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론(棋士論)이 사라지는 현상을 보면서

I. 상대가 없다면

사까다의 妙 시리즈. 많은 분들이 읽었을 고전. 과연 걸작인데, 이번에 다시 보게 되는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그 첫째권이 “공격의 묘”였다는 것이다.

바둑을 포석에서 전투 그리고 끝내기로 넘어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본다면, 왜 제1권이 “포석의 묘”가 아니었을까.

1960년대 일본에서 이 책 6권이 한 질(秩)로 묶여져 나온 후, 다시 “續 坂田의 碁”가 1970년대에 출간 되었을 때에도 역시 제일 앞자리에 자리 잡은 것은 공격 바로 그것이었다. 요컨대 사까다의 바둑 이해가 그대로 반영된 책이라 하겠는데, 그건 다음과 같은 사까다의 이야기로 충분히 이해된다.

표1. 사까다의 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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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할 것 없이 그 때 그 때의 기분으로 돌의 소리는 달라진다. 여긴가 하는 勝負手 때에는 돌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自然스런 氣勢라고 할 것이다.
자주 신문기의 대국장으로 지정되는 여관의 어느 주인의 얘기로는 돌의 소리로서 내가 勝負手를 두었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그 돌 소리에는 殺氣가 充溢한다고 할까, 상대에게 一擊을 가하지 않으면 마음이 풀리지 않는 氣合이 사무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과연 바둑은 한수라 할지라도 완만히 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항상 힘을 들여 두고 있었다면 상대도 익숙해져서 여기다라고 할 때 氣合으로서 상대를 압도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야구의 투수의 결정구에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똑 같은 투구를 하고 있어서는 효과가 없어지고 만다.

얘기가 옆길로 흘렀지만 덧붙여 말하면 전에 大阪의 半田道玄 9단과 전보바둑을 두었는데 상대가 눈 앞에 없으므로 착수에 氣分이 나지 않는 것이 심하였다. 나의 성격은 물이라고 하기 보다 불에 속하는 편이라 훨훨 타오르는 무엇이 없어서는 아무 것도 안 되는지도 모른다.“ (”사석의 묘“ p.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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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것이다. 상대가 눈 앞에 없을 때 공격한다는 것은 내면의 지향성에 위배된다. 상대가 있는 게임에서 상대가 없다는 것은 실로 괴로운 일이다. IBM의 deep blue와 chess를 두었던 체스 세계챔피언은 역시 볼 수 있는 상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고통스러웠다. 고 술회한 적도 있다.

그런데 실전에서는, 그는 공격보다 수습을 자신의 능기로 삼았던 기사였다. 사까다는 절대로 돌을 버리지 않는다. 그것으로 유명하다. 수습의 사까다, 그 말도 있을 정도 아닌가. 이는 그가 남긴 글과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표2. 사까다의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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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자는 돌을 버리는 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무엇보다도 ‘버린다’고 하는 기분 자체가 본능과는 逆行하는 것이므로 무리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돌을 버리고 싶지 않은 기분, 돌에 집착하는 기분이 한판을 통해 얼마나 무리한 사고를 강제하고 있는가를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이 점에 正手의 바둑과 그렇지 않은 바둑과의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사석의 묘” 머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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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은 지침이 될 것이나, 사까다 역시 본능과의 갈등은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이럴 수도 있다. 사까다는 수가 깊어서 수습에 능하다. 발 빠른 기풍이니 그러하다. 그렇다면 수습에 능한 자신의 장기(長技)를 발휘하기 위해서 어떡해야 하는가? 반상을 엷게 두면 된다. 자신도 모르게 엷게 두는 것이 몸에 배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그 어떤 정체성이 - 반상의 본질은 자신에게 그리 비춰진다는 - 사까다에게 먼저 주어졌을지도 모른다. 그건 개인사를 깊이 탐색하기 전에는 감히 말 못할 것이다.

말이 좀 길어졌는데, 상대가 있는 게임, 그것이 바둑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II. 요즘엔 기사론이 없다

최근에 기사론을 어디선가 읽어본 적이 있으신가.
별로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다음 네 가지 현상이 떠오른다.
랭킹 시스템과 단체대항전, 속기 기전의 범람, 책의 부재.

