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내는 바다와 같다. 아침 바다 풍경을 보며 아내를 느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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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
선비만석
바둑판을 앞에 놓고 아까부터 장고에 들어간 상대방의 고개 숙인 모습이 조금은 처량해 보였다. 자신이 둔 강수에 고민하는 약자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이 짜릿한 쾌감은 늘 그를 흥분시켰다. 마치 사랑하는 여자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처럼 말이다.
“어허!!! 장고 끝에 악수 난다 든데 뭘 그리 장고를 하나...”
“거참...시끄럽구먼...!!”
오늘 따라 하수인 최씨가 쩔쩔 매는 모습에 길준은 못내 통쾌하다 못해 시원하게 뻥 뚫린 바다를 보는 느낌 이였다.
어제는 두 점을 접고 두는 최씨에게 뜻하지 않게 거금 십만 원이나 뜯겼으니 오늘은 단단히 복수를 하리라 벼르고 나온 터라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기원에 들어서서 최씨와 방내기를 벌렸다.
“아니 아침 수저 놓자마자 어디로 가요?!”
거실을 나서는 길준 에게 아내가 한마디 하였으나 들은 척 만 척 하면서 길준은 기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는 길준 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어제 잃은 용돈을 회수하지 못하면 일주일 내내 용돈 없이 살아야 할 판이니 다급한 심정이야 어디에다 하소연을 할 것 인가.
최씨의 대마하나가 길준 에게 걸려들었으니, 그 대마를 잡으면 족히 일곱 방은 될 터이고 일곱 방이면 한방에 오천 원이니 삼만 오천 원을 한번에 복구할 기회가 생겼으니 길준은 더욱 최씨에게 심리전을 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에이 더럽게 걸려들었네....!!”
최씨가 투덜거리면서 타개를 한답시고 건너 붙였다.
그러나 한번 걸려든 대마를 절대로 살려주지 않는 길준의 독기가 이미 최씨의 대마에게 마지막 독수를 던진 터라 대마의 목숨은 이미 끊겼다. 마지막 공배까지 메우고 나서 죽은 대마를 들어내고 계가를 해보니 길준이 칠십 두 집을 이겨 여덟 방이 되었다.
최씨가 지갑에서 사만 원을 꺼내서는 길준의 앞으로 휘익 던지듯 내민다. 길준은 그
돈을 냉큼 받아서는 뒷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에이 재수 더럽게 없네…….!! 첫 판부터 이게 뭐람…….”
최씨는 연방 길준이 들으라는 듯 투덜거리면서 다시 바둑판 위에 두 점을 깐다.
“어허…….왜 이러시나?! 어제 내 돈을 십만 원이나 챙겼으면서…….”
“어제는 어제고, 젠장 오늘 아침에 마누라가 잔소리 해대더니 재수에 옴이 붙었나?!”
최씨는 길준 에게 첫 판부터 크게 당한 게 못내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승부 세계일수록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길준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포커에서도 결국은 냉정한 사람이 돈을 따듯이 승부에선 늘 표정이 변하지 않는 사람이 제일 두려운 존재이다.
최씨는 두 번째 판이 되자 더욱 신중해 지더니 길준의 백 진영을 야금야금 쳐들어오면서 자신의 진영을 확실히 지키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길준은 최씨의 바둑실력이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란 것을 안다. 길준이 우겨서 두 점을 접고 두기는 하지만 기실 정선으로 두어도 길준이 쉽게는 못 이긴다.
다만 최씨가 쉽사리 흥분하는 다혈질 체질이라 길준이 강하게 공격을 하면서 슬슬 심리전을 펼치면 최씨가 걸려드는 것이다.
두 번째 판은 길준이 한방을 졌다. 다행히 패를 이겨 아홉 집을 졌기에 망정이지 아니
면 아까만큼은 졌을 뻔 하였다.
“에이 다 이긴 바둑을 지네..”
길준은 최씨가 들으라는 듯 그리 사설을 풀면서 세 번째 판을 두어가기 시작했다. 이번은 길준도 정신을 바짝 차렸다. 오늘은 최씨의 기를 확실히 꺽어 놓을 심산 이였다.
