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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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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회] 6부 깊은 산사의 노승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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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가운데 촘촘히 섬을 들어앉힌 남해안의 풍경은 바다라기보다 오히려 호수처럼 잔잔했다. 구전으로 혹은 영화에서나 보았던 소록도의 모습은 의외로 한적하고 평화스러워 보였다. 소외받은 땅이라기에는 주변 경관이 빼어났고 섬 아래로 보이는 겨울바다가 한없이 푸르렀다.
「황판수씨를 찾아오셨다구요?」
박 화백이 젊은 수녀를 따라 원장실에 들어섰을 때 나이 지긋한 노 수녀 한 분이 박 화백을 맞이했다.
「황판수씨는 완치가 되어 떠나고 없습니다. 그분은 완치 후 한 10년 가까이 자원 봉사를 하시다가 5년 전쯤에 이곳에서 나갔습니다.」
「혹시 어디로 가신다는 말씀은 없었습니까?」
「이곳에 있다가 나가시는 분들은 뭐라고 할까요…… 행선지 같은 것은 잘 밝히지 않습니다.」
박 화백은 노 수녀에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최대한의 협조를 구했다. 노 수녀는 서무과에 전화를 걸어 황판수의 기록을 찾아오도록 지시했다. 잠시 후 젊은 수녀가 서류를 가져오자 노 수녀는 그 서류를 박 화백에게 내밀었다.
「그분하고 관계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붑니다.」
서류에는 황판수의 본적과 생년월일, 그리고 이곳에 들어온 입소 날짜와 퇴소 날짜 등이 적혀 있었고 서류 상단에는 누렇게 빛바랜 황판수의 흑백 증명사진 한 장이 붙어 있었다.
「황판수 씨가 여기 계실 때 그분을 찾아온 사람은 없었습니까?」
「이곳은 부모형제라 해도 잘 오질 않습니다. 1년에 한두 번, 그것도 입소하고 처음 1, 2년이죠. 그 후론 연락이 끊어지는 경우가 대다숩니다.」
「그분에 대한 또 다른 기억은 없습니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박 화백은 안간힘을 쓴다. 여기에서 실마리를 잡지 못한다면 이젠 영영 희망이 없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노 수녀가 뜻밖의 말을 했다.
노 수녀의 말은 황판수의 결혼에 관한 것이었다.
「황판수 씨가 여기 계실 때 같은 처지에 있는 웬 여자와 결혼을 했어요.」
「결혼을 했다구요?」
「오래 전의 일이라 깜빡 잊고 있었는데 황판수씨가 들어온 지 2년인가 3년이 지나 결혼을 했었어요. 소문엔 황판수 씨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서로 잘 아는 사이였다더군요. 참, 그러고 보니 그때 결혼하는 날 황판수 씨 친구 되는 분이 한 명 찾아오셨어요.」
「친구!」
박 화백의 눈이 번쩍 뜨였다.
「확실친 않지만 그때 황판수씨가 친구라 그러더군요. 바깥에 있을 때 가깝게 지냈다고.」
「그분 성함은?」
노 수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면회실에 알아보면 되겠군요.」
「면회실에 접수되는 장부는 5년 단위로 소각해 버리기 때문에 그때 기록은 없을 거예요.」
그 사람이 누굴까. 황판수의 결혼식 날 찾아온 사람은 혹시 추동삼이 아닐까.
「제가 찾아온 그 친구분을 기억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있었어요. 황판수 씨와 같은 숙사에 이동술 씨라고 있었죠. 그분은 밖에 있을 때 바둑을 두던 사람이었나 봐요. 그날 성당에서 결혼식이 끝나고 그분과 황판수 씨를 찾아온 친구가 바둑을 두었어요. 밤을 새워 환자들이 구경을 했죠. 이곳에서도 바둑을 두는 경우가 가끔 있지만 그날 같은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이었죠.」
추동삼이었다. 그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곳까지 찾아와서 바둑을 두고 갈 인물이 달리 있겠는가. 그는 분명 추동삼이었다. 추동삼은 몹쓸 병에 걸린 옛 동료의 결혼식에 왔다가 이 곳 소록도에서 어떤 나환자를 상대로 바둑을 두었던 것이다.
김헌자 사범의 말처럼 추동삼과 황판수는 절친한 사이였고 그런 두 사람의 친분으로 보아 황판수의 결혼식 날 이곳을 찾아 와 바둑까지 두고 갈 사람은 추동삼 이외엔 없었다. 여러 정황을 놓고 볼 때 추동삼이 소록도에 나타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황판수는 어디로 갔을까. 그는 왜 이곳을 떠났을까. 통상 나병환자들은 완치 후에도 한 곳에서 일생을 마감하는 게 보통인데 그는 왜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곳을 떠났을까.
서류상단에 붙어있는 빛바랜 황판수의 흑백사진을 보며 박 화백은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여러 가지 상념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후 황판수 씨 친구분은 다시 온 적이 없습니까?」
「글쎄요. 그것까진 기억을 못하겠군요.」
「황판수 씨와 결혼했던 여자는 어떻게 됐죠?」
「그 여자는 결혼하고 몇 년 후에 죽었어요.」
「……황판수 씨는 살아 계실까요?」
노 수녀는 박 화백을 향해 온화하게 웃었다.
「천주님께서 지켜주실 겁니다.」
소록도 녹동항에 저녁 안개가 자욱하다. 그 위로 안개비가 내린다. 바다와 섬이 뿌우연 안개 속에 휩싸인다. 섬은 흡사 유령처럼 안개속에 자리를 잡고 저만치 앉아 있다.
박 화백은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안개를 헤치고 어디선가 꼭 추동삼이 나타날 것만 같은 환각에 박 화백은 자꾸만 뒤를 돌아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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