1) 랭킹 시스템.
기사 개인의 이름은 숫자로 대체되고 있다.

2) 단체대항전.
기사 개인은 집단에 의해 대표되고 있다. 개인은 집단의 일부로 이해된다.

3) 짧은 제한 시간.
개인은 좋은 수보다는 실수를 적게 해야 하는 강박 속에서 살게 된다.
짧은 시간 내에서 좋은 수를 발견하기란 힘이 드는 반면에 실수할 확률은 훨씬 높다.

4) 책이 없다.
기사는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써 드러나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정상에 서면 뭔가가 표현되어야 한다. 표현된 그 무엇만이 의미를 크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지만, 기사의 인격이 완성되어서가 아니다. 책이 없다면 기사를 하나의 존재로써 이해하는 수단이 하나 사라진다. 기사론은 기사와 바둑을 의미있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III. 기사론에서 말하는 개인은 실제 없지만

조치훈이 말했다.

“治勳류(流)는 없다.”

신문기자나 관전기자, 그리고 작가들이 흔히 쓰곤 하는 조치훈의 바둑 스타일에 대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지킨 표현이다.
자신의 일부만을 두고 전체인 것처럼 다루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리 말하고 싶다.

치훈류에 의해 대표되는 조치훈은 없다.
그러나 치훈류라고 불릴 수 있는 반상의 이미지는 있다.
그런 原型은 있다.

그런 기사가 있다고 하기보다는
그런 반상, 그런 안목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안목으로 이뤄진 반상이 없다면 대체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치훈류”라고 불릴 만한 의미체계란 무엇일까.

누가 두어도 그리 두겠지만, 그리 둘 수밖에 없는 그 어떤 장면이 있다면 그건 그 기사만이 이끌어낼 수 있는 그런 장면인 것이다. 개인의 그 무엇이 반상의 그런 장면 - 그 기사다운 그런 수를 이끌어내는 장면 - 을 자주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기사 개인의 품격이며 이미지이다.
바둑의 넓이이며 바둑계의 넓이이다.

예를 들어, 조치훈 하면 “불굴의 인간상,” 그런 이미지 주는데 - 어려운 역경에 처할수록 더욱 투지를 일으킨다. 이겨낸다는 - 본인에게도 그것이 현실과 거리가 먼 자화상만은 아닐 것이다.

그 표현이 무엇이든, 반상을 대할 때 자신만의 감흥이 일어나서 그것을 수법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은 프로든 아마든 명인이든 상수(上手)든 모두 다 겪는 것이다. 조치훈의 경우엔 그 인식과정이 누구보다 신랄하여 다른 기사들과 다른 경계를 보여준다 하겠다. 

      1보 (조치훈의 휠체어 대국 일본 기성전 도전1국)

      2보 (그 도전 제6국 )

누가 교통사고 이후 휠체어 대국을 할 수 있을까. 더욱 놀라운 것은 6국에 이르렀을 때다. 우변 두 집 내고 살겠다는 그런 착상을 누가 과연 할 수 있을까. 상변 흑43으로 살려나오면서 내다본 반상의 흐름. 비록 정확한 수순을 내다볼 수야 없겠지만, 충분히 예감할 수 있는 승부감각.

조치훈만이 착상해서 펼쳐내는 반상 세계. 그토록이나 감정의 이입이 강열한 바둑은 본 적이 없다. 조치훈의 이런 바둑을 감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글은 그런 긴장을 감당하지 못한다. 다음 바둑. 경쾌한 놀이터를 연상시키는 반상으로 숨을 돌리도록 하자.

      3보 (山部와 橋本의 천원 바둑. 變幻의 이미지 강렬하다)

3보는 변환(變幻)의 이미지로 유명한 야마베와 오청원의 사형(師兄) 하시모토 우따로의 1국. 저 장면. 흑1 천원에 백2 걸칠 줄이야 누가 짐작이나 하랴. 자유로운 발상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뛰어났던 우따로도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하하. 이런 바둑도 안목을 넓혀준다.

