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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일기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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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의 승부 - 망설이는 와중에는 - 시간을 기다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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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1월 18일)
5년간의 승부 - 망설이는 와중에는 - 시간을 기다리는 것
이른 아침 5시 14분.
승부는 다양하다. 그러나 큰 승부는 인생에 몇 개 되지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하나일지도 모른다.
나는 하고 싶은 모든 것을 승부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내 인생에서 무엇을 줄기로 삼을까 그건 여전히 - 86년엔 - 고민했다. 통속적인 비유대로 인생은 강물과 같은 것. 하나로 모으면 연못 하나. 물방울 하나.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고민은 정처가 없다. 고민을 싸안을 공부가 없다면. 그건 몰랐었다.
86년의 내 바둑은 승률이 겨우 60.5%였다. 23승 15패.
두세 판 이기면 곧 지고, 또 지면 두세 판 정도 이기고. 그런 흐름이었다.
그러니까 본선에 올라갈 생각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당시는 3차 예선까지 있었다. 4단까지가 1차예선이던가. 3단까지가 1차던가. 4단과 5단이 2차였던 시절이다.
그러나 인연 있는 기전이 따로 있다던가. 제2기에 이어 제 3기 박카스배에서도 나는 16강 토너먼트까지 올라갔다.
(인연 있는 기전에서)
준준결승 1국
白: 五段 정수현
黑: 三段 문용직
1986. 3. 7. 백74수 이하 생략. 백 불계승.
흑35가 무거웠다. 두지 않아서 그만인데 가벼운 돌을 무겁게 만들어 이후의 행마에서 돌이 뭉쳐진 것을 알겠다.
흑69가 패착. 착각한 것이다.
백의 행마가 가볍고 요소요소를 잘 보고 있다.
그것으로 만족할까.
아니다. 그래도 아쉬웠을 것이다. 승부는 지고 나면 언제나 아쉬움이 남는 것.
최선을 다해 두어도 그러할 진대, 나는 최선을 다하지도 못했다. 행마가 저리 둔탁한데 어찌 성의껏 바둑에 나를 맡겼다고 장담할 수 있으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 모든 것이 내 탓이요, 할 그런 철학적 자세는 나에게 없지만, 그래도 허무함은 최선을 다하겠다는 또는 기백을 다하겠다는 그런 마음이 없다면 더욱 크게 남는 법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래도 한 참 후다.
아 참, 인연이라 하니, 하나 더 보자. 나는 2년 후에 작은 우승을 한 번 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신왕전. 그 제1기 결승을 한 번 살펴보자.
(제1기 신왕전 결승1국)
제1기 신왕전 결승 1국
白: 六段 강훈
黑: 五段 정수현
1986. 5. 23. 운당여관. 흑203 이하 생략 흑 2집반 승리.
백24는 어땠을까. 흑25가 좋은 자리이니, 좌상귀에 먼저 걸쳐가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백44도 좁았다. 우변을 지키는 수가 컸다.
그러나 좌상귀 백116 이하가 대단한 승부수. 수에 깊은 강훈 사범의 면모가 여실하다.
흑193이 승부수이자 승착. 백194를 200에 받으면 흑202를 선수 당해 더욱 손해다.
아, 그러고 보니 백166은 A에 젖혔으면 승부는 달랐을 것이다. 아마도 알 수 없는 승부였을 것이다.
정수현 사범이 행마만 가벼운 바둑이 아님을 알겠다. 감각도 경쾌하지만 우변 흑193을 찾아내는 집중력은 또 남다른 것이다.
나는 이 제1기에서 첫판에 졌는데 이홍렬 현 八段에게 졌다.
그 승부처가 생각난다.
(석점의 중앙이 급소)
백1은 미처 생각 못했다. 그저 3에 젖히는 정도로만 생각했다. 백1을 당했을 때, 얼굴이 달아올랐던 것이 선명하기만 하다. 쉽다면 쉬운 수이지만 자기 위주로 판단하는 버릇이 든 사람에게는 잘 안 보일 수도 있다.
제1기 신왕전에는 모두 16명이 출전했으니 여전히 한국바둑의 토대가 좁다는 것을 알겠다. 20년이 지난 요즘은 35세 미만이라면 모두 140명 정도가 될 것이다. 하긴 단위에 제한을 가하면 더 줄어들겠지만.
그런저런 시간. 여름이 다가왔다.
예선 시합이 뜸한 시간 6월. 7월. 8월.
휴학했던 대학원을 다시 다닐 것인가 말 것인가.
그래도 뭔가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남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 학기만 더 다녀볼까.
…
돌이켜 생각하니, 참 가볍게도 세상을 생각했구나. 그런 감회를 지울 수가 없다.
왜 어릴 때는 세상이 멀리 안 보이는 걸까.
커튼을 젖혀보는 窓에 어둠이 짙기만 하다.
여름날의 이 때에는 밝기만 했는데.
그런 걸까.
아니다. 약간 더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인내를 좀더 가다듬을 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뚜렷하지 않아 뭘 해야 할지 망설일 때, 나는 결정하는 편이었다. 새로운 것을 하는 쪽으로.
그것은 지금도 큰 차이가 없다.
그랬다. 그것이 86년 가을학기를 다니고자 한 가장 큰 이유였다.
만약 바둑 성적이 좋았다면 바둑을 열심히 했을까?
쓸데없는 질문이다.
아침이라 부르겠다. 6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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