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수(訓手)의 끝
선비만석
땀이 난다. 겨울인데도 불구하고 손바닥엔 땀이 나서 축축 하다. 벌써 밖은 어둠이 내려 온지 오래되었다. 기원 이곳저곳에선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어수선 스럽게 느껴진다. 반면을 아무리 훑어봐도 바둑은 불리하다. 오늘 따라 너무도 침착한 최씨의 면상이 무척이나 얄밉다. 오후 두어 시부터 시작한 최씨와의 방내기가 오늘도 쉽사리 끝나기는 틀린 것 같다. 두점머리 기원에서 끈질기기로 유명한 최씨와 방내기를 시작한 것이 애초부터 잘못이다. 최씨야 이 기원의 건물 주인이니 7층짜리 이 건물에서 나오는 월세만으로도 아쉬울 것 없이 살 수 있으나 나 같은 샐러리맨이야 월급 이외에 수입은 없으니 방내기로 돈을 잃으면 그달 용돈이 당장 궁해지니 오로지 승부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바둑 두는 사람 어디 갔나?!”
나의 끝없는 장고에 드디어 지친 최씨가 한 마디 내뱉는다. 최씨는 나와는 앙숙이다. 바둑실력은 최씨가 강3급인 나에게 두 점을 접고 두니 5급 이지만 말이 5급이지 기원에서 5급으로 안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물렁물렁한 3급과는 호선으로 두어도 꿀리지 않는 최씨가 나와 두 점을 접고 둔다는 이유로 오로지 5급으로만 바둑을 두는 것이다. 이러한 최씨에게 방내기를 해서 돈 따먹은 사람은 만방기원 에서는 손가락에 꼽을 만큼 몇 사람 안 된다. 그 중에 내가 가장 악랄하게 최씨의 돈을 따먹었으니 자연 나는 최씨에게 앙숙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이 과장님, 최 사장 혼내 주려다 오히려 혼나게 생겼네 그려.........”
만방기원 원장이 최씨와 나의 대국을 살펴보다 한마디 거든다.
“원장님, 조용히 하십쇼. 모처럼 고수 대마하나 잡게 생겼는데........”
최 사장은 누가 훈수라도 할까 아예 입도 쩍 못하게 담금질을 한다. 어쩌다가 이지경이 되었는지 모른다. 최씨의 대마를 몰다가 오히려 내 대마가 역공을 당하여 활로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쌈지를 뜨고 산다는 것은 무조건 지는 일이다.
“백이 죽는 말은 아니잖아..........!!”
만방 기원에서 최고수로 통하는 영재바둑학원 김 사범이 밖으로 나가다 슬그머니 들여다 보고 한마디 던지면서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최씨의 눈 꼬리가 위로 좍 올라가더니 험한 말이 금 새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아니, 지가 고수면 고수지....... 씨 이 팔.........왜 방내기에 훈수 질이여........ ”
만방으로 이기려다 오히려 만방으로 지게 생겼으니 쌈지라도 뜨고 살 수 밖에 없었다. 고수 체면이 말이 아니다. 하수에게 역공을 당하여 겨우 쌈지를 뜨고 사는 꼴이라니 울화가 슬그머니 치민다. 거기에다 후수로 쌈지를 뜨고 살았으니 맥이 탁 풀린다. 선수를 잡은 최 씨는 반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끝내기에 돌입한다. 선수 끝내기를 손바람을 일으키며 세 곳을 당하고 나니 아무래도 두 방이 넘어설 것 같다. 기본 이 만원에 한방에 만원씩이니 사만원이 지갑을 이탈할 순간이다. 오후 내내 최씨를 붙잡고 알 구어 먹은 사만원이 도로 아미타불이 되는 것이 못내 아쉽다. 결국 열 세집을 지고 사 만원을 반납했다.
“에이 김 사범 훈수 아니면 만방인데......... ”
“억울하면 한판 더 하던지.........”
최씨가 나를 약을 올리려는지 한마디 건넸다. 오늘은 컨디션이 안 좋은 듯싶다. 이런 날은 피해 가는 것이 상책이다.
“저녁 먹어야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기실 아까부터 진동으로 울려대는 것을 안받다 보니 그것도 신경이 쓰였다. 찍힌 전화번호를 확인해 보니 친구였다.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울리자마자 이내 걸걸한 친구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귓가를 울렸다.
“야. 이눔아 형님이 전화하면 데깍 받을 일이지 와 전화는 안받고 지랄이고........”
“아....진동으로 해놓고 바둑 두느라 잊어버렸다.”
“미친 넘, 니 그 바둑 실력으로 또 방내기 했나?! 니 하수들 델구 노는게 그리 재밌나?! 자석아. 사내자식이 고수하고 방내기를 해야 바둑이 늘지 아직도 5급하고 방내기나 하구 있으니 임마 자식아 그래갖고 니는 강1급 되기는 애시 당초 글렀다.“
“임마.......강1급 하구 내기바둑 둬봐야 맨날 돈이나 갖다 바치지.........”
“야 이 문디 자슥아 당구도 고수랑 쳐야 늘 듯이 바둑도 고수랑 둬야 느는 거여 맨 날 하수랑 두어봐야 수만 줄지....한심한 자석아 저녁 묵고 내하고 한수 하자”
“니 어딘데.......?!”
“문디 자슥 방학이라 내 집에 안 왔나....”
“어 그랬냐? 그래 그럼 어디서 저녁 먹을래?”