바둑이 한참 무르익어 길준은 하변에서 시작된 흑의 대마 공격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 들었다. 대마를 공격 하면서 두 집을 내고 살게 하며 얻은 소득이 세 방이냐 아니냐의
문제였다.
“띠리링. 띠리링..”
길준의 핸드폰이 아까부터 울리고 있었다. 마누라가 분명한데 바둑에 빠진 길준은 전화를 받지 못하고 상대방의 대마 공격의 급소를 노려보았다.
“ 거참 전화 좀 받아!! 시끄러워 바둑 안 되네”
최씨가 신경질을 부렸다.
길준은 핸드폰을 꺼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왜 자꾸 전화질이야!!..”
길준은 아내에게 언성을 높였다. 한참 중요한 때에 아내가 전화질을 해대니 미칠 노릇 이였다. 그놈의 핸드폰은 길준 에게 강아지 목 달개나 다름없었다. 길준이 안보이면 아내는 언제나 핸드폰을 해대니 그것보다 더한 족쇄가 있으랴
“아니 이 양반이 오늘 아버님 댁에 가기로 한거 잃어 버렸어요?!. 딴소리 말고 빨리 와요. 기원으로 찾아가기 전에..”
길준은 아차 싶었다. 오늘이 장인어른의 팔순인데 그걸 잊고 아침부터 기원엘 왔으니 아내의 언성이 높아지는 것이 당연하다.
“알았어!! 금방 갈께. ”
길준이 통화를 끝내고 바둑판을 내려다보니 공격하던 최씨의 흑대마가 활로를 찾았다. 제길 이래저래 답답한 노릇이다.
“나 가야 하겠네!”
“아 이 사람아 판은 마치고 가야지”
“거참. 집에서 찾네, 오늘이 장인 팔순이여..”
“핑계는 돈 따먹고 가려는 거는 아니지?!”
최씨가 길준의 비위를 긁었다.
“이번 판은 내가 세 방은 이긴 거여, 돈번 줄이나 알어”
길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 분 거리에 있는 집으로 들어서자 아내는 미장원에 다녀 왔는지 뽀샤시 한 얼굴에 화장을 한 것이 평소보다 십년은 젊어 보였다.
“아니 이 양반이 아직 세수도 안했우?”
바둑을 두다 들어온 부스스한 길준의 몰골이 한심스럽다는 듯 아내는 혀를 끌끌 찼다.
길준은 그런 아내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서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면서 부산을 떨고 옷장에서 양복을 꺼내 입었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오자 결혼한 외아들과 며느리가 차에 타고 기다리고 있었다. 길준이 아내와 차에 오르자 차는 나는 듯 처가가 있는 속초로 향했다.
춘천에서 속초 까지는 두 시간밖에 안 걸리니 그동안 잠이나 한잠 자야겠다고 생각한 길준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내참 이양반이 기원 가서 바둑 둔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잠을 자요!!”
그런 길준이 못 마땅한 아내는 한마디 내 뱉었다.
“잠자는 것도 허락 맡고 자나?!, 이 사람이 요새 왜 잔소리가 많아.”
“당신 바둑 실력이야 뻔 하지, 남에게 맨 날 돈 가져다 바치지 말고 그 돈 날 주지”
“아니 이 사람이..자네가 바둑을 뭘 안다고 잔소리여.!!”
“사람 무시하네요. 나도 바둑 좀 두어요”
“어허. 내참 자네가 무슨 바둑을 두어.”
“그럼 도착하면 한판 두어 볼래요?!”
“몇 점이나 깔고?!”
“몇 점 접어주면 이기 겠수?!”
“아홉 점 접어도 질 텐데. 무슨..”
“이 양반이 사람 무시하네.”
“좋아 자네 친정 가서 한판 해봐!!”
“좋아요 나중에 다른 말마세요. 기왕이면 내기 바둑으로 합시다.”
아내는 점점 길준의 약을 올리려는지 큰소리를 쳐댔다.
아내가 자신 있게 말하자 길준은 속으로 뜨끔 하였다. 허긴 장인이 속초에서 아내가 어렸을 때부터 기원을 하고 있으니 아내가 바둑을 전혀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알아봐야 오목이나 그저 단수정도나 아는 것이겠지 하고 길준은 잠이 들었다.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요.”
