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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일기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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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의 승부 - 약간은 우울한 기억 둘 - 20대를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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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1월 30일)
5년간의 승부 - 약간은 우울한 기억 둘 - 20대를 보내다
오후 4시 45분.
1년이 가고 또 온다.
10년도 오려고 한다. 내일이면 10년도 간다.
86년 10월 31일.
시 쓰는 친구와 10월의 끝을 만났다.
어떻게 하루를 보낼까?
이른 오후에 흔히 나올 수 있는 말. 나이 든 학생들이지만 방구석에 처박혀 있을 수만은 없는 것. 따분함은 권태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가 집 나이로 29이지?
오늘은 그 가을의 끝이지? 20대의 가을 말이야.
뭘 해보자. 음악회나 갈까?
그 친구는 술을 못했다. 군에서 그만 몸을 크게 상했기 때문이다. 사격장에서.
그러자. 옷도 좀 차려입고 말야.
예약 전화를 했다. 매진이었다.
야, 뭐 그 음악만 음악이냐? 음악실에라도 가자.
넥타이를 맨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동교동 하숙집을 나왔다.
택시! 연대와 이대 사이로 갑시다.
눈 봐 둔 음악감상실이 있었다.
감상실에 들어서니, 비발디의 사계四季가 흐르고 있었다. 몸을 깊숙이 안기고 눈을 감았다. 나도 이제 30이 내일인가. 사소한 사건들이 몇 개 생각에 잡혔다. 나도 이제 30인가. 어떻게 보면 견디기가 쉽지 않은 시간들이 무심하게도 지났구나. 내 무엇 하고 있는 거지?… 상념에 상념….
사계四季가 끝났다. 야, 나가자. 그래, 나가도록 하자.
길가에 내려서니, 마치 1년이 음악실에서 훌쩍 지난 듯, 생소한 세상에 내린 듯했다. 그래, 사계 아니던가. 자, 우리도 이제 30이다. 그래, 이 정도면 30이다. 신촌시장에 들러 뭐 좀 먹고 그만 들어가자.
길엔 그날 최루탄 연기가 자욱했다.
친구가 경쾌한 걸음을 걷다가 상쾌한 표정을 들려주었다.
에취! 한 걸음마다…
에취! …
그 친구는 천생 시인이었다. 최루탄 매캐한 연기에 기침도 누를 수 없었지만, 시심詩心 또한 누를 수 없었던 것이다.
하하하. 야, 오랜 만이다. 네 싯구 읊는 것이.
그 튼튼한 체력이 군대에서 약화된 이후로 그 친구는 시를 쓰지 않았다. 마치 정신도 함께 쇠약해진 듯이.
술은 나 혼자만 했다.
그리곤 걸어서 다시 동교동 하숙집으로.
자, 이제 나이 30이다. 그리 말했다. 서로 축하도 했다.
그러나 어쩐지 변화가 다가오는 듯해서 술을 더 이상 하고 싶은 기분은 없었다. 문제가 심각해지면 술은 피곤한 친구가 된다. 저녁 먹고 일상처럼 그날의 저녁과 밤을 보냈다.
86년 11월.
석사 졸업시험을 봤다. 세 과목. 나는 두 과목을 붙었고 하나는 떨어졌다. 사상을 가르쳐주시던 김홍명 선생이 말했다. 사실 넌 하나만 붙었지. 그러나 다음 학기는 논문학기. 네가 부담을 많이 가질 것 같아서 선생들이 의논했다. 하나 더 합격시키자고.
그래, 사상을 전공할 텐가?
갑자기 듣는 말이었다. 한 번도 생각 못해본 전공, 그 결정.
순간적으로 입에서 말이 나왔다.
논문은 정당에 대해서 써볼까 합니다.
그래? 그러면 이갑윤 선생에게 가봐야겠네.
방을 나와서 건너편 이갑윤 교수의 방을 두드렸다.
네.
저, 논문을 정당 쓰려고 합니다만….
그래?
서가에서 책을 몇 권 뽑아 주셨다.
뒷날의 내 전공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전혀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faction politics, parties and party systems, political parties, japanese style of elections, … 뭐, 대충 그런 것들이 처음 잡았던 책이 아닌가 한다.
86년 12월.
나이 30이 내일이다. 그런 위기감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뭔가 알려고 하는 심정으로 책을 읽었다. 아, 잊을 뻔했다. 선생이 말했다. 책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저자가 어떤 의문을 가지고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 가는가, 그 과정을 유념해서 책을 읽어야한다. 큰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내 인생의 항로가 결정되는 시기였음을 그 때는 몰랐다. 하긴 그렇다. 어찌 그 결정만이 결정권을 갖겠는가. 그러나 다르다. 방향 한 번 잡으면 다시 되돌리기 힘든 결정이 있는 것도 사실 아닌가.
오후 5시 43분.
새해의 둘째ㅅ날인데, 어쩐지 그 시절과 지금의 내 기분이 매우 유사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일기를 쓰고 난 다음에 갖는 것인지, 아니면 그 이전에 가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그런 시기에 대한 가벼운 기억인데, 그래도 일기라서 그런 것인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은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 읽는다. 그다지 큰 고민도 없이 문제의식도 없이 지나온 시간인데, 바둑을 한편으로 옆에 끼고 살아온 시간이기에 읽어주시는 것으로 안다. 내 바둑과 학업이 좀더 진지했다면 그 얼마나 좋았으랴. 둘 다 유쾌한 과정과 결과를 가질 당위성은 물론 없다.
이런 사소한 일기를 읽어주시는 분들께 한 해를 빌어 감사드린다.
새해 밝은 하루 하루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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