겨우 한두 번이 고작이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 전화를 걸어보면, 자기들끼리 한잔 걸치는 스케줄이 잡혔다는 대답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차로 같이 퇴근하지 못하는 날은 한잔 걸치는 날이라 해도 틀림이 없었다.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소위 똥집이 맞는다는 친구들끼리 하루를 정리하면서 한잔하겠다는데 어찌 말릴 수 있으랴.

 그런데 사실은 좀 심하다 싶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자주 어울리는 이유가 굳이 첫잔에 넘어가는 싸릿한 술맛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엔 쌓이는 우정도 있었겠고, 남들이 못 보는 세상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머리가 아프던 일상의 문제들이 시원하게 해부되는 재미도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일과 중에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맛은 어디에 비교할 수 있을까?

 이쯤 되면 못난 상사들에 대한 도마질은 기막힌 안주가 된다. 그래서 같이 퇴근하자는 전화에 건수가 잡혔다고 미안해하면 굳이 같이 가자 강요하지 못했다. 오히려 부러워했다. 나는 남들처럼 술을 그리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쩐지 이들은 별로 여유가 없어 보였다. 이들의 술자리에서는 무거웠던 일과를 벗어놓는 시원함도, 또 그런 여유를 즐기는 낭만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알콜 중독자들처럼 술에 탐닉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매일이다 싶게 술자리가 너무 잦은데다, 연일 폭음이 이어지는 꼴이, 꼭 이런 내 가설을 증명하는 것만 같았다.

 이튿날 출근해서도 진한 술 냄새를 풍기거나 자세가 흐트러져 있는 모습은 이 좋은 술을 무엇 때문에 마시고 또 허물어지는지 알 수없게 했다. 도대체 이들에게 있어서의 술은 과연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싶을 뿐이었다.

 약도 지나치면 독이 되듯, 이들에게서도 혼자 퇴근하는 쓸쓸함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진했다. 뭔가 제동을 걸어주기는 해야겠는데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다. 한순간 머무는 듯 지나가고 마는 정말 귀한 청춘을 이렇게 덧없이 흘려보내고 마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걱정을 하면서도, 그래도 이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던 것은 나에게는 없는, 누구와도 대작할 수 있는 넉넉한 주량을 타고났다는 것이고, 살아가는데 술처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인생살이가 인간관계로부터 시작된다면, 인간관계를 원활히 해주는 것이 바로 술이 아닌가 싶어서이다. 술이야 말로 여유 있는 인생살이를 만들어주고 지탱해가는 더없이 중요한 촉매제가 아니고 무엇일까 싶었다.

 해묵은 원한도 술잔을 마주하면 마음이 풀려 봄눈처럼 소리 없이 스러질 것이고, 일이 꼬여 보이지 않던 매듭도 술잔을 마주한 채 시름을 놓으면 물에서 머리칼이 풀리듯 술잔 속에서 꼬인 매듭이 저절로 풀어질 것 같기도 했다. 저놈이 누구인지 몰라 꽁꽁 닫고 대하던 경계심도 주고받는 술잔으로 백년지기가 될 수도 있겠고, 이웃간에 그저 하는 겉 인사도 술로 다리를 놓으면 진실로 걱정하는 이웃사촌이 될 것이다.

 더구나 자신에게는 또 어떨까? 술 한 잔에 온갖 시름이 스러지는 평화스런 마음이 평소의 편견을 고쳐 줄 수도 있겠고, 세상이 다 내 것처럼 보이는 얼큰함 때문에, 미워하는 마음보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며, 까짓것 문제없다는 술의 호기가 자신의 소극적인 면을 대범하게 고쳐 줄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뿐만이 아니다. 술이 주는 호방함이 자신의 이미지가 되기도 할 것이고, 나누는 술잔에 묻어오는 얘기들이 막혀있던 귀를 시원하게 뚫어주기도 할 것이다.

 술이란 이렇게 대하기에 따라 자신의 인간적 결함도 고칠 수 있겠고, 헐리지 않던 인간관계의 벽을 간단히 허물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다정한 이웃을 넓혀가고, 자신의 잠재력도 일깨워주는 이런 일들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래서 그들을 대할 때마다, 어딘가 잘못되어가는 듯 하여 다소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그들을 부러워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물의 분별을 잘못하는 착각은 언제든지 고쳐갈 수가 있지만, 술을 소화해내는 생리적 능력은 아무 때나 마음대로 고쳐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기도 했다.

 얼마나 좋은가? 취하고 싶어도 취할 수 없는 나와는 달리 선천적으로 술에 자유로울 수 있는 체질을 타고난 것이 얼마나 좋은 행복의 조건일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나는 지금도 그들같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비록 그들이 별 의미 없는 술로 귀한 시간과 젊음을 보낸다 해도 나는 그들이 부러워질 것이고, 설사 다정한 술친구 대신 더 중요한 자신들의 인생이 통째로 표류한다 해도, 그리고 후일 젊음이 가버린 뒤 표류한 인생을 안고 혼자서 후회 한다 해도 나는 그들을 부러워 할 것만 같았다.

 뿐만이 아니다. 가급적 술친구를 바꾸어가는 여유를 갖지 못해 안목을 넓히지 못했다 해도 그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며, 일이 꼬여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자와 직접 술잔을 나누지 않고 빙빙 돌았다 해도 부러움은 떨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해하는 이가 있어도 술로 이해를 구할 줄 몰랐거나, 방해하는 놈에게는 술로 조져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어도 그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며, 본 지가 오래된 친구에게도 술잔을 가끔 나누지 못했거나, 선배나 어른들에게 술잔을 올리면서 안부를 묻지 못했다 해도, 나는 그들을 부러워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게 술의 기능이요,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소위 술꾼(?)들 만이 갖고 있는 힘이 아닌가해서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된다 해도 좋아했을까?

 아마도 타고난 체질이란 노력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해서 이지만, 그보다 술을 잘한다 해도 철저하게 자유자제할 수 있는 자신감 같은 것을 숨기고 있는 자만 때문은 아닌지 모를 일이다. 술도 마약처럼 의지를 갉아먹는 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기야 절박한 마음이 되면 무슨 소린들 못할까마는, 그래도 내가 정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술 속에 약과 독이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해도, 그것을 내가 그토록 부러워해 왔다는 사실만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할 수 없다는 것 그 하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