약간 결정론적 이해가 강조된 점이 없지 않지만, 다음 표3을 이야기하고 싶다.

표3. 문화와 정체성과 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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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둑의 문화적 정체성.
그것이 승부의 방식을 결정하며
결정된 승부 방식이 대국자의 심리 상태를 규정하고
그 제약 받은 심리가 반상의 수법에 영향을 미친다.

2) 예컨대 제약 받은 심리가 - 이건 사실 그리 맞는 표현은 아니다. 제약 받게 되는 심리가 따로 있고 제약으로 발생하는 심리가 서로 다른 공간을 형성할 리는 없기 때문이다. - 반상의 수법에 영향을 미친다.
조치훈의 경우, 어린 시절 일본에 건너간 이후의 압박감은 이루 말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도처에 그런 표현 묻어난다. 그것이 바둑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며, 그 태도가 곧 수법의 취향에 영향을 미쳤을 것을 강조하는 것은 그리 위험한 판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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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내면,
바둑은 개인적인 게임이자 사회적 게임.

승부방식과 문화적 정체감, 그것을 강조해서 바라볼 때
최근에는 일종의 불안의 정체성이 반상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하다.
개인차가 거의 없는 바둑 스타일과 단속적인 전투가 반상을 지배한다.

짧아지는 제한시간, 개인이 매몰되는 집단의 강조, 스포츠에로의 강화.
그런 것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듯하다.
그 모두가 기사 개인의 존재감을 떨어뜨리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둑의 수준이 떨어졌다, 그리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의 바둑을 오늘의 우린 두고 있다. 그건 아마 거의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다만 급격한 반상 안팎 조건의 변화, 그것이 반상과 기사 개인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깊은 성찰이 부족한 거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강조할 뿐이다.

IV. 기사론은 기사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재미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아무래도 사까다 선생의 격려사에 집착한 모양 같다.“란 것이 1985년 제9기 기성전 도전 제1국이 끝난 다음 다께미야의 패전 변명이었다. 당시 이 대국은 일본 도전기 사상 처음으로 외국에서 두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서울 롯데호텔에서의 대국으로 우리에게도 깊이 기억되고 있다. 조치훈이 염원의 명인을 획득한 이후 고국에 약속한 귀향의 1국으로서.

      4보 (다께미야의 우주류와 조치훈의 수습이 잘 드러난 1국)

대국 전날 밤 격려회에서 사까다 말하기를, “다께미야君은 우주식이 특기며 조군은 그 대세력 속에 침입하여, 공방전의 묘미를 보여주기 바란다.”고 주문한 것에 대해 심리적으로 부담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우려 있다.
기사론이 있어서 그 해당 기사가 인격이나 기풍에서 오히려 제약을 받는 측면이 있지 않겠는가. 기사론이 일단 나오면 대중들의 이해도 그것이 맞추어지게 되기 때문에 표현되면 굳어진다. 그런 경향 피하기가 쉽지 않다.

여하튼 기사인 이상
그래서 각자 자신만의 이름이 있다. 
신통(神通), 화려(華麗), 평명(平明)류, 돌부처, 공격수, ...

宇宙류는 실로 다께미야의 반상을 잘 드러낸다.유창혁을 말해주는 “세계 최고의 공격수”는 약간 부족하다.
“공격”을 강조했기에 중앙 지향, 두터움 강조, 전국적인 안목 등을 연상할 수 있지만, 그래도 일부에 치우친 느낌이다.