“야, 오랜만에 꼼장어에 소주 한 잔 해야 안 되겠나?!”
“그래.....알았다. 그럼 홍가네 집에서 만나자.”
“그래 퍼뜩 오너라........”
기원문을 나선 나는 홍가네 집으로 향했다. 오 분을 걸어야 하는 거리에 있는 홍가네 집에 들어서자 꼼장어 굽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가슴통이나 허리통이 절구통 같은 홍가네 홍여사가 비지땀을 흘리며 꼼장어를 굽느라 정신이 없다. 녀석은 벌써 와서 진을 치고 앉아서는 나를 보자 반갑게 손을 흔들어 대었다.
“야, 이 얼빠진 문디 자슥아 니 최사장 돈 따 묵는게 그리 재밌나?!”
“재미는 무슨......최씨가 나하고는 앙숙이라........”
“그러게 첫 번에 길을 잘들여 놔야지 첫 번에 길을 잘못 들여놔서 니만 보면 만만해 가지고 안 그러나 하수는 아예 첨에 기를 팍 죽여 놔야 한다니까........”
“그런가.........최씨하고 붙으면 자꾸 만방으로 가게 되네.........”
“문디 자슥아 니가 그러니까 맨날 3급이지.......”
“시끄럽다. 고마 쐬주나 한잔 부어라......”
“허메 자슥이 오기는 있어갖고.........”
“이 선생, 니는 학교서 애들은 안 가르치고 바둑만 두냐?!”
“임마가.....내가 선생질 하는게 언제인데 애들이야 지들이 알아서 공부 열심히 한다. 바둑이야 내 취미 생활이지........”
“니가 선생들 바둑대회에서 우승했다고 바둑지에 났더라........자식이 학교 교실에다 바둑판 갔다 놓고 두는가.........”
“자슥아, 내 한수 훈수 할라니 잘들어라.......고수가 될라믄 마음을 비워야제........오로지 이길라고만 하니까 바둑이 안 느는 기라”
“그럼 질라고 두는 놈도 있냐?”
“바둑은 임마 서로의 수담이여.....상대방이 공격하면 물러설 때도 있는 거고 내가 공격하면 상대방이 물러설 때도 있고.....서로가 최선의 착 점을 찾아서 구름에 달 가듯 하는 거여...”
“이 자슥이 내가 지 학생인줄 아나 잔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셔라.”
나는 친구가 자꾸만 훈수라고 떠드는 말에 비위가 상했다. 놈은 언제나 나보다 한발 앞서 나갔다. 학교에서도 맨 날 일등을 맡아 놓고 하는 바람에 나는 고등학교 3년 동안 한번도 일등을 해본 적이 없었고 바둑도 자식은 강1급을 두는데 나는 3급이 고작이니 어쩌다 만나면 이 선생은 마치 제 학생마냥 내게 훈수를 해대곤 하였다. 하지만 녀석에게도 약점 하나는 있었다. 아직 결혼을 못한 것이다.
“임마, 니는 왜 장가 안가냐?”
술이 어느 정도 취기가 오르자 나는 친구 놈의 약점을 물고 늘어졌다. 그러자 놈이 취기로 벌겋게 닳아 오른 얼굴을 찡그리며 나를 쳐다보더니 말했다.
“임마, 여자가 없어서 장가를 안 가는게 아니다. 내가 아직은 혼자이고 싶어서 그런다.”
“웃기고 있네.....임마 솔직히 너 전부터 여자 앞에서면 말도 못 꺼내잖아”
“빌어먹을 자식, 그래 니가 장가갔다고 나한테 유세 떠냐?!”
“너 장가들라면 나한테 훈수 좀 받아야 할 것이다.”
“이자식이, 장가가는 것도 훈수 들어서 가냐?!”
“임마, 바둑도 고수가 훈수 하듯 장가도 먼저 간 내가 훈수를 들어야 하는 것이여”
“훈수 좋아하시네........”
“임마, 여자는 찍어야 하는 거여......”
“미친놈, 여자가 나무냐? 찍게......”
“그래, 내 사람 만들려면 찍어야지.........”
“어떻게 찍냐?! 지나가는 여자 맘에 들면 그냥 찍어..........”
“임마, 담에 조용하니 찾아오너라........내가 한수 가르쳐 주마......”
꼼장어 몇 토막 남은 것을 안주 삼아 소주 한 병을 더비우고 나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친구가 비척거리며 일어나더니 나를 부등켜 안으며 말했다.
“임마, 니 마누라 내 훈수 덕에 니눔 한테 시집 간줄 이나 알어라......”
“뭐라고?”
“야, 이 눔아, 제수씨 나 좋다고 자꾸 따라 다니 길래 공부 방해 되어서 니 놈이 제수씨를 정말 좋아 한다고 내가 훈수해 준거를 니가 알어?!”
녀석의 취기 오른 얼굴에서 술 내음을 풍기며 터져 나온 그 말 한마디는 정말 머리 아픈 훈수였다. 허긴 녀석을 죽자 살자 따라 다니던 마누라가 대학교에 같이 진학을 하고 녀석과 떨어진 후로 내게 갑자기 다가온 이유를 여직 몰랐었는데 이제사 녀석의 꼼수같은 충격적인 훈수로 마누라가 내게 시집온 이유가 밝혀진 것에 난 뒤통수에 망치로 맞은 듯 심한 충격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