死石作戰
선비만석
결혼을 하고 남자와 여자랑 같이 산다는 것이 처음 신혼 때는 깨소금 맛으로 재미있게 살았지만 날이 갈수록 직장 일에 또는 사회생활에 지치다 보니 십년이 넘어서서는 아내와의 관계가 아무래도 신혼 때처럼 아기자기한 맛이 없을 수밖에 없다. 길준도 그랬다. 소위 권태기라는 것이 그들 부부사이에도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었음에도 길준은 요즘 들어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이 일주일이면 하루가 될까 말까였다. 아내도 길준에게 귀가를 늦게 한다고 잔소리 하기는 커녕, 길준이 집에 들어오기 전이 이미 퍼질러 자느라고 길준이 들어오건 말건 안중에도 없었다.
남자가 밖으로 돈다는 것은 일정 부분은 여자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 대체적인 사회적 여론이다. 아니 집에 들어가면 화장기라고 없는 푸시시한 얼굴로 입가에 침이 번들번들 한 모습으로 겨우 일어나는 아내에게 아무리 마음 좋은 남편이라도 정나미가 덜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거늘 요즘 들어 둘째 아이 까지 유치원에 보내고 아직은 엄마 젖을 파고드는 셋째에 치인 탓인지 아내는 늘 피곤한 얼굴로 길준이 들어오건 말건 도통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길준은 집안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집으로 퇴근해서 들어가 봐야 아무런 재미도 없고 여차하면 초등학교에 들어간 첫째 놈의 학교 숙제를 봐줘야 하거나 아니면 아이들 등살에 밖으로 나가기 일쑤였다. 오늘 아침 출근도 하기 전 아내는 길준에게 일찍 들어오라고 잔소리를 해대었다.
그런 길준에게 오늘은 참으로 신나는 날 이였다. 오후에 결재를 하러 전무 방에 들어갔더니 전무가 길준에게 시간을 내라는 부탁을 한 것이다.
“이봐요, 최 부장 오늘 저녁에 특별한 일은 없지?!”
“예,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만....”
“그래요, 그럼 오늘 나하고 손님 접대를 좀 해야 겠네.....”
“손님 접대라뇨? ”
“아 우리 회사가 자재납품 하는 H기업 전무에게 접대를 해야 하는데 자네가 알다시피 요새 내가 건강이 좀 안 좋아서......”
“아, 예 전무님 그런 일이라면 제가 알아서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아 그럼 퇴근하는 즉시 나랑 함께 가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길준은 이게 웬 횡 재수람 하고 생각이 들었다. 집에 들어가 봐야 마누라 하고 면대하면 짜증만 날 텐데, 핑계 김에 술도 마시고 집에 늦게 들어가도, 마누라에게 회사일 때문에 늦었다는 구실이 생긴 것이다. 어서 퇴근 시간만 되기를 기다리는 길준은 오늘 따라 시계가 이상 하리 만치 늦게 가는 것 같았다. 퇴근 시간인 여섯시가 되자마자 길준은 서둘러 나설 차비를 하고 회사 정문 앞에서 전무를 기다렸다. 한 십분 쯤 기다리니전무의 차가 길준 앞에 섰다. 에쿠우스 리무진이다. 길준 에게는 그림의 떡인 우리나라 최고의 차였다. 길준이 운전석 옆에 타자 차는 미끄러지듯 약속장소로 향했다. 시내의 일식집으로 도착한 차를 내리자 종업원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안내를 받아 아늑한 방으로 들어서자 상은 네 명의 자리가 세팅이 되어있었다. 잠시 기다리니 H기업 손님들이 들어온다. 모처럼 만의 일식이라 거기다 내 돈 안 들어가는 회사의 접대 잘이니 길준은 상대방 회사의 손님들에게 열심히 잔을 권하면서 자신도 열심히 먹고 마셨다. 저녁 자리가 끝난 것은 그로부터 두 시간 뒤였고 이차로 자리를 근사한 룸으로 옮겼다. 룸싸롱에 들어간 전무는 어여쁜 아가씨 5명을 선발하였고 거기다 발렌타인 30년산을 주문하여 그야말로 길준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입안에 감도는 발렌타인 30년산의 향기와 술맛은 길준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아가씨들이 손님들과 부루스를 추도록 길준은 노래를 불렀다. 길준의 애창곡인 나 훈아의 사랑을 멋들어지게 부른 길준은 폭탄주를 만들어서 손님들에게 돌리고 자신도 마셨다. 이미 집의 아내에 대한 감정 따윈 잊어버리고 손님 접대를 최대한 기분 좋게 하여서 이참에 전무의 눈에 확실한 눈도장을 찍을 참 이였다. 룸싸롱의 접대가 끝난 것은 거의 열한시가 넘어서였다. 손님들을 회사의 차로 모시도록 조치를 취한 후 길준은 전무를 전무의 차에 태웠다.
