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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일기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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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의 수순 앞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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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반상 일기(3월 1일) - 누구나의 수순 앞에는
이른 새벽이다. 오전 4시 05분. 5시간을 잤구나. 봄은 왔다지만 아직은 겨울의 그 눈도 바람도 어둠 속엔 섞여 있다. 창밖의 어둠을 열 정도로 나는 새벽의 찬 공기를 참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어제를 생각해본다. 어제의 일부는 그 날, 그러니까 지난 2월의 7일의 함양에 있었지. 아침 10시에 함양군청의 2층에 있었지. 실전 백8을 보고 있었지. 입회인의 의무를 하느라 대국장에 드나들었지. 백8의 무난함에 난방의 소음과 대국장에 붙은 - ‘ㄱ'자 굽은 복도로 연결된 - 대기실에 모인 애기가들의 활기찬 목소리를 잊어버렸지.
실전보
백8은 어제 읽었듯이 무난한 착점이다. 아니, 어쩌면 이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 우하귀에 걸치는 것은 - 그것이 소목걸침이든 눈목자 걸침이든 두간높은걸침이든 - 흑에게 협공을 당해 좋지 않다. 흑의 협공, 그것은 우상귀의 확대까지 겸한다. 백은 그렇게 둘 수가 없다.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한 그림 하나만 그려보자.
참고도1
참고도1 흑10까지의 진행은 백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물론 백은 이렇게 두지 않는다. 흑의 활기찬 행마에 비해 대조적으로 고지식한 행마로 여겨지는 백이다.
그러나 참고도1 백9는 이 한 수. 모양감각으로는 이 한 수. 이 국면에서 이렇게 두어서는 안되겠지만, 어느 프로도 이렇게 두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은 모양의 급소. 두터운 급소. 내가 백이라면 한 번은 두어보리라.
참고도2
실전으로 돌아가자. 흑9는 이 수밖에 없으리라. 참고도2는 백이 만족하는 그림이다. 백의 만족은? 그건 흑의 불만에 다름 아니다.
왜냐? 참고도2에서 흑2와 백3의 교환을 눈여겨 보자. 이제 수순을 잊어버리자. 나의 부끄러운 과거를 가볍게 대하듯이.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 인과는 영원하다지만, 나의 과거에 나부터 관대해지지 않으면 나는 지나치게 과거에 얽매인다. 현재는 과거에 속박된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취기(醉氣)에 따른 부끄럽고 한심한 행동, 치기(稚氣)에 벅차 행한 졸열함. 그것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렇지만 적당히 관대해져야 한다. 그래야 오늘 새벽의 나를 가볍게 행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좀더 너그러울 수 있다.
수순을 잊어버리자. 그러면 보이는 게 하나 있다. 참고도3이 보인다.
참고도3
수순을 바꾸었지만 결과는 참고도2와 다름이 없다. 그렇다면! 흑은 억울하다. 왜 참고도3에서 흑2를 두었을까! 왜 흑2처럼 느슨한 수를 두어서 백으로 하여금 넉넉한 근거를 가지게 했는가? 백이 근거를 충분히 가지면 그 주변의 모든 흑 돌은 엷어진다. 엷다, 두텁다, 하는 것은 나의 돌이 엷거나 두터워서 얻을 수 있는 결과만은 아니다. 그건 상대의 돌에 1/2를 의존한다. 백이 약하면 흑은 자연스레 강하게 되고, 백이 강하면 흑은 허약하게 된다. 나는, 키가 크고 싶은 나는, 역사의 거인(巨人)을 모범으로 삼고 싶지 않다. 왜 구태여? 역사의 위인들은 치장된 사람들이다. 그들의 일부가 전체로 여겨진다. 그들은 자연박물관의 박제품과 다름이 없다. 그것도 없어서는 안되겠지만.
참고도2, 3과 같이 - 수순을 바꾸는 방식으로 - 행마의 우열을 가리는 이 방법은 소위 수나누기(手割論, 配手論)라고 부르는, 17세기의 명인 도우세키(道碩, 1582-1630)의 위대한 발견이다. 돌의 효율을 분석하는 간단하고도 명료한 방법이다.
그래서 단정할 수 있다. 백8 흑9 백10의 수순은 거의 필연에 가까운 것이라고.