물론 기사의 반상을 잘 드러내는 그런 이름은 실로 찾기가 힘이 든다.
기사의 안목과 내면을 잘 드러내는 그런 이름은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왜 이리 제한되고 또 어려운가.
반상의 본질이 상징에 상당부분 머무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유창혁은 그 무엇을 다른 기사와 다르게 포착하고 있다.
그 포착된 그 무엇을 상징적으로 다루고 이해한다.
상징을 넘어서서 은유로 드러낸다. 그 과정을 다루어가는 유창혁의 힘은 대단히 독특하며 또 강하다.
상징적 형상은 모호한 반상과 은유적 언어를 매개하는 징검다리. 유창혁과 바둑을 이야기하면 그만의 신선하고도 독특한 세계를 그가 보고 있다는, 그런 질감 느끼는 이유다. 유창혁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 발현, 그런 것이 없다면 유창혁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와 동일한 감성을 갖고 있다면 우리도 유창혁처럼 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감성도 다르고 표현도 다른 것.
그래서 두어진, 그의 수법을 큰 안목으로 오랜 기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이해하는데 충분치 못하다. 짧은 시간과 제한된 대국만 보아서는 거의 아무 것도 우린 얻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특정 기사의 반상 이해, 그 내면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 공부에 한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그렇다고 특정기사를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누군가를 집중적으로 놓아보는 공부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런 공부 이후에야 비로소 그 명인이 상징을 갖고 노는 힘을 자신도 모르게 어느 정도는 얻는 법이다.

필요한 기사론.
저번에 슈코 이야기하면서 슈코와 같은 명인의 성장에 사회가 노력을 경주했던 이야기. 그러하다. 기사론이 기사의 기풍은 물론이고 인간적인 깊이까지 드러낼 수만 있다면 우린 보다 쉽게 그 명인의 바둑세계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넓게 대화할 수 있다.

상징은 그 본질상 쉽게 규정되지 않지만 일단 표현되면 굳어지고 갇히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 굳어진 표현이 수법. 그러므로 특정의 수법만을 즐기면 이해의 폭이 좁아지는 한계를 안게 된다. 수법을 통찰하는 힘이 없으면 명인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게 된다.

적절히 표현된 기사론은 바둑과 바둑계를 살찌운다. 연구하는 기사에게는 原型을 제공하고 공부를 가능하게 한다. 한 번 정도는 특정 기사에게 빠져서 공부를 할 필요가 있는데, 그 이름이 없다면 그 배움은 쉽지가 않다.

의식(意識)의 의식적인 도전.
닮고자 하는 노력이 없으면 소년이 어른을 넘어서기는 쉽지가 않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다음과 같은 현상 무어라 할 수 없다. 기사들은 1인자를 따른다. 태도와 버릇 등을 따른다. 반상의 그 무엇을 따른다.

개인은 스스로 홀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 기사 역시 자신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 성장의 과정 속에서 아버지가 필요하고 선배가 필요하고 영웅이 필요하다. 스스로 키워나가고 극복해가야만 하는 이미지와 정체성(identity). 그런 과정에서 살찌운다. 반상을 살찌운다. 바둑계를 살찌운다.

V. 영웅신화와 棋士論

이런 멘트 많이 들었다.

 “당대 최고의 실력자인 두 영웅이 힘을 다하여 싸우다. 이와 같은 열전은 좀체 보기 어려울 것이다."

언제나 똑같은 멘트. 그러나 물리지 않는 멘트.
왜 그러한가.
영웅신화는 인간의 영원한 이야기이며 영원회귀의 신화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하는 명인이 누구인가.
영웅신화의 주인공이다. 곧 영웅이다.

개인 vs. 개인
개성 vs. 개성

바로 이 구조가 영웅신화의 뼈대 중 하나이다. 반상의 내용을 다양하게 만들 요인이다.
두 대국자는 두 개의 대극(對極).
대극의 합일은 곧 보다 높고 새로운 길의 탄생 아니던가.

물론 개인에 초점을 둔 승부의 방식만이 반상의 깊이를 더해준다, 그리 말하는 것은 너무나 빠른 판단일 것이다. 인간의 발달에 대해서 우린 좀 더 조심스러워야 하는 것. 그건 반상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 다만 반상은 우리의 의식이 다른 정신영역과는 달리 예술적 감각과 논리적 기술이 잘 섞여져 노니는 세계이기에, 의식의 폭과 넓이가 더해지는 그런 반상 조건은 아무래도 대극을 잘 살리는 방식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초점은 의미. 승부를 다투는 바둑이 기사는 물론이고 아마추어에게 자극을 주지 못한다면, 그리고 바둑계에 의미를 주지 못한다면 그 대국은 의미가 스러진다. 반상은 좁아진다. 반상은 그 뜻을 잃게 된다.

