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목 잡혔다(3)
선비만석
361로의 반상위에 검은 나비와 흰나비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춤을 춘다. 일진광풍처럼 격정의 춤사위가 펼쳐지는가 하면 나긋나긋 사내의 간장을 녹여대는 기녀의 춤사위도 펼쳐진다. 밀고 당기며 시간의 흐름 속에 춤판은 더욱 무르익는다. 거친 호흡이 일기도 하고 부드러운 입김이 귓불을 간지럽게 하기도 하는 어울림 속에서 어쩌면 시간은 멈추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아늑한 환영 속에서 민석은 타오르는 격정에 몸을 맡기고 반상위에 그림을 그려본다. 흰 꽃잎 하나하나가 검은 꽃을 싸고돌아 그려지는 그림 속에 그들은 자신을 잊어버렸다. 민석은 승부에 집착하기 보다는 한판의 춤사위 같은 반상위의 어울림 속에서 한 마리 검은 나비가 되어 백옥 같은 꽃잎을 타고 반상위에 마지막 돌을 놓았다.
반집.......민석이 반집을 이겼다.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결국 마지막 대국으로 승부를 넘긴 민석은 꿈에서 깬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역시 고수시네요. ..........”
여자가 흥분된 표정으로 얼굴이 발갛게 달아 오른 채 민석을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아뇨.......제가 처음으로 고수를 만난 것 같습니다.”
민석은 진심으로 그렇게 말했다. 프로에게 정선으로 버티는 민석이 여자에게 더군다나 처음으로 보는 아마추어 여자에게 이렇게 당하기는 처음이다.
“김 과장이 정신을 바짝 차린 모양이네..........”
원장은 언제 왔는지 민석에게 약을 올린다. 아마도 두 사람의 대국에 관심은 많으나 누가 이기든지 어떤 소원이던지 소원을 들어 주기라는 엄청난 내기 바둑이니 이 대국을 성사시킨 그로서는 조금은 관심이 가는 그런 일일 것이다.
마지막 대국은 서로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진행 되었으나 결국은 민석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물 흐르듯 유연하게 두는 상대방의 실력에 민석은 결국 대마 하나를 상납하고 돌을 던졌다. 전투면 전투 실리를 추구하는 솜씨, 도데체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민석은 바둑이 끝나고도 멍하니 상대편을 바라보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소원을 말해도 되겠지요?!”
멍한 정신으로 앉아 있는 민석의 귓가를 여자의 맑고 고운 목소리가 파고 들어왔다.
“네에.........그러세요.........어떤 소원이던 들어 드려야지요......”
민석은 여자가 어떤 소원을 말할지 몹시 궁금했지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소원을 말할지도 몰라서 바짝 긴장이 되었다.
“결혼 하셨어요?!”
뜬금없이 여자가 민석 에게 결혼을 했느냐고 물어오자 민석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니 소원을 말하시지 않고 왜 남의 결혼 여부를 물으세요.........”
“묻는 말에 답은 주셔야죠......”
여자가 강압적인 어투로 민석에게 답을 강요 했다.
“아직 결혼은 못 했습니다?!”
“아니.........여직 결혼도 못하시고 뭘 하셨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여자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민석에게 되물었다. 순간 민석은 기분이 상했으나 그렇다고 뭐라고 말 하지도 못하고 어물쩍 넘어 가려고 그렇게 말했다.
“그럼 제 소원을 말할까요?!”
“네.......그러세요........”
여자는 민석을 빤히 쳐다보며 예의 그 웃음을 얼굴에서 지우지 않고 있었다. 어찌 보면 상대방을 그 웃음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그런 웃음 이였다.
“저랑 결혼해 주세요...............”
“네에!!........................뭐라고요?!”
민석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여자의 말뜻을 언뜻 이해되지 않아 되물었다.
“저랑 결혼해 달라고요.......”
“아니.......초면에 무슨 그런 말씀을.........”
“이거 소원 들어주기 내기 바둑 아닌가요?!”
“네........그렇긴 하지만.........”
“왜요?!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럼 입회인이 필요하세요?! 삼촌 이리 와보세요...”
민석이 말릴 틈도 없이 여자는 원장을 불렀다. 원장이 빙글 빙글 웃으며 두 사람의 자리로 다가왔다.
“왜? 바둑이 끝났으면 소원을 말해야지........나는 왜 부르남?!”
“김 과장님이 아마 입회인이 필요한가 봐요.......”
“아니 김 과장 내가 입회를 꼭 해야 하나?”
“아니 그런게 아니라................”
“소원이 뭔데 그러나..........”
“이분이 결혼을 해달라고 해서................”
“이런 못난사람......그게 뭐 그리 대단한 소원이라고....자네가 유부남도 아니고 총각인데 뭐가 걱정인가......그리고 우리 조카도 엄연한 처녀 인데.....”
원장은 더 이상 민석이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대었다. 결국 민석은 내기바둑에 진 대가로 결혼을 하겠다고 약속을 하였다. 그리고 양가의 상견례가 끝나고 난 뒤 아내가 될 여자가 여류 프로입단대회에서 입단한 사람인걸 알았다. 또한가지 이유는 민석을 탐내던 원장이 조카딸의 사위감으로 점찍어 두고 벌린 계략이란것을....
그해 가을 민석은 노총각 딱지를 떼긴 하였으나 내기바둑 때문에 발목 잡힌 자신의 모습에 한이 맺혀 다시는 내기 바둑을 두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