참고도4
흑9는 날일자 굳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참고도4 백‘가’를 남겨둔다. 당장 두지는 않겠지만 백 '가'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우변 백에게 편안한 의자를 제공하는 일과 다름이 없다. 바둑은 전쟁의 모형. 게임으로는 제로섬(zero-sum) 게임. 너와 내가 얻은 효용을 합하면 제로(0)가 되는 게임. 내가 10을 얻으면 너는 -10을 얻고, 내가 -10을 갖는다면 너는 10을 가져간다.
그렇다. 그래서 반상은 돌들의 숨가쁜 열정으로 치열하게 전개된다.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툰다. 좋은 자리는 지천으로 널려 있지 않다. 귀한 것은 본래가 적은 법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적은 게 귀한 법이다. 멀고 부족한 것이 귀하게 여겨지는 법이다.
반상만을 두고 본다면 실전의 백10 다음 흑11은 놓칠 수 없는 그 자리가 될 것이다. 그 자리! 어디가 그 자리인가? 힌트는 이미 나왔다. 참고도4가 그 힌트다.
이렇게 본다면, 실전의 백8 이하 백10까지는 누구나 이렇게 둘 수밖에 없는 진행이라고 하겠다. 물론 최선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정도가 2004년의 2월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수순의 집합 중에서 가장 무난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평범한 진행. 무난한 수순. 이 정도로 서로가 만족해야 할 국면.
아직은 두 기사의 기풍이 나타날 때가 아니다.
참고도5
아니다. 이미 두 기사의 기풍은 드러났다. 흑1과 백2 흑3 백4 흑5 백6 흑7까지. 참고도5의 진행은 실전의 진행으로 두 기사의 기풍을 충분히 드러낸 것이다. 백은 두텁게 천천히 덤을 의식해서 급하지 않은 태도. 흑을 잡은 최6단은 선착의 잇점을 살리기 위해 발 빠른 포석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흑1 흑3에서 볼 수 있듯이 실리 지향적이다. 흑5 흑7에서 볼 수 있듯이 - 흑1과 연계하여 - 전투적이다.
백8 흑9 백10은 그 이전, 그러니까 흑7까지의 수순이 낳은 필연에 불과하다. 흑7까지의 반상은 백8 이하 백10까지를 예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함양의 눈이 그립다. 바둑이 다하면 한 잔의 차가 그리워지는 법. 초점이 잡혀지면, 그 배경을 잊는 법. 그래서 벌써 잊혀진 그 날의 함양, 그 눈 쌓인 함양의 쌀쌀한 바람이 그립다. 지나간 건 귀한 법. 그래서 아쉬운 법. 그래서 그리운 법. 대국장 난방의 소음도 그립다. 그렇다. 나를 그리워한다.
오늘을 좀더 크게 열자. 오늘의 나도 있다. 바로 여기에 있다. 곧 어제가 되지 않겠는가. 그리워할 오늘의 나를 열자. 5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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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좋은 공간이 있다는 것을 오늘에야 비로소...역시 문박사님은 바둑에 있어서는 국보급입니다.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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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상대가 강하면 나는 약해진다.상대적이기 때문이다.그러나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약해지지 않고 또한 위축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심지어 거대한 상대의 손안에 꽉 잡혀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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꼼작 못하는 상태에서도... 눈치 빠른 독자는 어떤 경우인지 알아차렸을 것이다.바로 두집을 내고 살아있는 경우이다. 단 두집만 있으면 어떠한 경우에도 두려울 것이 없는게 바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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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바둑을 좋아한다. 바둑의 룰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룰을 만들고, 이룰에 따라 행하면 되는 것이다.탄핵의 룰이 있으면 이룰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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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다. 에너지를 쓸데 없이 낭비하고 있다.룰에 따라 행하라.조용히 행하라.지체한다든가 편법을 행할 생각을 말고.상대가 한수 두었으면 이제는 내 차례다. 조용히 한수 두면 될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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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떠들면 안된다.심지어 상대가 둔 돌을 들어내라고 해서야...룰을 따라 매너있게 처신해야하지 않을까? 한수 앞을 못보고서야 어찌 고수라고 할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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