꿈속에서 최씨의 대마를 왕창 잡아서 신나던 길준은 그만 아내가 깨우는 바람에 눈을 떴다. 벌써 속초에 도착한 모양이다.
[아깝다. 만방으로 이기고 있었는데....]
길준은 잠속에서의 꿈이 너무 아쉬웠다. 장인의 집은 영랑호 주변에 위치해 있어서 경치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장인의 집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동서들이 반갑게 맞이해 준다.
“형님!! 오랜만입니다.”
바로 손아래 동서가 제일 반갑게 손을 내민다.
“그러게..일년 만인가?!”
길준은 손아래 동서가 나이 어린 셋째, 넷째 동서보다 가장 맘에 들었다. 손아래 동서는 바둑도 길준 에게 호선으로 대적이 되고 고스톱 또한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명절 때나 집안 행사에서 만나면 가장 시간 보내기 좋은 동지였다.
“아이고, 제부가 제일 반가워하시네.!!”
아내는 그런 제부에게 눈을 흘긴다. 두 사람이 맡 붙으면 늘 밤을 지새우고 뒷수발은 자신이 해야 하기 때문에 조금은 얄밉기도 하고 남편에게 살뜰히 대하는 제부가 고맙기도 한 때문이다.
장인어른의 팔순은 집안 식구끼리 조촐하게 지내자고 하시 덕분으로 오랜만에 집안 끼리 조촐한 저녁 모임에서 오간 술 몇 잔에 길준은 기분이 좋아졌다.
“형님!! 한판 해야지요?!”
손아래 동서가 슬슬 도전을 해온다. 두 사람 다 오로에서 자주 만나 자웅을 겨루긴 하지만 오픈에서 만나는 것은 일년 만이니 당연히 바둑이 먼저 화제에 오른다.
“물론이지, 오늘은 그냥은 없네 방내기로 함세.”
“좋아요, 저야 형님이 돌아갈 차비를 보태 주신다니 감지덕지죠.”
두 사람이 저녁 식사 후 사랑방에서 시작한 바둑은 밤 열시가 넘어서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었으나 길준은 오늘따라 컨디션 난조인지 주머니 돈이 절반은 동서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어휴, 제부 우리 영감 돈 다 따먹었나 보네...”
아내가 차를 가지고 들어서면서 인상이 찌푸려 진채 바둑판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는 길준이 들으라는 듯 한마디 내 뱉었다. 길준은 늘 아내 앞에서 제부는 하수라고 말했는데 체면이 구겨진 자신을 보는 아내으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형님이 오늘은 제 차비를 보태 주시네요..허허”
동서는 바둑을 이겨 기분이 좋은지 연신 싱글거리며 여유롭게 허허거리는데 죽통을 한 대 갈겨주고 싶을 정도로 부아가 치밀었으나 그럴 수도 없는 일이였다.
아내는 차를 내려놓고 길준의 옆에 앉아서 바둑판을 들여다보았다.
“아 이 사람아!! 당신이 들여다보면 뭘 아나?”
길준은 바둑판을 들여다보는 아내가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보는 것으로 느껴져 한마디 내뱉었다. 속이 뒤틀리는 판에 아내가 바둑판을 들여다보니 심사가 더욱 꼬인다.
“제부!!, 저랑 한판 해요.”
이 때였다. 길준의 말은 아랑곳 하지 않고 아내가 폭탄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어 처형도 바둑 둘 줄 아세요?.”
동서도 아내의 폭탄선언에 놀란 나머지 눈이 둥그레 지며 되물었다.
“그저 조금 두네요.”
“정말이죠?! 헌데 전 내기 바둑 아니면 안둡니다.”
“그래요 내기 바둑 세 판만 하죠.”
길준은 큰일 났다 싶었다. 아내가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당신, 제정신이요?!”
“걱정 마시우. 당신 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렇게 시작된 바둑은 아내의 강력한 요구로 동서에게 두 점을 접고 바둑이 시작되었다.
동서는 처음에 아홉 점을 접으라고 하였으나 아내가 사람 무시 하냐고 한마디 하는 바람에 한판승부에 치수 고치기와 방내기를 겸한 바둑이 되었다.
