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의 대표적인 문화재가 태기문화재다.

 이 문화재의 이름은 태기산에서 나왔고, 태기산은 태기왕의 전설로 태어났다. 원래는 덕고산이라고 했다.

 횡성지방에는 태기왕의 전설로 태어난 지명이 한두 곳이 아니다. 태기산이 있는 청일면, 갑천면, 둔내면 일대는 전설의 원산지나 다름없고, 이웃하고 있는 평창군 봉평면 일대에도 태기왕의 전설로 태어난 지명이 적지가 않다. 그래서 지금도 횡성에만 가면 태기왕을 만나게 된다.  그의 이야기가, 전설이 만든 지명들과 함께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몇 십 년 전의 인물도, 몇 백 년 전의 인물도 아니다.  2천년 전의 인물이다. 우리의 사가들이 멀정한 역사를 신화라고 핍박하고 있는, 그것도 대륙을 지배했던 고조선시대의 왕이다.

 보이지 않은 세월 속에서도 엊그제 인 듯 살아 있지만, 그러나 아직도 뿌리내리지 못한 체 산천으로 떠돌고만 있는 것이 또한 그의 신세이기도 하다. 근 2천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야기로만 살아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신세가 안타까운 게 아니라 우리의 역사가 안타깝고, 그 역사를 써가는 우리들은 더 안타깝고 딱한 신세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오랜 세월 뿌리 없이 떠돌고는 있어도, 왕은 왕 이구나 싶다. 마치 몇 년 전의 일처럼 너무도 또렷한 그의 흔적 때문이다. 신라 초의 인물이니 어림으로도 신라 천년, 고려 5백년, 조선 5백년이니 2천년이다. 이게 태기왕의 수명이다.

 백년도 안 된 그의 삶이 세월이 흐르고 시간이 갈수록 그의 행적이 또렷해져, 이곳 동내 젊은이들 까지도 그의 이야기를 주어 섬긴다. 지금까지 2천년을 살아왔는데 앞으로 2천년을 더 못 갈 이유도 없다. 그래선지 지금도 갑천, 어답산, 병지방리, 동막, 어염골, 큰 성골, 작은 성골, 신대리, 촛대바위, 백옥포, 면온리 그리고 태기산성에는 태기왕의 체취와 군사들의 절규가 생생하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의 마지막 전투에서는 운명과 병법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태기왕과 운명을 같이했다는 삼형제장군에게서는, 삶의 순간순간 자신의 손익만을 암산하며 살아가는 현대의 요령주의자들에게 믿음과 충직이 인간관계의 근본임을 깨닫게도 한다.

 횡성의 태기왕은 신라의 모체였던 진한의 마지막 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흥세력인 박혁거세에게 쫓기어 횡성까지 와서는 한 냇가에서 땀과 갑옷을 씻고는 오늘의 "갑천"을 탄생시킨다. 전망 좋은 산에 진을 치고는 임금이 밟았다고 "어답산"을 만들고, 병사들이 적을 방어하던 곳이라 하여 "병지방리"를 또 탄생시킨다.

 어답산 동쪽에 군막을 쳤다 해서 "동막 삼거리"를 만들고 또, 덕고산으로 피신하여 덕고산을 "태기산"으로 둔갑시킨다. 태기왕의 행적 하나하나가 그대로 지명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피신한 산세를 보니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연요새다. 높은 산인데도 풍부한 샘이 있고, 넓은 구릉지까지 있는데도, 험한 산과 울창한 수림이 높은 담처럼 보호막이 되어주어 피신하기가 안성맞춤이다. 앞은 깎아지른 낭떠러지요 뒤에는 큰 령이 막고 있는, 그야말로 높고 험하고 깊은 산이다. 그래서 그곳에 성을 쌓고, 전답을 개간하고, 그리고 군사 훈련을 시켰다. 군량의 감초 소금을 저장하던 곳이라 하여 그곳에 "어염골"도 남기고 있다.

