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가 싶더니 한줄기 소나기로 조금은 시원해진 느낌이다. 허기사 立秋가 엊그제 지나갔으니 계절은 속일수 없는 것이겠지....
어느새 농촌들판에는 벼가 이삭을 드러냈다. 추석이 한달 반 남았으니 좀 있으면 햅쌀밥을 먹게 되겠지.
취업을 하기전 농촌에서 살 때였다. 군문에 입대하기 전인 난 바둑에 한참 심취되어 있던 시절이라 틈만 나면 바둑판을 마주하는게 나의 유일한 낙이였다. 더군다나 동네에 바둑을 좋아하는 분들이 여러명 있던터라 바둑둘 상대는 얼마던지 있었다.
어느 여름철 오후 남들은 열심히 일하느라 정신이 없는데....난 동네 선배와 점심식사후 바둑 삼매경에 빠져서는 남들이 일하러 가는 것도 안중에 없고 오로지 대마사냥에 몰두하고 있었다.
내가 선배의 대마를 거의 잡았다고 얼굴에 만면의 미소를 띠고 있을 때였다.
"이 미친놈의 인간들아!! 지금 남들은 밭매느라 정신이 없는데 바둑두고 있으면 누가 밥먹여 준다냐!!"
동네 선배의 어머님이 일하시다 말고 밭에 안 나오는 아들을 데리러 집에 오셨다가 바둑에 빠져 있는 두 사람을 보자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르셔서 달려 오시더니 바둑판과 바둑돌을 쓸어 담아서는 화장실에 냅다 처넣었다.
옛날 시골 화장실이야 거름을 한다고 사람들의 배설물을 오랫동안 저장하기 위해서 집집마다 화장실의 저장고가 엄청나게 크던 시절이니 바둑판과 바둑돌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똥통(시골에선 이렇게 불렀다)으로 잠수해버렸다.
참으로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난 너무도 황당하여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데....
" 야 이 비러먹을 놈아!! 메뚜기도 오뉴월이 한철인데..너는 늙은 부모가 밭에서 일하는데 바둑이나 두러다니냐 이 미친놈아...!!!"
화가 머리 끝까지 나신 선배의 어머님은 나까지 싸잡아서 몰아 부치는데 나는 한참을 멍하니 야단을 맞다가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왔다.
돌아오는 순간에도 내 머리 속은
[아이고 그 대마 다잡았는데....]
하는 생각뿐이였다. 평소 나보다 고수라고 으스대던 선배를 정선으로 몰아부칠 절호의 찬스는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그 뒤로는 여름에 바둑을 두기 보다는 일이없는 겨울에 화로불을 옆에두고 바둑을 더 많이 두게 되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