수법의 세계라고 해서 그 여파로부터 예외가 될 수 없다.
수법의 세계도 좁아진다.

시대는 천재가 매듭짓는다. 의미를 확인한다.
명인이자 영웅이 곧 그 천재. 그러므로 기사 개인의 등장과 퇴장은 곧 바둑계의 이미지, 그 등장과 퇴장에 다름 아니다.

한국의 바둑은 1960년대 이후 오늘까지 도전과 응전의 역사로 반상을 채웠다
일본은 이보다 훨씬 길어서, 이미 400년을 바라본다.

그 제도적 뒷받침은 물론 도전기 제도.
그 가장 극적인 것은 10번기 등 치수고치기.

신화의 시대는 지났는가?
아니다. 대중의 스포츠 시대에서도 본질은 - 아마도 오랫동안 - 바뀔 수가 없다. 
앞으로 어떤 영웅이, 어떤 영웅의 탄생 방식이 등장할지는 자신할 수 없지만, 영웅을 회피하거나 부정한다면, 그건 인간의 인류학적인 조건을 부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아쉽게도 단체리그전과 랭킹시스템 아래에서 영웅은 부족하다. 오청원은 없다. 오청원의 바둑은 없다.

지나치게 짧은 제한시간에 몰린 이벤트성 대국과 상대가 사라진 상황에서 의식의 획기적인 성장은 쉽지가 않다.

VI. 개인의 능동적인 참여와 발전

모든 문화는 각 문화마다 독특한 생명의 강물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의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개념이라 해서 과연 바둑의 세계에도 바람직할까?

예컨대 공정성(公正性)은 인류의 정의관념 중 하나.
특히나 근대 이후 서구 후기자본주의에서의 지배적인 개념.
바둑에서 그에 비견되는 것은 일본에서 1940년대에 발생한 덤의 개념.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랭킹시스템. 과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는가.

실력이 평준화되어 가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단위의 권위가 추락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던 현실. 단위의 추락에 맞추어 덤이 등장한 것도 거의 피할 수 없었던 현실. 그건 인정되어야 한다. 그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여파.
덤 제도하에서는 반집만 이겨도 된다.
그 결과의 하나로는, 다음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이창호는 상대와 다를 필요가 없다. 끝내기의 미묘한 차이에 민감한 그에게는 상대와의 차이가 큰, 그런 세계를 구성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덤이 없을 때에는 포석과 정석의 격변을 볼 수 있었다.
오청원을 볼 수 있었다.
물론 모든 시대의 모든 1인자는 충분히 모든 분야에서 뛰어나다. 그러나 차이는 있다.
정도의 차이가 아니다. 질적인 차이가 있다.

표4. 구별되어야 하는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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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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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덤의 등장 이후 개인간의 차이는 점차 좁혀졌다. 이미 좁혀지고 있었던 개인들의 실력차를 재삼 돌아보는 정도를 넘어서서, 개인의 개성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승부의 차이가 좁혀질 뿐만 아니라, 반상을 구상하는 안목의 차이가 좁혀졌다.

이 글이 과거로의 지향에 머무는 그런 향수 같은 걸까?
아니다. 역사를 돌아볼 뿐. 조건, 그 인간의 조건을 탐색할 뿐.
인간과 문화를 생각할 때 능동적인 반상 인식과 참여가 오늘날 더욱 절실함을 살펴볼 뿐.

의미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재화다.
바둑이란 무엇인가. 그 의미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건만, 당위적인 강조에 그치기 쉽지만
그래도 강조하고 싶다. 무엇보다 바둑에서만의 일도 아니기에.

문화가 풍성해지려면, 개인이 집단에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개인에게 시간은 넉넉하게 주어져야 한다.
공간도 주어져야 한다.
그 시간과 공간을 사회가 어떻게 제공할 수 있는가.
바둑에서도 그것은 언제나 숙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