길준은 아내의 이 무모한 도전이 비극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하고 그래도 곁에서 슬쩍 훈수를 할 요량으로 지켜보았다. 허나 바둑을 두는 아내의 모습에서 허튼 곳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두 점을 접고 둔 첫판에서 동서는 대마가 잡혀 만방이 나고 말았다. 바둑돌이 놓여질수록 동서는 몰리고 있었고 아내는 마치 폭군처럼 동서의 백돌들에게 엄청난 괴력의 힘을 발휘하며 우변에서 엮은 대마를 중앙으로 몰고 가더니 디워 라는 영화의 괴물이 마구 삼키고 파괴하듯 그렇게 동서의 대마를 삼켰다.
길준은 어안이 벙벙하여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노랗게 변한 동서의 얼굴에 대고 위안의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에이 착각을 하여서....”
동서가 입속에서 겨우 빠져나온 몇 마디의 말로 변명 아닌 변명을 했지만 이미 바둑은 시작 되었고 두 점에서 정선으로 치수를 낮추고 다시 시작된 바둑에서 동서는 혼신의 힘을 다하는 듯 보였으나 역시 역부족 아내의 엄청난 힘 앞에서 세 방이나 지는 수모를 당했다.
“아니 처형은 언제 바둑을 ....”
“머 그저 어깨너머로 익힌 바둑인데....”
아내는 입가에 알듯 모를 듯한 미소를 흘리면서 승자의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길준은 갑자기 아내가 무서워졌다. 아내의 바둑은 빈틈이 없었고 포석, 중반전, 타개의 솜씨, 끝내기등 뭐 하나 나무랄 곳 없는 프로기사에 버금가는 수준 이였다.
“아직 한판 남았죠?!”
바둑 두 판을 끝낸 시간이 벌써 자정을 넘겼으나 아내는 마지막 한판을 강요하고 있었다.
동서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다.
동서가 돌을 잡았다. 돌을 가린 결과는 아내의 흑번.
아내는 중국식 포석을 들고 나왔다. 동서는 이미 기가 꺾인 듯 착 점 하나하나가 힘에 부쳐 보였다. 아내가 웅대한 세력 작전을 들고 나오자 동서는 실리 위주의 바둑으로 이기기 힘들었다는 판단이 섰는지. 아내의 세력권에 특공대를 투입했다.
하지만 아내는 투입된특공대를 요리저리 몰고 [성동격서] 라는 바둑의 격언대로 다른 곳에 선수를 행사하며 투입된 특공대를 잡아버렸다. 전투를 즐기는 기풍으로 힘이 엄청난 아내의 세 판의 바둑을 보면서 길준은 세 판 내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처형!!, 도데체 바둑이 어느 정도 인거죠?”
세 판을 거푸 지고 체면을 구긴 동서는 쓸쓸히 바둑돌을 쓸어 담으며 아내에게 물었다.
“에이 어깨너머로 그냥 배운 바둑인데요..”
아내는 처절한 승부를 벌인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차분한 표정으로 그리 말하고는 자야겠다고 안방으로 가버렸다.
“처형 바둑 솜씨를 형님은 알고 계셨죠?!”
동서가 길준 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미치겠네....나도 도데체 도깨비에 홀린 것 같으이!!. ”
길준은 정말 도깨비에 홀린 것 같은 아내가 둔 세 판의 바둑에 대해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았으나 아내의 실력이 프로기사에 버금가는 실력 이라는 것 이외에는 도저히 아내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아침 밥상머리에서 아내가 연구생 2조 출신 이였다는 걸 알고서 길준은 그동안 2급이 약한 바둑실력으로 일급이라 으스대며 지낸 자신이 우스워 졌다. 헌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로에서 가끔 속초 댁 이라는 아디로 왕별을 단 사람이 오로 6단인 자신을 혼내준 기억이 떠올랐다. 아내의 바둑 두는 스타일이 그를 닮았다는 것을 느낀 길준은 씁쓰레한 웃음이 입가에 맴 돌았다.
그 뒤로 길준은 오로에서 속초 댁을 만나면 슬그머니 도망가는 버릇이 생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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