“최 부장!!, 오늘 고생 많았어!”
“별 말씀을.......”
“내 내일 사장님에게 보고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자네도 어서 들어가 보게......”
“안녕히 가십시오.”
전무의 차가 길준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길준은 그제서야 긴장이 풀려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택시를 잡으려고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길준의 핸드폰이 울려대었다.
마누라였다. 길준은 목소리를 착 깔고 말했다.
“여보세요.”
“아니, 당신 오늘 일찍 들어 오랬더니 여직 뭐하고 있는 거예요.”
마누라의 목소리가 고음으로 올라가 있었다.
“이봐, 내가 뭐 늦고 싶어 늦나. 오늘 H기업 사람들 접대가 있어 지금 끝났어.”
“그놈의 접대는 당신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요. 어째서 사람이 거절도 할줄 몰라요.”
“이 사람아, 거절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어찌 거절을 하나 전무님이 나를 아예 지목해서 내가 가야 한다는데.”
“핑계대지 말아요, 당신 손님접대 핑계대고 딴 짖 하러 다니는 거 다 아니까.”
“아니, 이 사람이, 생사람 잡는 소리를 하고 있어. 남편이 회사일로 손님접대를 했다는 데 왜 안 믿고 그래.”
“평소에 당신이 믿게 했어야 믿지.”
“내가 뭐를 안 믿게 했다는 거야.”
“여하튼 여러 소리 하지 말고 지금 당장 들어와요.”
“지금 택시 잡고 있으니까 끊어.”
길준은 핸드폰을 끄고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택시를 잡으려고 했으나 빈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이럴줄 알았으면 룸싸롱에서 콜택시라도 부를 것을 하고 후회하고 있는데 택시 하나가 길준의 앞에 정차하였다. 마침 룸싸롱으로 오는 손님을 모시고 오는 택시였다. 길준은 얼른 그 차에 올라탔다. 집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이 다될 무렵 이였다. 길준의 아파트는 14층 이였다. 엘레베이터가 올라가는 순간 길준은 취기가 화악 올랐다. 아파트의 초인종을 누르니 아내가 문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람. 여느 때와는 다르게 아내가 선녀처럼 보였다. 아내는 화장을 곱게 하고 옷차림새 또한 달랐다.
“아니, 이게 누구야?! 내 아내 홍 미숙이가 맞아?!”
“당신,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기나 해요?!”
“무슨 날인데 뭐 제삿날이라도 되나?”
“어휴 내가 저런 사람을 믿고........”
아내는 화가 잔뜩 나서 쌩하니 방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길준은 거실로 들어서서 아파트 벽 한 구석에 걸린 달력을 쳐다보았다. 11월 11일 그곳에 빨간 색으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길준은 그것을 보고서야 퍼뜩 정신이 들었다. 결혼기념일 이였다. 며칠 전에도 기억 했던걸 하필이면 오늘 잊어버리다니 오늘은 아무래도 사석작전으로 나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철저히 죽이고 마누라의 기분을 업 시키려면 그 방법 밖에는 없다. 밤이 다 새도록 쌍코피가 터지는 한이 있어도 봉사하는 방법뿐 이였다. 그 다음 날 길준은 회사에 병가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