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제에는 마의태자가 있다.
신라 왕자의 신분으로 이곳 강원도에서 생을 마친 이가 둘이 있는데, 하나는 철원궁예요, 하나는 인제의 마의태자이다.

궁예는 태어나자 말자 신분을 속여야했고, 또 서민으로 자라온 한을 삭이면서 신라를 멸망시킨 고려의 기초를 철원 땅에 세우게 되고, 마의태자는 궁예가 세운 나라로 하여금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신라의 마지막 태자가 된 비운의 인물이 되어, 지금의 인제 땅 곳곳에 충의서린 구국의 혼을 심어놓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인제에 가면 살아 있는 태자의 고결한 숨결을 느끼게 된다.

신라의 천년사직을 고려 왕건에게 내어 줄 때 “나라의 존망은 반드시 천명에 있으니 충신, 의사와 더불어 민심을 수합하여 죽기로서 지키다가 힘이 다하면 말지언정, 어찌 천년사직을 들어 남에게 그냥 내어 줄 것인가?” 라고 한탄하며 돌아서 입산한 마의태자의 충의지심이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려는 다물(多勿)정신의 씨가되어 이곳 인제군민들과 함께 살아오고 있다.

“울며 소맷귀 부여잡는 낙랑공주의 섬섬옥수를 뿌리치고 돌아서 입산할 때 대장부의 흉리가 어떠했을까? 흥망이 재천이라 천운을 슬퍼한들 무엇하랴만, 사람에게는 스스로 신의가 있으니, 태자가 고행으로 창맹에게 베푼 도타운 자혜가 천년 후에 따습다. 천년사직이 남가일몽이었고, 태자 가신지 또다시 천년이 지났으니, 유구한 영겁으로 보면 천년도 수유던가!” 

마의 초식한 태자의 충의를 생각하고, 그리고 인생의 허무함을 토해낸 정비석의 “산정무한”도 이곳에서는 마의태자를 그리는 주민들의 몸부림이 되고 있다.

마의태자는 신라46대 문성왕의 7대손이다. 신라55대 경애왕때 아버지 김부와 맏아들인 일(鎰)이 간신들에 의해 옥중에 감금되어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와 경애왕을 죽이고 옥에 갇힌 김부를 왕으로 앉힌 데서, 마의태자로서의 비운이 시작된다. 김부가 곧 신라 마지막 임금이 된 경순왕이요, 제1왕자인 일(鎰)이 (이광수 소설에서는 충(忠)으로 나온다.) 바로 마의태자이기 때문이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천운이라 했던가? 부패하고 무능했던 왕권에 치를 떨었던 지난 세월도 잊었던 모양이다. 남의 도움으로 왕(경순왕)이 되어 8년간이나 재위했으면서도 무능하고 부패한 조정하나 바로잡지 못해 결국 나라는 길을 잃었고, 백성들은 절망했다. 백성의 살림이 토탄에 빠졌고, 천년사직이 무너지는데도 자신들의 영달만을 걱정했던 임금이요, 대신들이었다.

일(鎰)이 태자가 되기 전, 한 충신을 찾아가 눈물을 흘리며 “나는 전 시중 효종의 손자요, 내 조부가 대감과 원수 인줄도 아오. 그렇지만 나는 내 조부가 싫고 대감을 존경하오. 대감은 일점 충의지심을 품은 줄을 아는 까닭이요.”라고 했다니,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태자의 기개요, 의기의 투합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이런 태자의 충의를 무마하기위하여 사위로 삼고자, 데려온 낙랑공주에게 그 아비가 반하여 며느리가 아닌 부인으로 맞이한 후안무치한 왕의 탐욕에서는 56왕 992년을 지탱해온 천년사직의 명운이 너무 긴 것도 같았다.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로 자진은 못할망정, 사직이 무너지는 와중에도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니 그게 만백성의 임금이었고 자식을 둔 아비였던가 싶을 뿐이다.

태자의 늠름한 의기에 반한 공주가 자신의 지아비로 마음을 굳힌 데서 태자의 비운은 더욱 아픈 가슴을 친다. 뿌리치는 태자를 공주가 쫓고, 싫다는 공주를 시아비가 쫓은 꼴이다. 큰집이 무너지는 판에 바지랑대 하나로 버틴다고 될 것으로 믿었던 답답한 태자가 아니었다.

공주와 결혼하면 몸 하나 편한 것쯤은 알 수도 있겠지만, 진 인사를 다하지 못한 회오도 회오려니와, 어려서부터 스승에게 배운 충의의 교훈이 태자의 마음속 깊이 박혀 이를 뽑을 수도, 잊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그러나 아무리 충의를 말한들 무엇 하랴, 무너져 내리는 사직을 붙들고 일으켜 세우기에는 너무도 늦었다. 아비는 천년사직을 왕건에게 바치고, 고려(송도)로 떠나갔고, 태자는 자신의 소매를 잡으며 “이 몸이 이곳에 오기는 천리 아니라 만리라도 마마 따라 가겠다고 왔는데”라고 말끝을 못 맺는 낙랑공주를 뿌리치고 개골산으로 들어간 것이 곧 이곳 인제와 연을 맺게 된 전말이다.