 그리고 4년이 지났다. 전답은 20여 두락에 달했고, 패잔병은 정예병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예나 지금이나 호사에는 꼭 마가 끼게 마련인가, 하루를 버티기 어려웠던 형편이 4년이나 자족하며 보낸 여유가 마를 불러 온 모양이다.

 짐승도 길을 잃고 헤맨다는 높고(1,261미터) 험하고 그리고 깊은 산이었기에, 절대 찾을 수도 없고, 찾는다 해도, 들어 올 수는 더 더욱 없다고 믿었던, 그 뒤쪽의 높은 령을 넘어 적이 쳐들어 온 것이다. 위험한 길보다 빤한 길에서 사고가 나듯, 매사 조건보다는 마음을 놓고 있는데서 일이 터지는 모양이다.

 뒤통수를 맞았는데 무사 할 리가 없다. 전방을 지키던 삼형제 장군이 필마단기로 달려와 태기왕을 구해 내긴 했으나 결국 갈 곳이 없음을 알고는 백옥포에 이르러 태기왕을 등에 업고 깊은 소에 뛰어들어 이야기를 마감한다. 삶은 희망의 산물이란 사실이 죽음으로 남긴 교훈이 되었다. "백옥포"는 군사 없는 백의의 장군이 옥체를 업고 투신했다 해서 생긴 이름이다.

 패망한 태기왕의 군사들은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새로운 마을을 만들고 살았다 해서 갑천면에 "신대리"가 태어났고, 적군이 기습할 때 망보던 보초가 놀라 굳었다는 "촛대바위"가 오늘도 말없이 산객을 맞이하는 걸 보면, 그 옛날의 공포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다.

 지금의 봉평면 면온리도 태기왕이 멸망한 곳이라 하여 운을 다했다는 멸운을 거처 "면온리"가 되었다고 하고, 봉평면 무이리도 태기왕이 해가없는 밤에 지났다고 해서 무일을 거쳐 "무이리"가 되었다고 하니, 태기산을 중심으로 아직도 잠들지 않은 태기왕의 숨결은 사방에 널려있고 또 들어 볼수록 살아있는 얘기가 되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다 역사의 교훈 인가 싶다.

 이곳은 성터로만 좋은 곳이 아니라 등산로로도 그만이다. 울창한 원시림도 좋았고, 성돌에 묻혀있는 궁금한 역사도 산행의 에너지원이 되어주었다. 역사에 묻히고, 산세에 취하다 보니 언제 정상에 올랐는지 알 수없게 하여, 오히려 아쉬움이 남는 등산이구나, 했다.

 지금도 작은 성골로 4-50분 만 오르면 태기산성을 만나게 된다. 2천년 후의 눈으로 봐도 이렇게 좋은 조건의 성터를 본적이 없다. 오르는 산길은 코가 땅에 닿을 듯이 가파르지만, 능선에  오르면 허리를 펼 수 있고, 조금만 더 가면 양쪽이 천길 단애로 깎아놓은 외길이 이어진다.

 자칫, 일부러 만든 해자처럼 인공물로 착각하기 쉽다. 저승길 처럼 아랫도리가 서늘한 외길 30여 미터를 한사람씩 지나면, 무너지다 만 성문 안으로 들어서게 된다. 또 성 안에는 넓은 구릉지까지 산림에 묻혀있어, 패망 후 귀향하지 못하고 신대리에 눌러 살았다는 그 병사들의 후예들이,  2천년 후에도 다시 개간하고 모여든 듯, 지난 70년대 화전정리 할 당시만 해도, 분교까지 있었다니 예나지금이나 얼마나 좋은 조건의 성터 이었던가 싶다.