그래서 인제 지방에는 태자의 비운과 기개와 자혜가 함께 스며있는 곳이기도 하다. 신라 48대 경문왕이 왕비의 투기로 애첩이 낳은 핏덩이 하나를 죽이려다 실패한 업보(業報)로 그 핏덩이인 궁예를 통해서 천년사직이 무너진 것과, 이것 때문에 나라를 잃고 입산하여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다물(多勿) 정신을 이곳 인제 땅 곳곳에 심어놓고 전설 속으로 사라진 태자의 운명은 분명 비운이요 기연의 연속이었다.

8대나 되는 윗대 임금이 뿌린 업보가 하필 태자에게 지워졌을까? 옳곧은 충의지심과, 나라 위해 진 인사를 다하지 못해 비분강개했던 마음, 그리고 고토회복의 구국운동은 분명 태자의 기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며, 일신의 영달을 마다하고 입산한 태자의 고행은 창맹에게 베푼 자혜가 아니었을까?

고통 받은 창맹들에게 무슨 죄가 있을까? 지금도 무너지다만 북면 한계리의 한계산성에는 천년사직을 되찾으려는 태자의 염원이 천길 단애 위, 이끼 낀 성 돌에 서려있고, 아직도 5.5일과 9.9일에 지내고 있다는 남면 김부리의 김부대왕 춘추동제는 태자에 대한 창맹들의 그리움이 서려 있다.

태자가 수레타고 넘던 술구네미 고개, 옥새를 숨겨놓았다는 옥새바위, 병사들이 주둔했다던 갑둔리, 그리고 의병을 훈련시키고 군량미를 쌓아놓았다는 양구읍의 군량리가 천년을 이어온 것도, 모두 태자의 의기를 그리워하는 이곳 주민들의 한결같은 마음 때문은 아닐까?

태자의 전설이 모여 있는 김부리 일대가 지금은 첨단 군사과학훈련장이 된 것은 태자의 혜안인지, 지역의 운명인지는 알 수 없으나, 태자의 염원이 천년을 건너뛰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 아닐까 싶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고구려를 재건하고자 발해를 세웠던 고구려의 유민들처럼, 신라의 천년사직을 되찾겠다는 태자의 다물 정신은 절실한 염원이 되어 남면 어론리에 생생히 살아 있다는 점이다.

다물이란 옛 땅을 돌이킨다는, 이른바 고토회복운동을 말한다. 광개토대제가 넓혀놓은 광활한 영토를 되찾겠다는 다물 운동은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몫이었다면, 신라를 되찾겠다는 다물 운동은 마의태자의 숙명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어론리에 가면 “다물”이란 자연부락이 아직도 태자를 기리고 있는가 하면, 춘추로 동제 지내러 갈 때 신발 벗지 말라고 “다물교”란 다리를 그것도 여섯 군데나 놓아놓고 있다.     

태자가 개골산으로 들어가 나라를 망친 죄를 씻을 길이 없어, 듣지도, 보지도, 느끼지도 않으려는 결심아래 돌이 되어 금강산 1만2천봉 중 태자봉이 되었다고는 하나, 국학자 김종권이 20여년의 답사 끝에 인제 갑둔리와 김부리 사이에 능묘 1기를 발견하고, 이를 마의태자의 무덤이라고 새롭게 주장했다고 한다.

마의태자의 은거지였던 한계산성과 같은 줄기에 있고, 김부대왕각에 모신 경순왕 제1자의 위패와, 철제 우형 신물 2점, 또 능묘 4키로 이내에 충신의 큰 무덤 3기가 있다는 것, 그리고 개골산은 금강산을 일컫기도 하지만 설악산도 개골산이라고 불렀다는 점들이 그 이유라고 했다.

어쨌거나 진실은 더 많은 연구와 고증이 있어야 하겠지만 어쨌든 인제지역은 마의태자의 망국의 한을 풀어놓고, 어머니 백화부인과 태자비 계영부인, 뒤늦게 입산한 낙랑공주까지 편히 재워주고 있는 비운의 전설이 깃든 역사의 현장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래서 이곳 인제에만 오면 긴장부터 풀리는가 보다. 독을 쓰면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긴장이 풀림은 무장해제와 다를 바가 없다. 아마도 천년 전 태자의 충의와 기개와 자혜가 지역민들 마음속에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충의와 기개는 서릿발 같아도 속이 후련하고, 자혜는 듣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하고 포근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태자와 함께 천년을 살아온 이들이 어찌 그를 닮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도 나는 바람불고 추운 날, 이곳 주민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이 안타까운 역사의 현장을 더듬고 있다. 이것도 결코 잠들지 않은 태자의 숨결때문이 아닌가 싶다. 태자여 영원하라!