 그런데도 태기왕의 운명이 고작 여기까지였다니 안타까운 생각만 더할 뿐이다. 경계만 제대로 서게 했어도 병사들은 물론, 자신의 천수도 다했을 것이고, 적의 정보와 동향도 제대로만 살폈다면, 이런 천연요새가 어찌, 그리 쉬 무너질 수가 있었을까?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천려일실을 통탄하며 오히려 우리에게 되묻는 것 같아 잠시 걸음을 멈추고, 괜히 왔다 간다던 어느 스님처럼, 괜한 세월만 보내고 있는 내 일상에 만족하여 깜빡 정신을 놓고 있는 자신을 보게한다. 

 도대체 조건이 좋은 것은 무엇이며, 태기왕의 자책은 어디서 왔는가? 맞는가 보다. 조건과 업적은 달랐다. 위대한 지도자는 위기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다고 역사가 웅변한다. 백척간두에 선 듯 한, 어둡고 혼란한 때 나라의 기틀을 세운 우리의 건국 대통령이 그랬고, 4,000여 년 동안이나 물려받은 가난을 당대에 해결한 경제대통령 모두, 어려운 시기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역사상 우리의 국력을 가장 크게 떨쳤던 고구려의 광개토대제는 생명의 위협을 받아가며 숨어 지내야 했던 어린시절의 위기가, 위대한 업적을 남긴 동기가 되어, 위기를 기회로 바꾼 대표적인 인물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도 흔하게 듣던 “위기가 기회”란 말이 비로소 귀에 오롯이 들어오고 있고, 권력은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도, 위기에서만은 예외임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구나, 했다.

 중국의 시조라고 하던 삼황오제의 신화는 근자에 와서 그들의 화하공정에 의해 역사로 안장했다고 한다. 고구려 역사를 왜곡한 동북공정 외에도 그들의 국경을 돌면서 서북공정과 동남공정까지 이미 마쳤다고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국의 지탄만 받을 뿐이지만, 한 세기만 흘러도, 그 후를 장담 할 자신이 없다. 왜곡된 역사가 뿌리 내리지 말란 법이 없는 것도, 세월과 역사의 속성이 아닐까 싶어서이다. 세월은 약이 되고, 역사란 적극적이고, 이긴 자의 것이란 얘기 때문이다. 

 2천년이나 지난 지금도 태기왕의 수명이 끝날 줄 모르고, 그 전설이 생생하게 이어지고 있는데도, 우리는 역사로 안장해 줄 엄두도 못 내고 있다. 진한의 왕인지, 맥국의 왕인지도 확실치가 않다. 태기왕이 지었다는 태기산성도, 성터는 멀정한데 전설로만 치부되고 있을 뿐이다.

 남들처럼 없는 기록을 만드는 것도 온당한 역사의식이 아니지만, 있는 기록을 무시하는 것도 올바른 역사인식이 아니다. 다만 남들은 신화를 역사로 꾸미는데, 있는 기록도 신화라고 치부하는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싶을 뿐이다. 치부하고 방치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보호하고 있는 국가와 역사에 대한 예도 아니고, 오히려 배신이 될 수도 있어서이다.

 하기야 기원전 2,333년에 국조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나라를 세웠다는 고조선도 아직 역사에 안장되지 못한 체 산천을 떠도는데, 하물며 태기왕의 전설이랴, 하니 참으로 가슴이 허허할 뿐이다. 오늘 태기왕의 전설을 찾아 나선 산행은 즐거웠지만, 산천을 떠돌고 있는 그의 신세와 우리의 역사인식엔 마음이 무거워 옴을 숨길 수가 없다.

 산성을 돌아 큰 성골로 내려오는 길가, 밑이 보이지 않는 수십 길 낭떠러지 위, 낙수대의 좁은 터 아늑한 잔디밭에, 넘어가는 햇살을 받으며 따뜻하게 누워있는 이름모를 영혼이 더 행복 하구나 했다. 홍천의 가리산 자락, 한총의 전설처럼, 이곳도 누군가의 손길로, 사철 끊임없이 단장되고 있는 고전의 사랑이 끝없이 이어진다 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